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이혈세혈(以血洗血)(1)
"우산, 정말로 네가 이곳에 왔구나?"
팽우산이 자신을 부르는 익숙한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팽가의 가주인 팽태성이 있었다. 팽태성을 본 팽우산의 표정이 일그러졌고 전신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와 지켜보던 모두가 압박을 느낄 정도였다.
"감히 네가 나의…… 이름을 그렇게…… 정겹게 부르다니……."
팽우산은 어이가 없다는 듯 말했다.
팽태성. 그는 팽가의 직손으로 어릴 적부터 팽가의 차기 가주로 언급되던 인물이었다. 실력이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지만 사람들과 친화력이 좋아 주위에 사람이 끊이질 않았고, 베풀기를 좋아해 어려운 사람을 돕다 보니 하북성 내에서도 평판이 아주 좋았다.
그런 팽태성은 분가에서 뛰어난 실력을 가졌다는 팽우산이 사람들로부터 차별을 당하자 그를 보듬어왔고 그를 일부러 데리고 다니며 본가에서 머물도록 해주었다.
그런 팽태성의 배려에 감사하여 팽우산은 팽태성을 아주 잘 따랐고 팽우산이 본가의 무공인 오호단문도(五虎斷門刀)와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을 견식 할 수 있었던 것도 팽태성 덕분이었다.
팽우산은 그런 팽태성의 배려에 늘 감사하고 그를 위해 강해져 그를 모시겠다고 다짐했지만 실상 팽태성의 마음은 달랐다. 그저 불쌍한 팽우산을 보듬음으로써 세가의 평판을 유리하게 하기 위함이었고 팽우산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어 수족으로 삼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팽우산의 재능은 팽태성의 생각을 넘어섰다. 팽우산은 팽태성 자신이 벽으로만 느꼈던 오호단문도와 벽력혼원도법등 세가의 절기를 눈동냥 한 것만으로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버렸고, 그것을 안 팽태성은 팽우산에게 열등감과 동시에 참지 못할 분노에 휩싸였다.
자신의 평가를 위해 이용하려했던 팽우산이 자신으로 인해 세가의 인정을 받고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자 팽태성은 심한 질투심에 빠져 그를 제거하려 일을 꾸몄다. 팽태성은 분가에 대한 인식이 좋지 않고 팽우산을 탐탁치 않아하던 장로에게 팽우산이 본가의 무공을 훔쳐 배웠음을 일러바쳤다.
장로는 모든 사실을 듣고 팽우산을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수련 비무를 하게 했고, 거기서 장로는 팽우산의 무공을 폐하려했다. 비무 도중 자신을 죽이려한다는 사실을 안 팽우산은 감춰두었던 혼원벽력도법을 사용하였고 예상치 못한 한수에 장로는 크게 다치게 되었다.
팽태성과 장로가 보는 눈이 적은 상황에서 팽우산을 처리하려 한 덕분에 팽우산은 팽가를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었고, 떳떳하지 못했던 팽태성과 장로 역시 바로 팽우산을 쫓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두 사람은 말을 맞춰 팽우산이 본가의 무공을 훔쳤고 그것으로 장로를 다치게 한 후 도주했다 보고했다.
그로 인해 팽우산은 팽가의 죄인이 되어 도망자 신세가 되었고 죽기 직전까지 도망을 다닐 수밖에 없었다. 팽우산은 처음엔 팽태성이 모든 일을 꾸민 것을 몰랐으나 죽기 직전 팽가의 척살조의 인물들이 말해주어 알게 된 사실에 크게 절망했다.
팽우산은 자신이 도주하자 팽태성이 분가에 남아있던 그의 가족들을 모두 죽이거나 노예로 전락시켰다는 사실을 듣고 피 눈물을 흘리며 죽었다.
"너와…… 그날 나의 죽음, 그리고 분가에 남아있던…… 나의 가족들의 ……죽음과 관련 있는…… 모두는 이곳에서…… 죽을 것이다."
팽우산이 녹색 안광을 번뜩이며 독혈이 흐르고 있는 얼굴로 말하자 지켜보던 모두가 공포에 빠졌고, 안 그래도 팽우산이 발산해내는 기운에 제대로 서있지도 못하던 자들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우산.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듯 하군. 난 자네가 그렇게 팽가를 떠나고 너희 가족을 돌봐주었던 사람이야. 비록 너희 가족이 나중에 다른 잘못이 밝혀져 벌을 받기는 했지만……."
"닥쳐라! 네놈이…… 아직도 나를 ……그때의 순진한…… 바보로 아는 ……것인가? 모두 네놈이…… 꾸미고 농락한 것을…… 모를 줄 알았더냐?"
팽태성의 말에 팽우산은 대노하여 소리쳤다.
"순진했던 시절…… 나는 너의 호의를…… 순수하게 믿었고…… 너를 위해…… 너의 무기가 되어…… 살려했었다……. 하지만 너의 호의는 그저…… 자신을 돋보이기 위한…… 위선이었고…… 지금도 그런 위선으로 모두를…… 속이고 살고 있겠지."
팽우산의 말에 팽태성은 크게 당황했다. 이미 팽우산의 일이 알려지면서 많은 팽가의 사람들이 팽태성을 의심하고 있었고, 팽우산의 말 한마디는 모두에게 그런 의심에 확신을 주고 있었다.
"경고하마…… 덤빈다면……. 모두 죽을 것이다. 내가 목을 취할 자들은…… 내가 원한이 있는 자들…… 너희 전부의 목을…… 원하는 것이 아니다……."
팽우산의 말에 팽가의 무인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기 시작했다. 팽가의 무인들도 무공을 배운 이상 팽우산이 자신들의 상대가 아님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팽우산과 팽가의 일도 모두 아는 상태라 더욱 그들은 마음속 동요가 일었다.
본가와 분가 사이의 알력은 어느 세가나 존재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렇듯 본가에서 분가의 인물을 뛰어나다는 이유로 핍박하고 척살령까지 내린 일은 팽가의 무인들로서는 인정하기 싫은 사실이었다.
모두의 동요로 인해 잠시 적막이 흐를 즈음 팽우산이 먼저 움직였다.
"커헉!"
팽우산의 낡은 도가 누군가의 목을 쳤다.
팽우산이 누구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빠르기로 이동하여 한순간에 베었다. 쓰러진 이는 팽자성으로 팽우산이 조금 전 가장 먼저 이름을 부른 자였다.
"팽자성, 너는 내가…… 숨어 지내던 마을을…… 불태우겠다 협박을 했었지. 그리고……."
파밧-
"크헉!"
"크학!"
팽우산의 신형이 또 다시 어디론가 빠르게 움직이며 도를 휘두르자 이번엔 두 사람이 동시에 쓰러졌다.
"팽임기, 팽윤 너희는 나의 아내를…… 내 앞에서 유린하였지……."
쓰윽-
팽우산은 낡고 이가 빠진 대도에 흐르는 피를 닦아내었다. 그런 팽우산의 행동에 이름이 불렸던 남은 자들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자의 말이 사실입니까? 팽가의 무인이 남편이 있는 여인을 범하고 죽였다니 그리고 죄가 없는 마을을 불태우다니요? 거짓이지요? 형님."
팽태성에게 달려가 따지는 이가 있었고, 팽우산은 그런 그를 보았다. 팽태성에게 따지는 팽가의 거한은 바로 팽기찬이었다. 남궁세가에 파견을 나갔던 그는 남궁세가의 일이 끝나고 본가로 돌아와 있는 상태였다.
"너는 팽가를 해하러 온 저자의 말을 믿는 것이냐? 저자는 팽가를 음해하여 우리를 분란에 빠뜨리려는 것이다. 정신 차리거라!"
팽기찬은 팽태성의 불호령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지만 팽우산의 내막을 아는 그로서는 팽태성의 말보다는 팽우산의 말이 더 신뢰가 갔다. 그리고 팽가에서도 늘 말이 나왔던 실력보다 요직에 자리 잡은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모두 팽우산이 부른 그들이었다.
팽기찬은 그것이 우연이라고 느껴지지 않았다. 팽태성이 후계싸움에서 유리함을 선점했던 그 당시 과정도 지금에서 생각하면 의심스러웠다. 팽태성이 장손으로 가장 후계 자리에 근접했던 것은 사실이나 팽가의 가주는 가장 강한 자가 서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렇기에 점차 뒤처지던 팽태성보다 차남이었던 팽준이 더 유력했었다. 어릴 때는 팽태성이 뛰어남을 보였지만 점차 팽준의 무공 실력이 팽태성을 앞질렀고, 팽준이 오호단문도를 극성으로 익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팽준이 다들 후계자가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팽준은 불의의 사고로 불구가 되었고,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팽태성이 가문의 후계자가 되어 현재 가주의 자리까지 올랐다. 당시 팽준의 사고에 대한 의심은 있었지만 결국 무마되었고 모두에게 잊혀졌다. 그러나 지금 와서는 그것마저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었다.
팽우산이 이름을 불렀던 모두를 죽일 동안에도 팽태성을 지키기 위해 모였던 팽가의 무인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네놈들 도대체 무얼 하는 것이냐? 감히 가주의 명을 거역하고 가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저자의 말에 흔들리는 것인가?"
팽태성은 분노하여 모두를 향해 불호령을 내렸지만 누구하나 그의 명령에 반응하지 않았다. 그때, 결국 팽기찬이 참지 못하고 팽태성에게 다가서는 팽우산을 막아섰다. 그러자 남은 팽가의 무인들 전원이 팽기찬의 행동에 따라 팽태성을 보호하는 모양새를 취했다.
팽기찬은 팽우산이 차마 팽가의 가주인 팽태성을 죽이는 것까지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이것은 팽가 전체 명예의 문제이기도 했다.
"물러나 주시오. 이미 죽인 자들로 원한을 푸시고 물러서 주십시오."
팽기찬은 팽우산을 향해 예를 취하며 최대한 조심스럽게 말했다.
"나의 복수는…… 팽태성 저자를…… 죽여야 끝이 난다. 물러서라…… 너희까지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모두 죽인다고 당신의 복수가 완성되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의 이야기가 거짓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주…… 아니 팽태성의 죄가…… 정말로 사실이라면 팽가에서 낱낱이 조사하여 그를 조사할 것이니 물러나 주십시오."
"네 이놈! 감히 누가 누구를 조사한다는 말이냐. 세가의 죄인의 말을 믿고 가주인 나를 의심하다니, 네놈들이 살성 싶으냐?"
팽기찬의 이야기에 팽태성은 극대노를 하며 소리쳤지만 팽태성의 그런 이야기에도 누구하나 반응하고 있지 않았다. 팽가의 무인들은 이미 팽태성의 죄를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팽기찬이 이렇게 나설 수 있었다.
"물러……나거라."
츠츠츠-
팽우산은 자신의 마음에 호응해 주는 팽가의 무인들이 기특하기도 했지만, 저런 허울뿐인 말만 믿고 물러갈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팽기찬을 비롯한 이들의 마음이 진심이더라도 결국 세가는 늙은 장로들과 실권자들의 힘으로 돌아갈 것이고, 팽기찬의 뜻대로 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팽우산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팽태성을 향해 걸었고, 그에게 발산되는 기운에 팽가의 무인들은 조금씩 물러나며 팽태성으로 가는 길을 열어주고 있었다. 팽기찬 역시 끝까지 막아서지 못한 채 물러서야 했다.
"팽가는…… 이미 안에서…… 부터 썩어버렸다. 그것은 ……저자가 가주가…… 되었다는 것…… 만 보아도 알 수 있지……. 너희가 저자의…… 죄를 밝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그는 저런 실력으로…… 가주의 자리에 오른 자……. 장로들과 실권자들…… 도 한통속 이란 이야기지……."
스슥-
팽우산은 팽태성에게 다가가며 낡은 대도를 쳐들었다.
"팽태성…… 너를 죽이고…… 팽가를 다시…… 이전으로 돌려…… 놓을 것이다."
파밧-
팽우산이 지면을 박차고 단숨에 팽태성에게 달려들었고, 내기가 실린 그의 도는 단숨에 팽태성을 양단할 듯 내리쳐졌다. 하지만 그의 도가 팽태성을 가르기 직전 누군가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 막았다.
쩌정-
빠각-
팽태성 앞을 막은 노인은 자신의 도로 팽우산의 도를 향해 올려치며 그의 낡은 대도를 부셔버렸고, 그 충격으로 팽우산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이거…… 오랜만에 보는…… 반가운 얼굴…… 아직 살아있었나…… 팽반우……."
자신을 막아선 노인을 알아본 팽우산은 반가움과 분노로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