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검성의 제안(2)
“약조할게요. 그대의 도움으로 해독약을 만드는데 성공한다면 모든 공은 팽가에 돌리도록 할게요.”
“감사…… 감사합니다……. 팽가의 죄인이 되었지만 그것만 가능하다면…… 조금 마음…… 가볍게 눈을 감을 수…… 있을 듯합니다.”
팽우산은 다시 한 번 약선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저런 성격이니 생전에도 팽가에서 그렇게 농락당한 것이겠지……’
서문환은 차마 입 밖으로는 내지 못한 채 속으로 생각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가 보기엔 독 덩어리나 다름없는 팽우산을 세가 내에 둔다는 것은 사실 꺼림칙했으나, 자신이 반대하면 약선이 또 세가를 떠나 다른 곳에 가서 할 것이 분명하니 차라리 자신의 곁에서 돕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허락한 일이었다.
“나는 없는 사람 취급인건가?”
“당신이 겉돈 게 아니고요? 안쪽에 거처가 마련되어 있으니 일단 이동을 하죠. 이곳은 사람들이 다니는 입구라 오래 있어 좋을 것이 없는 듯하니까요.”
검성의 말에 약선은 미소 지으며 그에게 핀잔주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자 그녀는 이곳에서 떠나야겠다 생각했다.
“그러시죠. 모두 안으로 들여야 이곳도 잠시 사람의 출입을 막고 할 테니까요.”
약선의 말에 서문환도 거들었다. 외부라 팽우산의 체독에 오염될 일은 없었으나, 그래도 철저히 방비하는 것이 좋다 여겨 정문을 오전 내내 막고 출입을 통제할 생각이었다.
서문환의 말에 약선이 앞장섰고, 모두 그녀를 따라 세가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서문환은 세가의 수하들에게 무언가를 지시한 후 그들을 따라나섰다.
***
취옥당(翠玉堂).
서문세가에서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한 곳으로 대대로 서문세가의 대부인이 묵어왔던 곳이었지만, 현재는 서문환이 따로 꾸며 약선의 거처로 쓰게 하였다. 애초에 서문환의 어머니와 부인 모두 사별한 상황이었고 현재 서문세가의 여자 중 가장 어른은 약선 서문애령이 맞기도 했다.
“애령이 하는 일에 도움이 되겠소?”
검성은 약선이 팽우산의 몸을 살피고 자신을 보자 물었다. 약선은 팽우산의 몸에서 흐르는 독혈을 채취해 작은 병에 담았다.
“네. 당신의 예상대로 도존을 중독 시켰던 독은 독강시들의 몸에서 채취한 독혈을 정제한 것이 맞는 듯해요. 해독약을 만들려면 성분을 모두 알아야하는데 이것으로 해독약을 만드는데 수월할 듯싶어요.”
“다행이군.”
“그런데 당신은 어떻게 독강시의 독혈이 도존을 중독 시킨 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 생각한 거죠?”
“말로 설명하긴 힘든데…… 직감이라고 할까? 설명하기가 어렵군. 당신이 사혈치료를 하면서 독에 중독된 피를 빼내면서 보았던 독혈과 독강시들이 흘리는 독혈이 비슷해 보이기도 했고 말이야.”
검성은 독강시를 처음 보았을 때부터 독강시의 독혈이 도존을 중독 시킨 독의 원액임을 알아보았다. 도존을 중독 시킨 독이 시독의 일종이라는 것을 듣기도 했고, 그의 말처럼 도존이 쏟아내었던 피와 독강시들의 독혈이 같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보자마자 확신이 들었다는 데 있었다. 최근 검성의 감각은 더욱 날카로워져있었다. 기척을 느끼는 일과 반경 안의 모든 생물의 흐름 호흡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그의 통찰력과 감각은 검성 자신도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날카로워졌다.
“당신은 점점 인외의 존재가 되어가는 것 같네요. 과거 선인의 길을 갔다고 알려진 혜운진인도 통찰력은 물론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미래를 볼 정도였다고 하는데 당신도 그런 경지로 가는 듯하네요.”
약선은 말을 하면서도 괜히 검성이 갑자기 어디론가 떠나지 않을까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무림의 역사를 보더라도 선인의 경지에 근접했다던 인물들은 무림에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고 선계(仙界)로 들었다는 세인들의 추측만이 있을 뿐이었다.
검성이 점점 인간의 규격을 넘어서고 있음을 느끼는 약선은 검성이 또 다시 이전처럼 사라질까 두려웠다.
‘이 사람이 윤후와 도존과의 대결에 미련을 가지는 이상은 괜찮겠지……. 하지만 윤후의 성장과 도존의 대결이 마치고 나면 속세의 미련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닐까?’
약선은 별의별 생각이 들어 머리가 복잡했고 이내 생각을 털어버리고 검성을 보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건가요?”
“어떻게라니?”
“만독곡의 싸움은 당신이 초검보에서 독강시를 모두 죽임으로써 끝이 난 듯싶어요. 만독곡도 더 이상 무림으로 나오지 않고 있고요.”
“그런가? 그건 무림맹과 이야기를 좀 해봐야 될 듯한데……. 무림맹에 내가 만독곡을 맡아주겠다고 한 이상 만독곡을 그냥 둘 수는 없지. 그리고…… 만독곡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몰라도 초검보에 아이들을 납치해 두었더군.”
“아이들이요? 운남성 일대에 아이들의 실종이 잦아 황실에서도 몇 번을 운남성 조사를 보냈다고 알고 있어요. 이전에 만독곡에서 동남동녀의 피로 독인을 만든다는 괴소문도 있고 해서……”
“그래서 만독곡이 더는 나오지 않더라도…… 그냥 둘 순 없을 거 같아. 이번 기회에 모두 제거를 해야지. 독강시도 남아있고, 무엇보다 직접 그들에게 독에 대해 묻는 것도 빠를 거 같고 말이야.”
검성이 아이들의 이야기를 하며 미간을 찌푸렸기에 약선은 그가 적지 않게 분노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렇군요. 다른 사패와 달리 만독곡은 그 위험성이 좀 특별하긴 하죠. 이번 기회에 소탕할 수 있다면 좋긴 할 거예요.”
“그럴 거야. 위치를 아는 사람도 여기 있지 않나?”
검성은 말을 하곤 한쪽에 누워있던 팽우산을 보았고 자신에게 시선이 모이자 팽우산도 슬며시 일어났다.
“위치는…… 제가 약도를…… 그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무림에 원한이 있다…… 생각해서 인지…… 그들이 저에게…… 많은 것을 알려주었기에…… 위치도 정확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독곡으로 들어가는…… 초입에 운무(雲霧)가 가득하고 기암괴석으로…… 이루어진 절진이 있어…… 진을 깨기 전엔…… 들어가기 힘들 것입니다.”
팽우산은 처음부터 인지 능력이 있었기에 만독곡의 인물들도 경계를 했으나, 그들도 팽우산이 무림에 원한이 있는 것을 아는지라 나중에 그 경계심을 풀고 팽우산의 복수를 돕겠다며 대신 자신들의 일을 도와달라고 했었다.
팽우산도 그 당시에는 복수만을 생각했기에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들이 원하는 몇 가지의 일을 처리해주기도 했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팽우산에 대한 신뢰가 있었고 그들의 신뢰를 얻고 난 후 팽우산은 조금의 자유를 얻어 탈출해 팽가로 향한 것이었다.
“그럼 당신은 다시 형산파로 가시는건가요? 윤후와?”
“그래야지. 해주겠다 한 일이니 확실하게 처리를 해주어야겠지.”
“오랜만에 오셔서 다 같이 식사도 하지 않고 가실 생각은 아니죠? 환이도 당신에게 퉁명스럽긴 해도 당신이 오랜만에 온단 소식에 많은 것을 준비했어요.”
“음…… 그럼 식사는 하고 가던지 할까?”
검성은 약선의 말에 난감한 듯 등 뒤의 이윤후를 보았다.
“네. 그게 좋겠습니다. 어차피 저희가 지금 출발해도 결국 식사는 해야 하고 저희들은 또 백아를 타고 가면 되니까요.”
이윤후의 말에 약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검성이 당연히 하루는 머물 것이라 생각했던 그녀는 오랜만에 검성과 많은 이야기를 나눌 것이라 기대했기에 바로 떠난다는 검성의 말에 실망했었으나 그저 밥 한 끼 같이 먹는 것에 다시 기뻐하고 있었다.
검성은 약선이 서문환의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그냥 떠나려했지만 그의 이야기에 쉽게 떠날 수가 없었다. 기명현을 통해 의검단에 계속 자금을 대어주었던 것이 서문환임을 들었기 때문이다. 기명현도 처음엔 검성에게 신세진 사람이라며 의검단에 많은 자금을 대어준 인물에 대해 그저 의심 없이 돈을 받았다. 그러나 나중에는 혹여나 돈을 받은 것이 검성에게 누가 될까 염려하여 돈의 출처를 알아보았고 그것이 서문세가의 서문환임을 알고 안심했었다.
기명현에게 그 이야기를 듣고 검성은 서문환에게 감사함을 느끼던 차였다. 그의 지원이 아니었다면 의검단의 존속은 힘들었을 게 분명했다.
***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떠나려 했다는 것이 사실입니까?”
서문환은 식사 자리에 도착한 검성을 보자 으르렁거리며 말했고, 그런 모습에 검성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날 보기 싫어하지 않느냐? 그래서 볼 일을 마치고 바로 떠나려 했지.”
“그거야…… 흠…….”
검성의 말에 서문환은 말문이 턱 막혔다. 실제로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늘 그렇게 말하고 다녔고, 검성이 도착했을 때 역시 남들이 보기엔 검성을 반기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었다.
“그래도 누님이 형님을 얼마나 기다리셨는데 오자마자 그냥 가십니까? 누님을 위해서라면 제가 싫은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
서문환은 약선을 핑계로 대며 말했지만 그게 본심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검성과 약선 모두 크게 웃었다. 그들의 웃음에 서문환은 얼굴이 벌게졌다.
“식사하시죠. 누님께서 검성이 좋아했다던 음식을 많이 준비하셨습니다. 윤후야 너도 많이 들 거라.”
서문환은 어느새 이윤후에게 말을 놓으며 살뜰히 챙기고 있었다. 검성과 만났을 때 검성이 아끼는 이윤후의 짝을 서문세가의 여식으로 주겠다고 말했던 바도 있었고, 직접 본 이윤후의 태도나 품성이 서문환의 마음에 들었기에 진심으로 이윤후를 서문세가의 사람으로 받아들일 욕심도 생긴 상태였다.
“먹고 있습니다. 서문세가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누님께서 너에 대해 많이 이야기해주셨다. 누님에게도 넌 제자와 같으니 서문세가에도 특별한 손님이지. 일이 마무리된다면 꼭 나중에 다시 한 번 찾아오너라.”
“네. 만독곡의 일이 마무리되면 다시 와야 할 듯하니 곧 다시 찾을 듯합니다.”
검성과 이윤후는 만독곡의 일을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가는 것이기에 어차피 그쪽 일이 마무리된다면 다시 서문세가로 와야 했다. 도존이 중독된 절독에 대한 조사 결과와 얻은 정보에 대해 알려야 하니 말이다.
“잘 되었구나. 금세 다시 볼 일이 있겠어.”
서문환이 웃자 약선은 그런 동생이 낯선 지 한참 그를 보고 있었다. 서문세가의 수장으로 세가의 사람들에겐 살가웠으나 외부인들에게는 말도 잘 걸지 않는 그였기에, 이윤후에게 저렇게 먼저 말을 걸고 하는 모습은 낯설기 그지없었다.
서문환이 이윤후와 웃고 떠드는 사이 검성과 약선은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가영의 소식 들은 것이 있나?”
“궁금은 한가 보죠? 저와 계속 연락은 하고 있어요. 당신이 홍라염도를 돌려주었다면서요.”
“그래. 어차피 내가 가지고 있을 물건은 아니니까. 그렇다고 소려의 무덤에 같이 묻어줄 수도 없고 말이야.”
“잘했어요. 애초에 초 오라버니…… 아니 신투처럼 무기에 욕심을 내서 그런 일을 저질렀던 것은 아니니까요.”
약선은 도후가 그런 일을 벌였던 이유를 듣고 조금은 감정이입을 하였기에 그녀에 대한 연민이 좀 있었다. 그 당시 나라를 장악한 몽고인에 대한 분노는 누구나 가지고 있었고, 자신이 사랑하는 검성이 그런 몽고 여인에게 빠져있음을 알았다면 자신도 참지 못했을 거 같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