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뜻밖의 개입(介入)
이윤후 역시 내력을 끌어올리며 마지막 맞대결을 대비했다. 수십 합을 겨루었던 만큼 독고진이 결판을 내려한다는 것을 느꼈고 이윤후 또한 그렇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윤후는 만상오행공을 차례로 운행하며 기운을 끌어올렸다.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부딪치기 시작하자 지켜보던 모든 이들도 드디어 긴 싸움의 끝이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기에 모두 긴장된 마음으로 말 한마디 꺼내지 못한 채 숨죽이고 있었고 이윤후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두 여인, 남궁나연과 유인경은 다른 이들과는 또 다른 마음으로 이윤후를 응원하고 있었다.
파밧-
미묘한 긴장감이 흐르던 두 사람은 동시에 땅을 박차고 뛰어 오르며 상대를 향해 자신의 최고 절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월령단천(月靈斷天)!”
촤자자자작-
독고진의 홍라염도에서 검붉은 도기가 발산되었고 마치 독고진의 검기에 홍라염도가 불꽃을 더해준 듯 한 형상이었다.
“무극섬뢰(無極閃雷)!”
독고진의 도기가 달려드는 이윤후를 향해 덮쳐갈 때 즈음 이윤후도 검을 앞으로 내지르며 비뢰검결의 최종오의인 무극섬뢰를 펼쳤다.
하지만 보기에 이윤후의 무극섬뢰는 단순한 찌르기로 보였고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이윤후가 독고진의 도에 두 동강 날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촤아악-
이윤후의 찌르기가 독고진의 도기와 닿는 순간 강맹했던 기운이 사라졌다.
마치 동장군의 서릿발 같던 기세가 순식간에 춘풍(春風)으로 바뀐 듯한 착각까지 들었다.
이윤후의 검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재차 공격을 이어나갔다.
자신의 절초가 쉽게 깨어져 넋이 나간 독고진을 향해 이윤후는 거리를 좁혀갔고 이번엔 손속에 정을 두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제 끝입니다.”
이윤후는 독고진이 살아있는 한 남궁세가와 사왕련의 싸움은 끝이 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빠른 결심으로 독고진의 목숨을 거두려 하고 있었다.
파밧-
“헉... 크핫...”
이윤후의 검이 좌절한 독고진의 목을 내리치려는 순간 누군가 이윤후 앞을 가로 막았다.
그는 이윤후의 검을 잡은 오른손을 제압하는 동시에 가볍게 밀어내었다.
이윤후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검을 잡은 손을 제압당하고 상대의 손에 밀려 검성에게까지 가서야 겨우 멈출 수 있었다.
“도대체 누가 이렇게 끼어드는...?”
그러면서 이윤후는 자신의 몸 상태가 멀쩡함에 한번 놀랐고 상대가 누군지 알아보고는 더욱 놀라 말을 잃었다.
놀란 것은 이윤후 만이 아니었다. 이윤후를 막아선 상대가 누구인지 알아본 사람들 모두가 놀라 말을 잇지 못했다.
“도존? 흑월도존이다.”
누군가 이윤후를 막아선 노인을 알아보고 외치자 모두가 혼란상태가 되었다.
이윤후를 막아선 상대는 병상에 누워있던 흑월도존이었고 그를 본 유인경과 월랑은 바로 도존에게 달려갔다.
“할아버지? 어떻게 깨어나신 건가요? 이게 무슨 일이죠?”
유인경은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도존의 여기저기를 살폈고 놀라기는 월랑도 마찬가지였기에 자신의 주군의 상태를 마찬가지로 살피고 있었다.
“경아, 미안하구나.”
“할아버지?”
유인경은 할아버지인 흑월도존의 음성에 놀라 도존을 올려다보았다.
“나의 욕심으로 인해 너의 부모이자 내 아들과 며느리를 희생시켜야했는데 또 다시 나의 결정으로 인해 내 제자와 손녀를 잃을 뻔했어.”
도존의 시선이 유인경에게 그리고 자신의 등 뒤에 무릎을 꿇은 채로 자신을 올려보는 독고진을 향했다.
“진정... 스승님이십니까?”
도존의 출현이 믿기지 않은 것은 독고진도 마찬가지였기에 그의 음성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만독곡의 절독에 중독되어 절대로 깨어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던 자신의 스승이 깨어난 것도 놀라운데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것은 더욱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진아. 너의 아픔을 잘 알고 있었는데 내 욕심으로 인해 너의 마음을 병들게 하였구나. 내가 미안하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으로 비롯된 일이니 네가 이곳에서 죽을 필요는 없다.”
“스승님...”
도존의 말에 독고진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부모가 정파의 무사들에게 희생당하고 도존에게 거두어져 복수만을 꿈꾸며 살았던 독고진에게 도존이 무림일통을 다 이루고도 포기한 것은 그에게 천추의 한으로 남았다.
결국 부모의 복수를 위해 도존을 배신하며 까지 정파를 발아래 놓고 싶었던 독고진이었지만 그는 도존에 비해 나약했고 다른 세력에게 이용을 당했다.
독고진 또한 자신이 어떠한 세력에게 이용당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미 시작한 이상 멈출 수는 없었다. 그저 자신이 이용당한다 한들 환영신마 역시 정파의 무리들을 궤멸시켜 줄 것을 알았기에 상관없다 여기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약선 어르신이 해독 전엔 깨어나기 힘들거라 하셨잖아요?”
이윤후는 자신의 곁으로 다가온 검성을 향해 물었고 검성은 도존과 독고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는 것은 무리를 하고 있음이 아니겠느냐?”
검성은 안타까운 듯 한 눈빛으로 도존을 보았고 그 말뜻을 이윤후는 금세 알 수가 있었다.
“크헉...”
“할아버지!”
“스승님!”
멀쩡해보였던 도존이 핏덩이를 내뱉고 그대로 휘청거리자 유인경과 독고진이 놀라 쓰러지던 도존을 받쳐 들었다.
파바박-
약선이 어느새 다가와 도존의 혈을 제압하자 도존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의 접근에 놀랐던 유인경도 상대가 약선임에 안심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죠?”
유인경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큰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약선은 그런 그녀가 안쓰러운 듯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일단 눕혀야하니 따라오게.”
“네? 네. 알겠습니다.”
약선이 독고진을 향해 말을 하자 독고진은 자신도 모르게 답하고는 도존을 안아 들었다.
약선은 검성을 바라보며 그가 따로 반응이 없자 독고진이 안은 도존을 데리고 방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들 당황하고 있었다.
“결판을 내지 못해 아쉬우냐?”
검성이 이윤후를 향해 묻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이미 결판이 났다고 생각하기에 전 아쉬운 것이 없습니다. 그저 저 자를 저대로 두어도 될까요?”
이윤후는 자신의 사부를 들쳐 업고 가는 독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
“끝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저자의 생존은 남궁세가에 큰 위협이 된다고 여겼기에 끝을 내야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아닙니다.”
“왜 아니더냐?”
두 사람의 선문답에 모두가 집중했다.
이미 싸움이 끝이 났음에도 모두 자리를 떠나거나 환호성조차 지르지 못하고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도존... 도존이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며 제자를 살리려했는데 제가 그를 처단하기는 더 이상 힘들 거 같습니다. 더 이상 마음이 동하지도 않고요.”
이윤후는 말처럼 더 이상 손에 피를 묻히고 싶지 않았다. 도존의 상태가 어떤지 가장 잘 알고 있었던 이윤후였기에 더욱 그러했고 독고진 또한 본인 스스로가 죽을 자리를 선택한 것이기에 자신이 그를 죽이는 것이 선뜻 내키지도 않았다.
이윤후의 대답에 검성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제자의 실력을 제대로 확인했고 오늘의 일에서 더욱 성장한 그를 보자 흐뭇했다.
검성은 이윤후의 어깨를 툭 쳐주고는 모두의 앞으로 걸어 나갔다.
검성에게 모두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오늘의 싸움은 끝이 났다. 남궁세가는 이 싸움에서 살아남았고 승리하였다. 모두의 승리다.”
검성의 승전선언과 함께 모인 모두가 환호하기 시작했다. 이미 결정된 승리였으나 검성의 말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다.
남궁세가는 사왕련과의 일전에서 승리했고 이제 이 소식은 무림에 빠르게 알려질 것이었다. 사왕련이 무너진 이상 각지의 사파들도 빠르게 힘을 잃어갈 것이 분명했고 정사의 싸움은 빠르게 안정 될 것이 분명했다.
누군가는 승리를 만끽하고 있었고 누군가는 이 승리를 마냥 기뻐하지 못하고 있었다.
***
남궁세가의 승리는 빠르게 무림에 알려졌다. 사왕련이 기습을 가하고 사왕과 련주인 독고진까지 나섰음에도 남궁세가에 패배한 것은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남궁세가에 검성과 약선 그리고 서문세가의 지원이 있자 이를 안 다른 정파들도 보여주기 식의 지원을 하긴 했지만 사왕련의 세력과 규모에서 큰 차이가 있었고 무엇보다 절정 고수들의 수에서 거의 두 배 이상 차이가 났기에 전면전이 벌어진다면 남궁세가가 버티기 힘들 것이란 것이 모두의 예상이었다.
하지만 사왕련이 기습을 했음에도 패배하였고 이후 황산의 사왕련은 빠르게 정리되었다. 사왕련이 무너지자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던 정파와 사파의 싸움도 잦아들기 시작했다.
사왕련이 생각보다 쉽게 그리고 빠르게 무너진 탓에 무림맹은 전력을 새외세력 견제를 위해 집중 할 수 있는 상황이 되었고 재건되고 있는 무림맹은 큰 탄력을 받게 되었다.
사왕련과의 일전에서 활약한 검성과 그의 제자 이윤후에 대한 명성은 더욱 커져갔고 이윤후가 사왕의 일인인 미후왕을 패퇴시키고 련주인 독고진과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한 일은 무림의 이야기 거리가 되고 있었다.
***
남궁세가의 지하 뇌옥(牢獄).
사람들의 출입이 거의 없는 외곽에 위치한 곳이라 남궁세가의 사람들조차 이런 곳이 있는지 모르고 있는 이가 많았다.
뇌옥은 텅 비어 있었으나 뇌옥의 가장 깊숙한 석실 뇌옥에 한 사내가 갇혀 있었다.
“지낼 만 하신가요?”
뇌옥 안의 사내에게 말을 건네는 여인은 바로 유인경이었다. 유인경과 남궁세가의 총관 안명. 그리고 월랑이 뇌옥 안의 사내를 만나기 위해 이곳에 와 있었다.
뇌옥 안의 사내는 바로 사왕련주였던 독고진이었다.
공허한 그의 눈빛은 유인경을 확인하고 잠시 생기가 돌아왔으나 이내 생기를 잃고 말았다.
“왜 또 찾아 온 것이지? 이미 모든 것을 말하였는데.”
독고진의 말에 유인경의 고운 아미가 꿈틀거렸다. 사왕련의 기습 이후 사왕련은 붕괴되었고 독고진은 죽지 않았지만 결국 이렇게 금제를 당한 채 뇌옥에 갇히고 말았다.
검성과 약선이 보증한 덕에 그가 죽진 않았지만 남궁세가의 다수와 무림맹에서는 독고진을 죽여야한다고 압박이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도 결국 검성과 약선의 입김 덕에 독고진은 무사할 수 있었고 유인경은 내심 마음이 복잡했다.
독고진을 죽이는 것도 그렇다고 자신과 할아버지인 도존을 배신한 그를 보는 것도 탐탁치 않았다.
하지만 도존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까지 살리려한 독고진을 죽게 내버려둘 순 없었고 그를 처단하더라도 그의 할아버지인 도존이 깨어난 후여야 한다고 판단했다.
“스승님은... 무사하시냐?”
독고진이 어렵사리 입을 떼어 묻자 그 물음에 유인경은 허탈한 웃음을 보였다.
“네.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스스로 제어하고 있던 독의 기운이 온 몸에 퍼져 위험한 상황이었으나 약선께서 손봐주신 덕에 위험한 순간은 지난 듯 해요.”
유인경의 말에 독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존은 그 일이 있고 며칠 동안 사경을 헤맸고 위험한 순간도 수차례나 있었다.
오늘 아침에서야 약선이 위험한 순간은 지나갔다고 안심을 해도 된다고 말해 주어 유인경도 이제 조금은 마음이 편해진 상태였다.
‘내가 왜 굳이 이야기를 해주러 여기까지 온 것인지...’
유인경은 마음이 참 복잡했다. 약선에게 도존이 이제는 어려운 순간을 지났다는 이야길 듣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 독고진에게 이야기를 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곳에 온 것이었는데 막상 얘기를 전하고보니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