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묵령(墨靈)(1)
“우린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요?”
남궁나연은 무림맹에 대한 이야기를 머리속에서 털어버리고 이윤후를 지긋이 바라보고는 말했다.
이윤후에 대한 호기심은 호감으로 바뀌었고 그가 남궁세가에 머무는 동안 그런 마음은 커져갔다. 그러나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그런 마음을 최대한 내색치 않으려고 했지만 갑자기 떠나게 된 이윤후에게 자신의 마음을 알리고 이윤후의 마음도 알고 싶은 남궁나연이었다.
“아직 스승님이 어떻게 움직이실지 이야기를 해주시지 않아서 언제 다시 보게 될 것이라 확언을 드리긴 힘들 듯 하네요.”
현재 무림맹은 불마사와 만독곡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언제 벌어질지 모르는 싸움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검성은 그에 대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남궁세가의 일이 마무리되고 천통자는 몇 번이나 검성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검성은 거절했고 천통자만 몸이 달아올라 있었다.
천통자가 이윤후를 붙잡고도 검성에게 이야기를 해달라고 설득했었지만 이윤후는 검성이 결국 움직일 것이란 것을 알았기에 따로 말은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군요...”
남궁나연은 이윤후와의 이별이 아쉬웠지만 현재 남궁세가의 상황과 무림의 상황에서 사랑 놀음이나 할 여유는 없었기에 이내 생각을 털어버렸다.
“다음에 만났을 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다음이요?”
“네. 다음이요. 모든 일이 마무리되고 남궁세가를 다시 찾아 준다고 약속해 주실 수 있나요?”
남궁나연의 간절함이 느껴지는 말에 이윤후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약속했어요?”
“네.”
뛸 듯이 기뻐하며 얼굴이 밝아진 남궁나연을 보자 이윤후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미 남궁나연의 마음을 눈치 채고 있었던 이윤후였기에 남궁나연이 어떠한 의미로 남궁세가에 들러달라고 하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내 마음을 정리 해야겠지.’
이윤후도 남궁나연에게 호감이 있었고 그것 또한 남궁나연이 눈치 챘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윤후가 마음에 품은 여인은 한 명 더 있었기에 이윤후는 그것이 불편했다.
밝은 달빛 아래 두 남녀는 서로의 마음을 가슴에 묻어둔 채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
“커헉...”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남궁세가의 뇌옥을 지키던 무사 둘이 쓰러졌고 검은 인영이 뇌옥 안으로 들어섰다.
‘빠르게 마무리 한다.’
뇌옥 안으로 들어선 검은 인영은 바로 불마사의 지존 사마령의 호위인 묵령이었고 그는 사마령의 밀명을 받아 온 것이었다.
“누구냐?”
묵령이 뇌옥의 지하로 내려서자 내부 순찰 중이었던 남궁세가의 무사가 그를 발견하고 검을 뽑아 달려들었다.
파바밧-
“끄억...”
묵령이 검을 찔러온 상대에게 파고들어 목과 가슴을 타격하자 무사는 그대로 혼절하며 꼬꾸라졌다.
늦은 시간이라 뇌옥 안에 죄수들이 모두 잠들어있었으나 소란스러운 상황에 깨어난 이들이 생겼고 상황을 파악하곤 모두 묵령이 어떠한 의도로 이곳에 왔는지 파악하며 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뇌옥 안의 인물들 모두 남궁세가 내의 규율을 어긴 자들 특히 중범죄를 저지르고 하옥된 자들이 많았다. 살인이나 강간 도박 등 남궁세가의 일원으로 하지 말아야 될 것들은 저지른 자들이 많았기에 혹여나 자신에게 원한이 있는 자가 자신들을 죽이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은 아닌지 의심하여 선뜻 자신을 풀어 달라 말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보시오. 나를 좀 풀어주시오.”
심한 매질을 당한 듯 해보이는 한 중년인이 묵령을 향해 용기 내어 말했다. 그는 남궁조현으로 남궁세가의 방계의 인물이나 무공이 뛰어나 본가의 부름을 받아 이곳에 머물고 있었다.
하지만 천성이 편협했던 그는 본가에 불려온 후 도박과 여자에 빠졌고 자신의 동료의 아내를 겁탈하려다 붙잡혀 심한 매질을 당하고 이곳에 몇 달째 갇혀있었다.
남궁조현은 묵령이 자신을 죽이러 온 살수가 아니란 것을 알아보곤 용기를 내었으나 묵령은 그를 무시하고 뇌옥의 깊숙한 곳으로 걸어갔다.
“나를 풀어주지 않고 간다면 소리를 칠 것... 컥...”
남궁조현은 자신을 무시한 채 가는 묵령을 보고는 소리를 지르려했으나 말을 마치지도 못한 채 그의 목에 단검이 박혀 단발마의 비명성과 함께 그대로 쓰러졌다.
그 모습에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있던 자들도 조용해졌고 묵령은 다시 걸음을 옮겨 뇌옥 안을 살피며 자신이 찾고 있던 자를 찾기 시작했다.
뇌옥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묵령은 자신이 찾고 있던 자를 찾았고 그는 바로 사왕련의 련주였던 독고진이었다.
“너는 신마를 구해갔던 그자로군.”
독고진은 무공에 금제를 당한 상태긴 했으나 소란에 일어나있었고 멀리서 다가오는 묵령을 알아보고는 경계했다.
“나를 구하러 온 것인가? 아니면?”
스르릉-
묵령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이 들고 있던 묵도를 서서히 뽑아들었다.
그 모습에 독고진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여기까지였나... 경이에게 미안하군. 살아남겠다고 약조를 하였는데...’
독고진은 어차피 죽을 각오를 해왔기에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하지만 유인경과 만나고 자신의 스승인 흑월도존에게 사죄해야겠다고 마음 먹은 지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죽음과 다시 마주하자 아쉬운 마음이었다.
“이게 너희의 뜻인가? 내가 죽어서 너희가 얻는 것이 무엇이지?”
독고진은 아쉬운 마음에 묵령을 향해 물었다.
“주군께서 너의 변절을 걱정하였다. 도존이 무사함을 확인한 만큼 너는 더 이상 우리와 뜻을 같이하지 않을 테고 혹여나 도존이 깨어나 다시 정사가 힘을 합치는 일을 경계하기 위해 너를 처리하라 하셨다.”
다른 이와 말을 섞는 것을 꺼리는 묵령이었지만 사파의 지존이었던 독고진에 대한 예우차원으로 자신이 죽는 이유는 알려주었다.
그리고 그가 금제를 당하여 무공을 쓰지 못하는 상태라는 것을 직접 확인했기에 변수는 없다 생각했다.
“그렇군. 나를 남궁세가의 뇌옥에서 죽이고 흔적을 지운다면 모두 우리에게 원한이 있는 남궁세가의 인물이나 정파의 인물이 나를 죽였다 생각하게 하려는 속셈이겠구나.”
독고진은 상대의 의도를 파악하곤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자신의 존재가 죽어서까지 유인경과 스승인 도존에게 방해가 될 것을 생각하니 더욱 그랬다.
하지만 그는 무공에 금제를 당한 상태기에 저항을 할 수도 없었다.
“너의 죽음은 혹여나 모를 정사의 단합의 여지를 아예 없애 줄 것이다. 한때 사파의 지존이었던 자가 죽기에 안타까운 자리이나 어쩔 수가 없구나.”
묵령은 자신이 무인이었기에 독고진의 이 죽음이 얼마나 원통할지 잘 알고 있었다. 사마령의 명이었기에 행하지만 마음 한 구석 독고진에 대한 안타까움은 있었기에 최대한 고통이 짧게 보내줄 생각이었다.
“잘 가시게.”
쐐액-
묵령의 묵도가 파공성과 함께 독고진을 향해 양단되어 갔다.
콰광-
“뭣이?!”
하지만 그의 힘이 실린 묵도가 가른 것은 독고진이 아니라 독고진이 앉아있던 바닥이었다.
묵령은 도를 회수하며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고 독고진을 피하게 만든 한 인물을 발견하고 얼굴이 굳었다.
“검성...?”
독고진의 앞에 서 있는 자는 다름 아닌 검성이었고 묵령은 얼굴에 핏기가 식어 창백해져 있었다.
검성의 강함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묵령이었기에 자신의 앞에 검성이 나타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공포를 느끼고 몸이 굳어 있었다.
‘신마조차 당해내지 못한 검성을 내가 어찌 상대한다는 말인가... 도망 가야하나... 아니면...?’
묵령은 찰나의 시간 고민을 했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나타난 지조차 파악하지 못했던 검성을 자신이 뿌리치고 도망갈 자신도 없었다.
진천문의 호법 가문으로 잠행술과 은신술을 극한으로 익힌 묵령이었지만 상대가 검성이면 도저히 자신이 생기지 않았다. 이미 흔적을 남기지 않고 기척을 죽이고 이곳에 잠행했음에도 검성이 나타난 것부터가 이미 검성의 손아귀에서 벗어 날 수가 없다는 뜻과 같았다.
“고민이 많아 보이는구나? 네가 무슨 속셈으로 온지는 네가 직접 말했으니 물을 필요가 없을 듯 싶고 혹여나 지금 네가 도망가고자 머리를 쓰고 있다면 한번 해 보거라.”
검성의 말에 묵령은 정신이 든 듯 결심을 굳혔다.
파밧-
퍼버벙-
묵령이 순간 뒤로 뛰며 품 안에서 무언가 꺼내 바닥에 던졌고 동시에 회색 연무가 피어올라 뇌옥을 가득 채웠다.
그 바람에 뇌옥 안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지켜보고 있던 뇌옥 안의 죄수들이 소리치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크헥... 독무(毒霧)다... 숨을...”
상황을 숨죽이며 지켜보던 뇌옥 안의 죄수들은 뇌옥에 가득 찬 연무에 거품을 물고 하나 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묵령이 애초에 뇌옥 안의 모두를 죽이기 위해 가져온 독연(毒煙)이었다.
“살고 싶으냐?”
검성은 독고진에게 물었고 독고진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모습에 검성은 미소를 짓고는 그를 안아들었다.
“생을 포기한 자처럼 군다기에 죽겠다 그럴까봐 걱정했더니 기우였구나. 숨을 참아라.”
검성의 말에 독고진은 숨을 멈추고 눈을 감았다. 혹여나 독연이 시력을 잃게 할 수도 있었기에 그의 행동은 옳았다.
그를 안아든 검성은 이미 가득 찬 독연을 향해 일장을 내뻗었다.
파바방-
파공성과 함께 장력에 의해 연무사이로 길이 열렸고 동시에 검성의 신형이 움직이며 날아갔다. 그렇게 장력으로 바람을 일으켜 연무를 걷어내기를 몇 번 하자 검성은 뇌옥을 빠져 나올 수 있었다.
털썩-
검성은 뇌옥을 빠져나오자 독고진을 바닥에 내려놓았고 독고진은 무사히 빠져나왔음을 느끼자 서서히 눈을 떴다.
“검성?”
그가 눈을 떴을 때 검성은 그의 앞에 없었고 홀로 내버려진 그는 어리둥절하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금제를 당한 몸이지만 이렇게 자유롭게 둔다 말인가...”
독고진은 검성이 묵령을 쫓아갔음을 알았지만 자신을 이렇게 방치한 것에 조금은 놀랐다. 아무리 금제를 당한 몸이지만 자신이 도망가지 않을 것을 믿고 있다 해도 이렇게 내버려두고 간 것은 의외였다.
독고진이 한참동안 그 자리에 있어야했고 그가 다시 뇌옥에 갇힌 것은 뇌옥의 교대 무사들이 오고 뇌옥 안을 파악하고 모든 정리가 끝난 후였다.
***
“허억... 어떻게 이렇게 빨리...?”
뇌옥 안에 독연을 터뜨리고 남궁세가를 빠져나온 묵령은 이십리도 도망을 가지 못한 채 검성에게 추격당해 멈춰서야했다.
따라잡힌 묵령은 도저히 이 상황이 납득이 되지 않았다. 독연을 터뜨리고 검성이 뇌옥을 빠져나오기 전 도주의 흔적을 지우고 반대 방향으로 도주 한 것처럼 흔적을 남기고 왔음에도 검성은 자신을 놓치지 않고 쫓아온 것이었다.
“일전에 신마를 데리고 빠져나갔을 때도 쫓지 않은 것이지... 쫓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니었구나...”
묵령은 이제야 검성이 그때도 자신들을 굳이 쫓아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그때도 검성이 쫓고자 마음먹었다면 두 사람 다 죽은 목숨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이렇게나 강하다니... 주군을 다시 뵙는 일은 없겠구나...’
묵령은 이곳이 자신의 묏자리가 될 것을 느끼곤 마음을 굳힌 듯 도를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