238화- 활불의 제안
‘조금만 더 가까이... 오너라.’
활불이 자신에게 다가오자 현우자는 자신의 손 안에 쥔 것을 사용하기 위해 거리를 재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수를 위해 남겨둔 비장의 수단. 비산독침(飛散毒針)을 쓸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서문세가의 광기자가 만든 암기로 우연치 않게 현우자가 구하게 되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물건으로 한 개의 작은 구슬로 보이지만 내력을 실어 던지는 순간 구슬이 깨어지며 날아가 상대에게 박히는 독침이었다.
금강불괴(金剛不壞)라고해도 뚫릴 정도의 관통력을 가졌고 사천 당가의 절독까지 머금고 있는 독침이라 필살의 무기라 현우자가 호신용으로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물건이었다.
광기자가 만든 암기들은 사천 당가의 의뢰를 받으면서 더욱 괴랄해지고 무서워졌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비산독침이었다. 광기자와 사천당가의 역작이라고 부를 정도의 물건이었다.
‘제대로 작동하겠지?’
현우자는 자신의 손 안에 쥔 것이 제대로 작동할지 조금은 걱정스러웠다. 광기자의 물건이라기에 지금껏 의심하지 않고 지니고는 있었지만 써야할 상황이 오자 제대로 작동할지부터 이게 광기자의 물건이 맞는지도 의심이 생겼다.
하지만 현우자는 이내 잡념을 털어버리고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활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 사정거리에 들어오자 행동에 나섰다.
피잉-
현우자는 자신의 손아귀에 있던 비산독침의 구슬을 손가락으로 튕겨 활불에게 날렸다.
“뭔가 노리는 것 같더니 이것이었나?”
날아드는 것이 구슬임을 확인한 활불은 손바닥을 펼쳐 날아오는 구슬을 잡으려는 모양새를 취했고 그 모습에 현우자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파자자작-
“아니!”
날아오던 구슬이 갑자기 수갈래로 갈라지며 세침(細針)으로 변하여 날아들자 찰나의 순간 활불은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끼고 손바닥에 강기(剛氣)를 두껍게 쌓아갔다.
파바바박-
세침들이 강기와 부딪치자 두꺼운 강기의 벽에 박히듯 파고들었다. 그리고 활불의 표정이 바뀐 것은 바로 그 뒤였다.
강기의 벽에 막힌 듯해보였던 세침들이 마치 생명이 있는 뱀들처럼 무섭게 파고들기 시작했고 그것에 놀란 활불은 양 손을 써서 내력을 집중시켰다.
주르륵-
강기를 매섭게 파고들던 세침들은 강기의 벽에 부딪쳐 생명이 다한 것처럼 녹아 흘러내렸고 그제서야 활불은 안심하고 힘을 풀었다.
“혈천강기(血天剛氣)를 뚫는 세침이라니? 놀랍군. 네가 이런 것을 준비했을 줄은 몰랐어?”
활불은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세침들의 흔적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방심을 하고 쉽게 막으려들었다면 정말 낭패를 볼 뻔했음에 처음부터 강기를 사용해 막을 생각을 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현우자가 무슨 꿍꿍이가 있음은 처음 다가서는 순간 알았고 손을 만지작거리고 있다는 것도 눈치 채었다. 그저 어떤 수를 쓰려기에 궁금했고 무당의 일원이기에 방심하지 않았던 것이 다행이었다.
활불은 마지막 수가 실패하자 좌절한 채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현우자에게 다가가 그의 뒷덜미를 쥐고 들어올렸다.
“으윽... 죽여라...!”
볼썽사납게 뒷덜미를 잡혀 대롱대롱 매달린 모습이 꼴사나웠기에 현우자는 생을 포기했다. 마지막 수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마음은 꺾였다. 현월자와의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이곳에서 생을 마감해야 함이 안타까웠으나 무당이 이전과 같이 모두가 죽은 것이 아니라 그래도 마음 편하게 죽을 수 있을 거 같았다.
“너를 쉽게 죽여줄 수야 없...”
쿠당탕-
“크흑... 무엇이?”
자신의 목을 잡은 손에서 내력이 흘러들어오려는 순간 갑자기 활불이 자신을 놓고 물러서자 현우자는 그대로 엉덩방아를 찧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활불이 갑자기 자신을 놓아주고 물러선 이유를 몰라 두리번거리던 현우자는 자신의 뒤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었다.
“검성님?”
현우자는 자신의 뒤에서 천천히 걸어오고 있는 검성을 발견하곤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역시 검성이었군? 제법 매서운 기운이다 했어.”
활불은 현우자의 목에 내력을 주입해 고통을 주려는 순간 날카로운 예기가 자신을 노리는 것을 감지하곤 피했고 그 기운을 발산한 자는 바로 검성이었다.
“검성이 허울뿐인 이름만은 아니었군. 기대를 할 만해.”
활불은 기분이 좋은 듯 검성을 보고 말했지만 검성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현우자에게 다가가 활불 따윈 안중에 없는 듯 그를 부축해 일으켜주고 있었다.
“물러나 있어라. 저 녀석은 약속대로 내가 상대해주마.”
“검성... 저자는 정말로 전대 활불이었습니다... 위험한 자이니 조심하십시오.”
“물러나 있어라.”
검성은 현우자를 뒤로 물러서게 했고 그러자 활불의 기세에 움직이지 못하고 있던 살아남은 무당의 제자들이 얼른 달려와 현우자를 부축해갔다.
이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검성을 향해 활불은 미소를 보였다.
“우린 동류(同流)의 사람이군?”
“무슨 말이지?”
“너의 눈빛에서 느껴지는 공허함. 그건 나도 느끼는 감정이지.”
활불은 검성이 자신과 같은 강자의 공허함을 느끼고 있음을 보자마자 알았다. 절대적인 강자로써 군림했지만 정작 호적수를 찾지 못해 공허함을 가지고 있음을.
“우린 서로의 좋은 상대가 되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말을 돌려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검성은 활불이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말을 돌리자 조금은 불편한 듯 감정을 드러내었다.
“성질이 급하군. 검성 그대와 호적수가 될 수 있고 친구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이야기하는 것이다.”
“친구?”
“그래.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어떤가? 오늘 이 자리에서 너와 겨루고 끝내는 것은 아쉬울 듯 해. 나와 함께 무림을 지배하고 같이 군림하는 것이 어떤가?”
“......”
검성은 활불의 터무니없는 제안에 조금은 웃음이 났다. 하지만 활불의 표정은 진지했고 농담이 아니었다. 오히려 활불의 제안에 난리가 난 것은 지켜보던 불마사의 승려들과 살아남은 현우자와 무당의 제자들이었다.
“나는 최고가 되기 위해 무공을 연마했고 최고가 되기 위해 살았다. 그리고 서장에서 그리고 무림에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지만 공허함은 견디기 힘들었다. 너도 나와 같이 그런 감정을 느끼고 있음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나와 넌 서로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상대가 될 수 있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가?”
활불의 진지한 제안에 검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살면서 들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터무니없고 웃긴 이야기군.”
“뭣이?!”
활불의 제안에 검성은 담담하게 말했다.
“강자의 고독 뭐 그런 건 견디기 힘든 감정이 아니야. 내게는... 물론 나도 너와 같이 고독한 삶의 이유를 찾지 못해 모든 것을 놓아 버리려고 했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고독하지 않다는 것인가?”
“그래. 너와 이런 이야기까지 해야 하는 것이 웃기지만 난 내가 해야 할 또 다른 일을 찾았거든. 그리고 이 세상에 내 상대가 되어줄 자가 너 하나라고 생각 하지도 않아.”
“해야 할 일이라... 네가 제자를 아낀다는 이야기는 들은 것 같군. 네가 말하는 일은 네 제자를 가르치는 일을 말하겠지?”
“너와 말을 더 섞는 것은 낭비일 듯 하군.”
스르릉-
검성은 정천검을 뽑아 들었고 이에 활불은 소매를 펄럭이며 자세를 바로 잡았다.
“명성이 자자한 검성의 실력을 드디어 보겠군. 선택에 대한 후회를 하게 해주지.”
활불은 자신의 제안을 거절한 검성에 대해 은은한 노기를 뿜어내었다.
츠츠츠-
활불의 전신으로 핏빛 붉은 기운이 몰아 쌓였고 그것은 활불이 익히고 있는 혈천마공의 혈천강기가 전신에서 발산되고 있는 모습이었다.
활불과 검성이 부딪치기 직전까지 가자 지켜보던 무림맹의 무인들과 불마사의 승려들은 재빠르게 물러서기 시작했다. 검성과 활불이 대결한다는 소문이 났는지 사람들이 더욱 몰려들고 있었고 생사를 걸고 지금까지 싸운 자들이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둘의 대결에 집중하며 싸움이 멈춰있었다.
두 사람의 대결 결과에 따라 모든 것이 정해질 것이 자명했기에 당연한 관심도였고 무엇보다 모두가 무공을 배운 자들로서 누가 더 강할지에 대한 호기심은 현재의 상황을 앞지르고 있었다.
잠시 대치하는 와중에 먼저 움직인 자는 바로 검성이었다.
파밧-
촤자작-
검성은 단숨에 거리를 좁혀 활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빠르고 가벼운 검으로 보였지만 활불은 검을 막거나 잡지 않은 채 피해내며 일장을 내뻗었다.
퍼벙-
활불의 손바닥에선 붉은 강기가 발출되었다. 활불은 가슴으로 좌장(左掌)을 검성이 몸을 비틀자 바로 우장(右掌)을 연이어 검성의 얼굴을 노리고 뻗었다. 연이은 공격에 검성은 피할 수 없음을 감지하자 검을 아래에서 위로 베어갔다.
활불은 검성의 날카로운 검에 입맛을 다시며 우장을 빼며 검을 피하며 바로 다리를 뻗어 검성의 머리를 차려했다. 지켜보는 이들이 보기엔 그저 가벼운 좌우 장법과 각법(脚法)이었지만 공격마다 혈천강기를 두른 채 공격했기에 검성은 신경 써서 피하고 있었다.
서로 탐색전을 하듯 가벼운 공방전이 이어졌고 큰 기술이 아닌 검성은 찌르고 베는 초식이 없는 공격을, 활불 역시 혈천강기를 운용하곤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큰 기술을 사용하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격 하나하나가 매서웠고 당하면 치명상인 것은 매한가지였다. 두 사람의 합이 길어질수록 점차 분위기는 고조되고 있었다.
콰직- 콰자작-
두 사람이 체내에서 발산하는 기운이 서로 부딪치고 있었는데 화재로 무너진 건물의 잔해가 두 사람 쪽으로 날아가 부딪치기도 전해 산산조각 날 정도였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잔해로 인해 두 사람은 소강상태에 들어가며 물러나 숨을 골랐고 크게 지친 것으로 보이지 않았고 검성과 활불 모두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깃들어있었다.
“오절이 무림 최고의 기재들이고 그중 검성이 으뜸이라는 말은 들었지만 이정도 일지는 몰랐군. 내가 무림정벌을 나섰을 때 많은 무림인들이 죽어가면서도 이야기했었다. 오절이 사라지지 않았다면 우리가 무림을 유린하지 못했을 거라고.”
“......”
“나는 그게 허언과 무림인들의 바람이 복합적으로 표출된 말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아니군. 너 하나가 이렇게 강한데 오절 전부가 있었다면 분명 쉽지 않았을 거 같기도 해.”
“잡설이 길군.”
활불의 입에서 오절의 이야기가 나오자 검성은 조금 기분 나쁜 듯 반응했다.
“다시 한 번 제안하지. 이여반장(易如反掌)이지 않나. 지금은 너와 내가 적이지만 마음만 바뀐다면 좋은 친구가 동료가 될 수 있을 거 같지 않나? 이렇게 너와 겨루는 것이 즐거운데 이번 한 번으로 끝내기엔 아쉽군.”
활불의 진심어린 말에 검성은 실소(失笑)가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