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화- 살아남은 자
“식사를 통 안하신다고 들었어요?”
“......”
“오라버니.”
유인경의 말에 답이 없던 독고진은 오라버니라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나를 그렇게 불러주는 것이냐?”
“살아 남으세요. 할아버지가 다시 기력을 찾고 깨어나실 때까지...”
독고진의 물음에 유인경은 답하지 않고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래... 그렇게 하마. 반드시 살아남아 스승님이 일어나시는 것을 보고...”
독고진은 뒷말을 하지 않았지만 유인경은 생략된 그 말이 무엇일지 잘 알고 있었다. 독고진은 뇌옥에 갇히고 몇 번을 죽으려 시도를 했었다.
검성이 독고진과 대화를 하고 난 후 자살을 하려는 시도는 줄었지만 여전히 식사를 잘하지 않고 상념에 빠진 채 하루하루를 멍하니 보내고 있었다.
‘그는 할아버지가 일어나시는 것을 보고 죽으려고 하는 것이겠지?’
유인경은 마음 한구석이 시큰해져오는 것을 느꼈다. 도존이 일어나지 못 한다면 그녀에게 남은 사람은 월랑 외엔 없었다. 독고진과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사이였으나 마음이 쓰이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하나 묻고 싶은 것이 있어요?”
“무엇이지? 이미 검성에게 모든 것을 이야기했는데...”
“오라버니는 저와 할아버지를 배신하는 것이 쉬웠나요?”
“......”
유인경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어오자 예상치 못한 질문에 독고진은 말을 잃었다.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때의 결정을 후회하진 않아.”
“할아버지의 중독과 관련이 있나요?”
“네가 믿어줄지 모르지만... 난 스승님의 중독과는 관련이 없다. 나도 스승님이 건재하셨다면 그런 일을 결심하지도 않았을 것이지만 내 뜻을 위해 스승님을 중독 시키는 것을 돕지는 않았다. 난 처음에 그저... 스승님께서 노환으로 쓰러지신 거라 생각했었다.”
독고진은 유인경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고 말을 다들은 유인경은 돌아섰다.
“믿을게요. 저도 그런 짓까지는 안했다고 생각하고 있었어요.”
유인경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서 뇌옥을 나갔고 월랑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사라져가는 유인경의 모습에 독고진은 한숨을 내쉬곤 눈을 감았다.
독고진은 그녀가 불편했다. 그녀를 죽이려했었고 그녀의 모든 것을 빼앗으려 했었다. 하지만 유인경과 그녀의 할아버지이자 스승인 도존은 자신을 살려주고 이렇게 살아남으라고 하고 있었다.
유인경을 마주하고 있자면 자신의 죄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기분이라 독고진은 그녀가 불편했다.
***
어둠이 짙게 깔린 산중에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을 것만 같은 곳인데 허름한 객잔이 자리하고 있었다.
객잔의 이름마저 낡아 지워진 이곳에 두 명의 인영이 안으로 들어섰다.
파악-
객잔에 들어선 두 사람은 화섭자를 꺼내어 등에 불을 붙였고 구조를 이미 잘 알고 있는 듯 능숙하게 곳곳에 불을 밝히기 시작했다.
“명을 받아 온 것이냐?”
“묵령님을 뵙습니다.”
두 사내는 갑작스레 나타난 사내를 보고 지체 없이 무릎을 꿇었다.
모습을 드러낸 사내는 지존 사마령의 호위였던 묵령이었다.
“지존의 명을 가져왔습니다.”
한 사내가 조심스레 품에서 서찰을 꺼내어 내밀었고 묵령은 받아서 바로 펴보았다.
“천존은 가능하면 저희가 모시고 복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지존의 명이 아닌 활불의 명이셨습니다.”
사내는 서찰을 읽는 묵령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말을 꺼내었다. 서찰은 지존 사마령이 묵령에게 전하는 내용이었고 사실 그들은 활불의 명에 의해 천존을 데려가기 위해 이곳까지 온 것이었다.
“이들과 떠나시면 될 듯 합니다. 천존.”
서찰을 읽던 묵령이 뒤를 바라보며 말하자 그의 뒤엔 언제부터 그 자리에 앉아있었는지 환영신마가 자리하고 있었다.
검성과 환영신마의 대결사이에 끼어들어 환영신마를 데려간 자는 바로 묵령이었다. 잠행술과 은신술 그리고 경공에 특출난 그였기에 그런 돌발행동을 할 수 있었다.
묵령을 탐탁치 않아했던 환영신마였지만 묵령의 개입이 없었다면 그 자리가 자신의 묏자리가 되었음을 알았기에 묵령의 행동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활불의 명이라면 그렇게 해야겠지. 이전과 같이 그 계집의 농간은 아니겠지?”
환영신마의 안광이 번뜩였고 그 눈빛에 사내들은 흠칫하며 몸을 움츠렸다.
‘검성에게 형편없이 당했다하여 기가 좀 죽어있을까 했는데 여전하군...’
사내는 이미 상황을 다 듣고 온 후라 겨우 목숨을 건진 환영신마의 기가 한풀 꺾여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하여 놀라고 있었다.
“현재 활불께서 전면에 나서서 전체적인 지휘를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이전처럼 종파마다 기싸움도 사라진 상황이고 모두 협력하여 거사를 준비 중입니다.”
“그래? 활불께서 혈천마경을 대성하신건가 보군. 얼른 가서 뵈어야겠어. 그런데 넌 같이 떠나지 않을 건가?”
환영신마는 묵령을 보며 말했다.
화륵-
묵령은 대답대신 등불에 다가가 서찰을 태워버렸다.
“전 다른 임무가 있어서 그것을 마무리하고 따라가겠습니다.”
“다른 임무?”
환영신마는 궁금하여 물어보려했으나 어차피 답해주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입 속의 말을 삼켰다.
‘이 상황에 명령이라면 뻔하군.’
환영신마는 묵령이 받은 임무를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현재 자신들이 생각한 것보다 빠르게 정사의 싸움이 마무리되었기에 불마사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 상황이었다.
본래는 정사의 싸움이 길어져 서로간의 피해가 커지고 그 혼란을 틈타 불마사가 동진(東進)을, 만독곡이 북진(北進)을 하려는 계획이었는데 남궁세가와 사왕련의 싸움이 마무리되는 바람에 정사간의 싸움도 흐지부지 된 채 소극적인 다툼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천존. 정파의 이목이 이 부근에 집중되어 있으니 빠르게 빠져나가셔야 합니다.”
생각에 빠진 환영신마를 향해 사내가 재촉했고 환영신마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정파의 추격대가 근처에 있는가?”
“네. 남궁세가와 무림맹의 추격대가 곳곳에 있습니다. 저희도 이곳까지 오는 도중 몇 번을 마주쳐 따돌렸습니다.”
무림맹과 남궁세가는 사왕련의 잔당들을 추격하기 위해 따로 추격대를 편성하여 모든 곳을 살피고 있었다. 환영신마를 쫓기 위한 이들은 아니었지만 이들에겐 신경 쓰이긴 매한가지였다.
“빨리 합류하는 것이 좋겠지. 바로 떠나도록 하지.”
환영신마도 얼른 서장으로 돌아가 활불을 만나고 싶었기에 사내의 재촉에 따라주기로 했다.
“너도 일을 마무리하고 얼른 돌아오도록 해라.”
“네, 천존. 곧 따르겠습니다.”
환영신마의 말에 묵령은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하며 답했다.
“가자.”
환영신마의 말과 함께 세 사람이 밖으로 나섰고 바람소리와 함께 사라지자 묵령은 한편에 놓아두었던 그의 검을 잡아들었다.
그리고,
촤작-
그의 발검과 함께 곳곳에 켜져 있던 등불의 심지가 끊어지며 객잔은 이전의 어둠을 찾아갔고 안 그래도 흑의를 입고 있던 묵령은 어둠 속에 사라졌다.
“당신의 명령 반드시....”
묵령은 사마령을 떠올리곤 중얼거렸고 이내 그의 기척이 사라졌다.
***
“저 이러다 머리가 다 빠질 거 같습니다.”
천통자는 검성의 방에 들어서자마자 앓는 소리를 했다. 그런 천통자의 모습에 검성과 약선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최근 매일 천통자가 앓는 소리를 하고 있는 탓에 검성도 귀찮을 지경이었다.
“정말로 아무도 안 만나보실 겁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아니 하루가 뭡니까 매끼니 마다 각 문파의 대표들이 찾아와 저만 괴롭힙니다. 검성과 자리 좀 마련해달라고요.”
천통자는 검성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우는 시늉을 했다. 남궁세가와 사왕련의 일전이 마무리되고 대활약한 검성과 이윤후에 대한 이야기는 전 무림의 관심사였다.
그렇기에 현재 남궁세가에 머물고 있는 검성에게 하루가 멀다 않고 접견요청이 빗발치고 있었고 천통자가 의천문의 총관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천통자에게 뇌물까지 가져와 요청하는 자들도 적지 않았다.
처음엔 그런 관심 자체를 즐겼던 천통자였지만 하루도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의 닦달에 지쳐가고 있었다.
뇌물을 찔러주는 자들 중엔 만나게만 해준다면 엄청난 은자를 약속한 자들도 있어 천통자도 검성을 살짝 떠보기도 했지만 검성은 요지부동이었다.
“남궁세가는 잘 추스르고 있더냐?”
검성의 물음에 천통자는 뒤로 물러나며 입을 떼었다.
“네. 생각 외로 빠른 속도로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고 있습니다. 남궁세가가 사왕련의 싸움에서 이기고 사왕련의 잔당을 모두 이곳에서 몰아낸 덕에 일대의 영향력을 빠르게 찾아가고 있습니다.”
“따로 걱정할 건 없는 건가?”
천통자는 검성이 말하는 질문의 의도를 생각하느라 바로 답하지 못했다.
“걱정할 꺼리라는 게 사왕련의 잔당들이라면 말했다시피 이미 정리가 된 것이나 다름없어서 괜찮을 듯 합니다.”
“그거야 뭐 걱정할 이유가 없지.”
“그러면 어떤 것을?”
천통자는 검성이 의도를 말하지 않고 자신을 시험하는 듯 하자 살짝 부아가 치밀었지만 속으로 삼킨 채 다시 물었다.
“남궁세가와 세가연합회의 일 말이야.”
“아... 그거라면 이미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인이 현재 협회의 장(長)인 모용세가에 탈퇴의 뜻을 전했다합니다.”
천통자도 처음 소식을 접하곤 놀랐으나 현재 남궁세가는 탈퇴한다해도 딱히 위상의 변화는 없을게 분명했다. 오히려 남궁세가가 탈퇴하는 것을 세가연합회에서 만류하는 분위기였다.
검성의 의천문이 남궁세가를 돕고 있는 이상 현재 남궁세가에게 시비를 걸 세력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봐야했다.
검성이 현재 정파 누구와도 만나주지 않는 상황에서 직접 나서서 남궁세가를 도왔던 만큼 검성과 접점이 있는 남궁세가는 현재 어느 무림세력보다 중심에 있다고 봐야했다.
“세가연합회의 탈퇴가 남궁세가에 큰 영향이 있을까?”
“아, 그걸 걱정하시는 거군요. 제가 보기엔 남궁세가가 세가연합회의 도움이 없어도 세력을 추스르는데 문제가 없을 겁니다. 무엇보다 이번 사왕련과의 일전에서 피해를 보긴 했지만 얻은 게 더 많으니까요.”
천통자의 말처럼 남궁세가는 사왕련과의 일전으로 재물적 손해나 인적 손해도 크게 보았지만 얻은 것도 많았다.
무엇보다 사왕련이 장악하고 있던 이권들을 모두 남궁세가가 다시 되찾게 되었다.
남궁세가의 세력이 약화된 탓은 사왕련이 지척에 있어 세력상 안휘성 일대가 사파의 영역에 더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한 금전적 피해가 막대했기에 세를 불리는데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사왕련이 아예 사라진 만큼 사왕련이 가진 이권들을 모두 남궁세가가 찾아왔고 그 이익은 남궁세가의 부흥기를 가져올게 분명했다.
“네가 남궁세가의 가주와 이야기를 좀 해보도록 해라. 우리가 더 도와줄 것이 있는지 말이야.”
“여기서 더 도울 것이 있을까요?”
천통자는 이미 남궁세가는 검성의 영향력에 들어가는 세력으로 봐야했기에 딱히 뭔가를 더 할 필요가 없을 거라 판단하고 있었다.
“소주로 돌아가실 생각이십니까?”
“돌아가야지.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지 않느냐? 넌 조금 남아서 일을 마무리하도록 해. 나와 애령은 오늘 돌아가려하니.”
“그럼 남궁세가주와도 그렇게 이야기 해두겠습니다.”
천통자는 답하고는 이내 고개를 들어 약선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