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화- 무상(無相)의 경지
촤작-
이윤후는 마지막 힘을 다해 검을 내질렀다. 그리고...
“이런... 어떻게... 내가... 커헉!”
환영신마의 갑작스러운 반격에 밀려났던 이윤후가 급하게 내뻗은 검이 환영신마를 갈랐고 환영신마는 이윤후의 코앞에서 그대로 쓰러졌다.
이윤후는 믿기지 않는 듯 상월검과 쓰러진 환영신마를 번갈아 보았다.
‘마지막 출수를 한 것은... 비뢰검결의 가장 빠른 초식인 비뢰섬이었다. 하지만 내가 비뢰섬을 쓰겠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었어... 그저 빠르게 접근해오는 신마의 모습에 놀라 저항하려 내뻗은 검이었는데 자연스럽게 비뢰섬의 초식이 출수되었다.’
이윤후는 상황을 이해해보려 생각을 더듬어보고 있었다.
“무상검(無相劍)의 경지에 도달하였구나?”
“그것이 무엇입니까? 저는 그저 신마의 접근을 막아내려 급하게 검을 내질렀을 뿐이었는데... 저도 모르게 몸이 자연스럽게...”
이윤후는 검성이 다가와 말하자 약간은 혼란스러운 듯 물었다.
“당황하지 않아도 된다. 네가 수련하고 몸으로 체득한 것이 자연스럽게 행해졌을 뿐이니.”
검성은 당황하고 있는 이윤후를 위로하듯 토닥여주었다.
“검수라면 일정 수준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얻게 되는 경지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물론 누구나 너처럼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다. 너 역시 위기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온 것이겠지만 무상의 경지에 익숙해진다면 네 의지대로 펼칠 수도 있을 것이다.”
“잘 모르겠습니다. 마치 제 몸이 아닌 듯 제 의지와 상관없이 행해진 듯 하여 무섭습니다.”
“혼란스럽겠지만 마음을 다잡아라. 무상의 경지는 누구나 도달하는 경지가 아니다. 우리가 하나의 초식을 펼치기 위해 정해진 행보와 식을 행해야하지만 무상의 경지에 이르면 자연스럽게 조금 전 네가 비뢰섬을 펼쳤을 때처럼 될 수가 있다. 가벼운 검의 찌르기에 비뢰섬을 실어낼 수 있고 비뢰낙일의 초식도 실어낼 수 있을 것이다. 형(形)과 식(式)을 무시하고 가벼운 검의 휘두름 하나하나가 초식이 된다는 뜻이다.”
“......”
이윤후는 검성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되진 않았다.
“바로 이해가 되진 않을 것이다. 그것을 네게 가르치기 위해 내가 있는 것이 아니냐? 불안해하지 마라. 네가 왜 불안해하는지 알고 있다. 검에 사로잡혀 자신이 아닌 다른 무언가로 변해가는 것이 아닌가 두려운 것이겠지?”
검성의 말에 이윤후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던 일이 행해지자 마치 누군가 자신을 조종하는 듯한 착각과 함께 자신이 아닌듯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겪었던 일은 모두 내가 겪었던 일이다. 나를 믿고 나에게 의지하여라. 네가 심마(心魔)에 빠지는 일은 없을 터이니.”
검성은 이윤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검성의 말에 조금 안심한 듯 한숨을 내쉬는 이윤후의 모습이 귀여운지 검성은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겪었던 일을 제자인 이윤후가 겪어가는 모습이 그도 신기했다. 검성도 처음 무상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가 소림의 성승(聖僧)을 상대할 때였다.
검성의 나이 마흔이 넘었을 때 그는 성승의 소문을 듣고 소림으로 가 그에게 도전했고 그와 꼬박 하루가 넘는 시간 동안 겨루고도 승부를 가리지 못했다. 하지만 검성은 성승과의 싸움에서 깨달음을 얻어 무상의 경지에 진입했다.
하루가 넘는 시간을 싸워 집중력은 극도로 높아져있었지만 체력은 바닥이었고 성승의 금강복마장(金剛伏魔掌)에 대항하여 패배를 직감하고 극도의 피곤함에 내뻗은 그의 검은 성승의 금강복마장의 장력을 갈라 파훼시키고 성승의 가슴에 혈흔을 남겼다.
이윤후와 마찬가지로 처음 무상의 경지에 도달해 그가 휘두른 검에 실린 무공은 비뢰검결의 오의 무극섬뢰(無極閃雷)였고 별다른 준비자세 없이 비뢰검결의 오의를 자신도 모르게 펼친 검성은 성승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기쁨보다 심한 자괴감이 먼저 들었다.
이윤후와 마찬가지로 심마에 빠져 자신이 아닌듯한 착각에 빠져 스스로를 자학했고 그런 그를 건져내준 것은 바로 성승이었다. 성승은 이윤후처럼 혼란에 빠져있던 검성을 상처 입은 몸이었지만 직접 챙겨 심마에 빠지는 것을 방지해주었다.
검성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보였다. 스승이 없이 홀로 무공을 배웠던 검성이었기에 성승이 아니었다면 그 당시 심마에 빠져 검성은 검귀의 길에 빠졌을지 모를 일이었다.
검성이 소림의 일에 발 벗고 나서는 이유도 바로 성승에 대한 고마움 때문이었다.
검성은 바닥에 쓰러진 환영신마에게 눈길이 간 듯 그에게 다가가 엎드려 쓰러진 그를 뒤집어 하늘을 향하게 하였다.
“단중(膻中)과 명성(明星), 수월(水月) 그리고 기해(氣海)까지 모두 급소를 찔렀구나.”
검성은 환영신마의 몸에 새겨진 가슴 아래부터 일직선으로 급소에 찔린 상처 위치를 확인했다. 모두 치명적인 급소였고 이윤후가 가볍게 내지른 검은 무려 네 곳의 급소를 정확히 찔러 환영신마를 절명에 이르게 했다.
‘의도 한 것이라기 보단 이것도 자연스럽게 행해진 것이겠지. 애령에게 힘을 아끼기 위해 인체의 급소를 우선적으로 노려 상대를 제압하는 법을 그녀에게 배웠으니...’
이윤후가 약선의 수련동에서 수련을 하는 동안 검성은 이미 이전에 만상오행공과 비뢰검결을 모두 가르쳐주었기에 중간중간 수련과정을 확인하고 바로 잡아주는데 그쳤지만 실제로 그 기간동안 이윤후를 보다 많이 가르쳐준 것은 약선이었다.
자신의 과오로 인해 검성을 영원히 보지 못할 뻔했던 것을 이윤후 덕에 다시 만날 수 있었기에 약선은 이윤후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고 현재 이윤후가 괴물 같은 성장세를 보이는 데는 약선의 영향이 컸다.
약선이 가장 심취했던 것이 연단술(鍊丹術)이었는데 이윤후는 수련하는 동안 약선이 만든 영단들을 복용하였고 그녀가 직접 단약이 이윤후의 체내에 제대로 흡수될 수 있도록 도움까지 줬기에 이윤후가 단기간에 내공을 쌓고 실력이 급증할 수 있었다.
거기에 약선은 이윤후가 무림에서 지켜야할 많은 것들과 인체의 급소, 혈도에 관한 의학적인 모든 것을 가르친 장본인이기도 했다.
‘비뢰섬은 말 그대로 한줄기의 섬광과 같은 쾌속의 베기인데 이렇게 연속 찌르기로 응용을 하다니 초식의 응용을 가르친 것이 고작 얼마 전인데 무의식 속에 이렇게 행하다니 역시 배움이 빠르구나.’
검성은 불과 얼마 전 만독곡에서 공마위를 상대로 보여주었던 초식의 응용을 벌써 사용하는 이윤후의 천재성에 진심으로 놀라고 있었다.
자신이 마흔이 넘어서 진입했던 무상의 영역을 스물이 갓 넘은 이윤후가 들어섰고 이윤후의 빠른 성취가 검성은 놀라우면서도 기뻤다.
검성은 자신의 죽음을 죽는 순간까지 믿지 못하고 눈을 부릅뜬 채 죽은 환영신마의 눈을 감겨주었다. 무림에 악명이 높은 노마두의 죽음치고는 보잘 것 없었지만 자신의 제자의 성장에 밑거름이 되어주었으니 환영신마에 대한 원한은 없었다.
“신마가 너에게 여유를 주지 않았다면 대결의 양상은 달랐을 것이다.”
“알고 있습니다. 그는 대결 도중 계속 주저하는 것이 보였고 아마 저를 죽일지 말지에 대한 고민이라 생각했습니다.”
돌아서 자신을 바라보는 검성의 말에 이윤후는 정신을 차리고 답했다. 이윤후도 계속 환영신마가 무언가를 주저하는 것이 대결 내내 보였기에 신경 쓰고 있었다.
“그래. 아마 그는 너를 죽인다면 자신이 여기서 살아 도망가기 힘들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겠지. 처음엔 너를 그냥 괴롭히고 놀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에 대한 화풀이로 말이야.”
“......”
“하지만 그는 네가 이 대결 도중 자신의 공격에 적응하고 그것을 극복하고 뛰어넘을지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 그래서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틀어졌던 거고 말이야.”
“온전히 제 실력으로 이긴 것은 아니란 말씀이군요.”
이윤후는 검성이 이와 같은 지적을 하는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처음 이윤후가 환영신마의 환영신보를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을 때 환영신마가 필살의 수를 썼다면 지금 차가운 바닥에 누워있는 것은 자신일지 몰랐다.
“더욱 정진(精進)하겠습니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 이미 넌 충분히 강해. 환영신마가 나의 눈치를 보고 너를 농락하려했던 것은 그의 오만한 행동이었고 넌 그것을 충분히 갚아주었다. 내가 너에게 말하는 것은 환영신마와 같이 행동하지 말라는 것이지. 너에게 실력으로 이기지 못했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제가 어리석었습니다. 사부님의 말씀 가슴에 새기겠습니다.”
이윤후는 검성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며 고개를 숙였다. 자신이 제법 잘 싸워내었고 환영신마라는 노마두를 잡아냈음에도 검성이 칭찬해주지 않자 조금은 서운하여 말이 조금 사납게 나갔는데 그것이 너무 부끄러운 결과를 맞이하게 되었다.
“아니다. 아직 어린 너에게 내가 너무 많은 시련을 안겨주는 것이 아닌가 싶구나.”
“아닙니다. 사부님께서 저를 얼마나 위해주시는지 잘 압니다.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래. 일단 이곳을 정리하고 돌아가자. 애령이 기다리고 있겠어. 너희들 도착했으면 나오너라.”
파밧-
검성은 이윤후의 어깨를 토닥여주곤 뒤 돌아 말했고 그 말과 동시에 흑의 복면인들이 나타나 부복했다.
“검성을 뵙습니다.”
그들은 비천의 은위단이었고 이윤후와 환영신마의 대결로 인해 일대가 시끄러워지면서 은위단이 조사를 위해 와있었고 검성은 그것을 알아채고 있었다.
“불마사에서 이곳의 소란을 눈치 채고 파악을 위해 사람을 보내었는데 그들은 저희가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무림맹에서도 사람을 보내었는데 그들은 저희가 제압하여 안전한 곳에 옮겨두었습니다.”
은위단은 가장 먼저 이곳에 도착해 검성과 이윤후를 발견하고 주위 경계를 했고 자신들 외에도 이곳의 소란을 눈치 채고 올 것이라 생각했기에 그것에 대한 대비를 했던 것이었다.
“잘하였다. 환영신마의 시신을 종남파로 옮겨주겠느냐?”
“그냥 종남파로 보내면 됩니까?”
“그래. 그래주면 그 다음은 내가 알아서하마.”
“알겠습니다. 저희가 시신을 수습하여 데려가겠습니다.”
은위단의 대장으로 보이는 자는 검성의 말에 영문을 몰랐으나 일단 명을 따랐다. 보통 검성이 자신들을 찾는 것은 사태의 정리와 시신의 처리였는데 검성이 시신을 따로 챙겨 보내달라는 말은 처음이었기에 조금은 당황했다.
“윤후야. 우린 종남파로 얼른 돌아가자. 애령이 우리를 찾아 나서기 전에 말이다.”
“네. 안 그래도 약선께서 도착하자마자 찾으셨습니다. 아마 도존의 이야기 때문인 듯 했습니다.”
“그래? 얼른 가봐야겠구나.”
이윤후의 말에 검성의 눈빛이 달라지며 말했고 그 모습에 이윤후는 미소를 지었다. 검성이 얼마나 도존의 상태가 정상이 되길 바라는지 잘 알고 있었기에 나올 수 있는 웃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