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화-기습(奇襲)(2)
"너와 내가 지금 기만을 이야기 할 상황이더냐?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
"너는 무림을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이곳에 온 불마사의 승려가 아니더냐? 난 그것을 막기 위해 네 앞에 서 있는 것이고. 한데 너에게 무슨 짓을 하던 내가 꺼릴 것이 있을까? 난 나름 너희가 유희거리는 될 것이라 생각하며 기대했는데 조금은 실망스럽구나."
"유희거리? 지금 이 상황이 당신에게……"
검성의 말에 탁룽은 화가 나 버럭 소리를 지르다 검성과 눈을 마주치고는 입을 닫아야 했다. 세상 무심한 듯 차가운 검성의 눈빛에 압도되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너에게 더 이상 볼 일이 없을 듯하구나. 오늘은 이 정도만 해야겠다."
달칵-
검성은 말과 함께 정천검을 잠깐 뽑았다 다시 닫았다. 그 순간.
촤악-
"끄억……"
탁룽은 자신의 목을 부여잡으며 그대로 꼬꾸라졌고, 붉은 승복은 그의 피로 더욱 붉게 물들었다. 검성의 발검(拔劍)은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서 어느새 정천검이 탁룽의 목을 꿰뚫고 다시 칼집에 돌아와 있었다.
"신마와 비슷한 실력이라 하기엔 어설프군."
검성은 차가운 시신이 되어버린 탁룽을 바라보며 말하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하늘엔 설응들이 불덩이를 날라 떨어뜨리고 있었다.
"준비된 것들이 떨어지기 전에 마무리를 하고 떠나야겠지. 윤후에게 가보아야겠군."
검성은 설응들이 불덩이를 떨어뜨리는 것이 끝나기 전에 철수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일은 마무리했기에 이윤후를 찾아 복귀하기로 했다. 약선도 아마 싸우고 있겠지만 탁룽을 상대해 본 검성은 다른 종파 수장들도 비슷한 실력이라면 약선에게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파밧-
밤하늘 위로 날아오른 검성의 신형이 이윤후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으로 향했다.
***
"크억!"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붉은 승복의 승려가 차례로 쓰러졌다. 자신을 향해 덤비던 마지막 승려가 쓰러지자 약선은 자신의 앞에 마주한 노승을 보았다.
서장 승려들이 입는 붉은 승복에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노승은 수하들을 쓰러뜨리고서 자신을 바라보는 약선을 마주 보았다.
"제법 여유가 있군요? 당신이 이들의 수장인가요?"
약선의 주위엔 수십의 승려들이 쓰러져있었다. 검성과 달리 사람들이 몰려있는 곳에 착지하게 된 그녀는 도착과 함께 싸움에 휘말리며 모두를 상대해야했다. 그 탓에 조금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지만, 최소한의 동작으로 다수를 쓰러뜨렸기에 크게 체력을 소모하진 않았다.
'윤후에게 보여주었으면 좋았으련만…… 아쉽군.'
약선은 눈앞에 강자를 두고도 다수와의 싸움을 벌였던 자신의 모습을 이윤후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녀가 이윤후를 검성과 번갈아가며 가르치면서 가장 중요하게 이야기했던 것이 다수와의 싸움에서 체력을 안배하는 것과 최소한의 힘으로 다수를 제압하는 방법이었다.
방금 싸움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었는데 이윤후에게 보여주지 못한 것이 약선은 아쉬웠다.
"무림에서 이 정도 무위를 보여줄 수 있는 여인은 딱 둘 밖에 생각나지 않는군. 최근 다시 활동을 시작한 오절의 도후 그리고 약선. 도후는 지존의 수하들의 기습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고 요양 중이라 들었으니 당신은 약선 서문애령이겠군."
월명종의 수장인 텐진 라흐파는 약선을 바라보며 조금은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아마 지금의 사태는 당신들이 잠입하기 위한 장치였나? 그렇다면 약선 당신만 왔을 리는 없고…… 검성도 온 것인가?"
텐진 라흐파는 아직도 하늘에서 불덩이를 계속 낙하시키고 있는 설응들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고는 약선을 향해 물었다. 수긍도 부정도 하지 않는 약선의 모습을 보고는 텐진 라흐파는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갑작스러운 공격이 너무 조잡스럽다고 생각은 했지만, 기습에 검성과 약선, 무림오절의 두 사람이 잠입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군."
텐진 라흐파는 검성까지 이곳에 왔다면 이미 누군가 그의 손에 죽었을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검성이 남궁세가에서 환영신마를 손쉽게 제압하고 그를 농락한 것은 이미 불마사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하며 활불 말고는 검성과 누구도 대적하기 힘들겠다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그나마 호승심이 강한 황교종파의 타에 도르제가 자신이 붙어보고 싶다고 이야기는 했지만, 그 누구도 타에 도르제가 검성의 상대가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약선이 무림오절 중에 가장 약하다고 들었는데 오늘 보니 그 소문은 잘못된 소문인 듯하구나."
텐진 라흐파는 붉은 승복의 소매를 펄럭이며 자세를 잡았다.
"불마사에 종파 수장들이 제법 강하다 들었는데 잘못된 소문은 아닌 듯 하군요. 당신들의 수하들도 제법 강했으나 그다지 합공에는 익숙지 않은 거 같군요."
약선은 자신이 상대했던 다수의 월명종의 수하들을 상대한 소감을 가볍게 이야기했고, 그녀의 말에 텐진 라흐파는 다시 한 번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월명종은 불마사의 모든 종파들을 중재하고 계율을 담당하는 곳이라 큰 싸움과 합공이 익숙지 않을 수 있겠군. 사실 그런 지적 자체가 처음이라 당황스러운데…… 천하의 약선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불마사의 각 종파들은 각각 맡은 역할이 달랐는데 월명종의 역할은 대대로 불마사 전체의 종파들을 아우르고 계율을 어긴 자들을 벌하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각 종파들은 서로 경쟁을 하며 사이가 좋지 않아도 월명종의 승려들은 감찰의 역할도 맡고 있었기에 가장 경계하면서도 꺼리는 곳 중 하나였다.
막대하다면 막대한 권한을 가진 월명종이었기에 월명종의 승려들은 교육을 철저히 받았는데, 월명종이 하는 일 자체가 다수가 몰려다니는 일보다는 소수로 움직이는 일이 잦다보니 약선이 지적한 대로 다수로의 싸움에는 다들 익숙지 않았다.
수장이었던 텐진 라흐파조차 약선의 지적을 받고서야 자신의 수하들이 다수로 누군가를 합공할 때 적합하지 않을 수 있겠다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월명종의 승려들이 합공으로 누군가를 제압하거나 강자를 상대한 경험 자체가 없다는 게 문제였긴 했다.
"수하들이 쓰러질 때까지 기다린 이유는 무엇이죠? 분명 당신이 합공을 해왔다면 승산이 더 높았을 터인데?"
"나도 고민을 하긴 했지만 천하오절의 일인을 상대할 기회인데 볼썽사납게 수하들과 합공을 하는 것은 모양새가 좋지 못할 거 같더군. 나도 무공을 배운 자로서 천하에 이름을 떨치고 모두의 인정을 받은 그대와 제대로 겨루어보고 싶었다면 대답이 될까?"
텐진 라흐파는 자신이 말하면서도 조금은 웃음이 났다.
사실 자신이 이렇게 누군가를 상대로 호승심을 드러내는 일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불마사의 각 종파의 수장들은 그간 세력 다툼이니, 종파의 통일이니, 계기만 있으면 싸우고 겨룰 일이 많았지만 텐진 라흐파는 그 싸움에서 늘 물러서 있던 존재였다.
늘 전장에서 벗어나 있었던 텐진 라흐파는 실력을 보일만한 약선이 나타나자 마음 한구석에서부터 붙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끓고 있었다.
'분명 검성과 약선이 이곳에 있다는 것은 우리에게 큰 위기인데, 난 이것을 모두에게 알리기보다 약선이 괜히 나를 상대하지 않고 떠날까를 더 걱정을 했던 것인가……. 광승이라 놀림 받던 타에 도르제가 이 사실을 안다면 나를 놀리겠군…….'
텐진 라흐파는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약선과 눈을 마주쳤고, 조금 지쳐보였던 약선은 어느새 숨을 고른 듯 안정을 찾았다.
"어리석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무림인으로서 그 마음을 모르지 않으니 뭐라 말하기 뭐하네요. 그런 마음을 가진다는 것 자체가 아직 어리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당신도 이미 살만큼 산 몸이니 그렇게 말하는 것도 아닌 듯하군요."
약선은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텐진 라흐파의 말이 조금은 이해가 되면서도 치기어린 생각이라 치부했다. 한 종파의 수장으로서 가져야할 생각치곤 너무 철이 없다 여겼다.
호승심으로 인해 지금의 상황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보고조차 게을리 하고 있으니 약선은 자신의 편이었다면 최악의 인물이라 생각했다.
"그렇군. 당신은 보기보다 나이가 많지. 하지만 난 지금까지 정해진 규율에 맞춰 살아왔으니, 이 정도 일탈은 모두 조금은 이해해 줄 것이라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뭔가를 했다 한들 당신이 막았을 게 분명하니 말이야."
"……."
텐진 라흐파는 약선의 독설에도 의연하게 받아쳤다. 약선은 조금은 상대의 마음을 흔들리게끔 자존심을 건드린 것인데 의연하게 대처하는 텐진 라흐파의 모습에 보통의 인물이 아님을 인정해야했다.
"환영신마와 난 제대로 겨루지 못했는데 그와 당신들의 실력이 비슷하다고 들었어요. 이제 그와 겨룰 수 없으니 당신들과 겨루어보면 신마와 나의 격차를 가늠할 수 있겠군요."
촤르륵- 파앙-
약선이 자신의 허리춤 연대(連帶)에서 연검(軟劍)을 뽑아들자, 흐물거리며 팔랑대던 연검이 순식간에 보통의 검처럼 빳빳해졌다.
"약선이 검을 쓴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내가 검을 쓴다는 것을 아는 자들은 모두 죽었기 때문이겠죠?"
약선은 미소를 보이며 말했으나 텐진 라흐파는 그녀의 말에 같이 웃지 못했다. 약선의 말이 허언일리는 없고, 약선이 검을 쓴다는 것을 아무도 모를 정도로 소문이 나지 않았다면 그녀의 말처럼 그녀가 검을 쓰는 걸 본 상대는 모두 죽었다는 말이 일리가 있어보였다.
"긴장하는군요? 나와 겨루어보고 싶었다는 그 호승심은 어디 간 건가요? 그저 제대로 싸울 상대가 지금까지 없었을 뿐이라 검을 쓸 생각을 안 했던 것뿐이랍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대결을 길게 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 검을 뽑은 것이니 각오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약선의 눈빛이 달라지자 텐진 라흐파도 긴장을 늦추지 않고 자세를 잡았다. 약선은 말처럼 텐진 라흐파를 상대로 길게 싸움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적진 한가운데에서 수십 합을 겨루며 비무를 할 여유도 없었을 뿐더러, 곧 설응들이 떨어뜨리는 불덩이도 동이 날 테니 그전에 상대를 처리하고 떠날 생각이었다.
그렇기에 꺼내기 꺼려했던 검도 꺼내든 것이었다.
두 사람 사이 긴장감이 감도는 와중에 먼저 움직인 것은 약선이었다.
파밧-
지면을 박차고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날아든 약선은 검을 내질렀다.
촤라락-
약선의 연검은 어느새 팔랑거리며 마치 살아있는 뱀과 같이 텐진 라흐파의 요혈을 노려 찔러대었고, 텐진 라흐파는 그런 약선의 공격을 피해내며 주먹을 내질렀다.
텐진 라흐파의 주먹은 묵직하고 공기를 가를 정도로 힘이 있었다. 그의 장법은 빠르고 패도적이었다. 하지만 텐진 라흐파의 권장은 약선의 옷자락에도 닿지 못했다.
'조금만 더…… 빠르게…… 조금만 더……,'
텐진 라흐파의 권장은 아슬아슬하게 약선에게 닿지 않고 있었는데, 그 차이가 워낙 미세하여 공격하는 텐진 라흐파는 점점 조바심을 내며 공격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