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환영신마(幻影神魔)(1)
“련주님...”
윤엽은 보고를 받고 넋이 나간 채 독고진을 바라보았다. 독고진 또한 바로 옆에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지만 그는 담담함을 유지한 채 동요하지 않았다.
“철수해야 합니다. 이곳은 적진의 한가운데... 모두 패하거나 도주한 마당에 흑룡창제까지 물러나거나 패한다면 저흰 여기서 사면초가의 상황이 되고 맙니다.”
“윤엽. 진정하고 조용해라.”
윤엽의 말에 독고진이 그의 입을 막았다. 이미 윤엽의 말을 듣고 동요하는 사왕련의 무인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그제서야 윤엽은 자신이 실수를 했음을 알았다.
냉철한 윤엽이었지만 현재 상황이 너무 좋지 않자 그답지 않은 실수까지 범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의 말처럼 현재 자신들의 상황은 너무 좋지 않았다. 사왕들이 동시에 네 개의 문을 장악하고 소란을 일으켰을 때야 이곳이 안전할지 몰라도 모든 소란이 정리되고 나자 그들의 위치는 독안에 든 쥐나 다름없었다.
상황이 이런 만큼 윤엽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한 것도 이해가 되었기에 독고진은 그를 나무라지 않았다.
현재 가장 현명한 선택이 바로 후퇴란 걸 그도 알았다.
“사왕련의 무사들 전원은 련으로 복귀한다. 복귀하라!”
“존명(尊命)!”
독고진의 명령에 사왕련의 수하들은 대답과 함께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이미 대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윤엽을 통해 들었던 터라 그들의 행동은 아주 빨랐다.
“윤엽. 너도 떠나라.”
“련주님은 후퇴를 안 하십니까?”
“나는...”
독고진은 검성을 바라보고는 마음을 굳힌 듯 눈빛이 바뀌었다.
“윤엽 너는 사왕련으로 복귀해 모두를 해산시켜라. 오늘의 일로 사왕련의 현판은 내린다. 나는 남을 것이다.”
결연한 독고진의 말에 윤엽은 눈물이 흘렀다. 자신의 잘못된 판단으로 현재 상황에 이른 것 같아 그는 더욱 가슴이 아팠다.
“살아야 다음이 있습니다. 저와 같이 후퇴를...”
“이미 사왕이 무너진 시점에 사왕련은 다시 힘을 모으기 힘들다. 너도 잘 알지 않느냐? 사왕련의 식솔들을 떠날 수 있게 네가 준비해야 한다. 아침이 밝아오면 남궁세가의 모두가 사왕련으로 들이 닥칠 것이다. 그전에... 모두를 떠나보내라.”
“......”
독고진의 말에 윤엽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독고진의 말처럼 이대로 여기서 모두가 죽는다면 사왕련에 남은 사파의 식솔들은 남궁세가와 정파 연합에 쓸려나갈 것이 자명했다.
“주군의... 마지막 명을 받들겠습니다.”
윤엽은 무릎을 꿇고 독고진에게 예를 취했다.
독고진의 윤엽의 등을 두드려 일으켜 세워 주었다.
“내가 모자라 사부님처럼 사파 전체를 제대로 아우르지 못했고 그래서 네가 많이 고생했음을 안다. 마지막까지 힘든 명령을 내려 미안하다.”
“아닙니다... 제가 부족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제 떠나라.”
독고진의 말에 윤엽은 고개를 들어 그의 얼굴을 가음에 새기는 듯 꼼꼼히 살피고는 다시 한 번 예를 취하고 물러났다.
검성은 사왕련 무사들이 후퇴하자 그 상황을 가만히 주시하며 남아있는 독고진과 환영신마를 살폈다.
‘흑월도존이 제자를 잘못 두었다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그렇게 어리석은 녀석을 둔 것은 아니었군.’
검성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하여 수하들을 후퇴시킨 독고진의 행동을 칭찬해주고 싶었다. 어차피 남아서 끝까지 싸운다한들 모두 죽었을 것이고 그들이 원하는 바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 분명했다.
빠른 판단으로 수하들을 살리고 스스로 그 책임을 지려고하는 모습에 적이지만 칭찬해주고 싶은 것이 검성의 마음이었다.
그때 환영신마가 검성의 앞에 마주섰다.
“너와 난 풀어야 할 것이 있지 않나?”
환영신마는 검성을 바라보며 웃으며 말했다.
‘이미 사왕련은 망한 듯 하고 이대로 떠난다면 얻은 것이 너무 없다. 최소한 저놈의 목은 가지고 가야겠지.’
환영신마는 쉽게 무너뜨릴 거라 생각했던 남궁세가를 공략하지 못하고 오히려 사왕련의 존폐여부가 불확실해진만큼 그냥 떠날 수는 없다 생각했다.
불마사와 만독곡이 아직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정사의 싸움이 이렇게 끝나버린다면 자신의 실패로 여겨질 가능성이 높았기에 무언가 성과를 남기고 싶었다.
“이 녀석은 내가 상대해도 되겠지?”
환영신마는 마치 거래라도 하듯 독고진을 향해 소리쳤고 나서려했던 독고진이 한발 물러났다.
남궁세가와 정파의 무인들이 언제 밖의 소란을 마무리하고 이곳으로 달려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지만 환영신마와 독고진은 여유가 있어 보였다.
환영신마는 언제든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빠져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고 독고진은 수하들을 안전히 후퇴시켰기에 이미 자신은 여기서 죽기로 각오를 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
“네가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소문이 자자하더군.”
“......”
환영신마의 물음에 검성은 답하지 않았다. 검성 본인도 이미 그런 소문을 천통자를 통해 들었지만 자신 스스로도 선인의 경지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곡기를 끊어도 배고프지 않았고 잠을 자지 않아도 몸에 문제가 없을 정도로 인간의 범주에서 자신이 벗어나고 있다는 사실만은 검성 스스로도 인지하고 있었지만 남들이 말하는 선인의 경지라는 것에 대한 의문은 늘 검성도 가지고 있었다.
“나 역시 무(武)에 대한 탐구를 그치지 않았지만 너처럼 반로환동의 경지에도 선인의 경지에도 다가서지 못했다. 네가 이룬 그 경지가 과연 어디인지 내게 보여다오.”
환영신마의 얼굴이 조금은 일그러지며 검성을 향해 말했다.
그의 말엔 노기가 섞여 있었고 검성에 대한 질투심과 적개심도 포함 되어 있었다. 무인이라면 당연한 반응이라 검성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자신이 반로환동하여 젊어진 것에 대한 반응은 한결같았다. 특히 나이든 무인일수록 부러워하고 알게 모르게 적개심을 품는 이도 많았다.
“당신이라면 나의 갈증을 좀 풀어줄 수 있을까?”
듣고만 있던 검성은 환영신마를 바라보고는 말했다.
검성은 복수를 위해 다시 무림에 나와 권왕과 신투를 죽이면서 복수는 성공했지만 내적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새로운 무공을 창안하고 몸이 젊어지고 자신은 이전에 비해 모든 것이 좋아졌지만 이런 자신의 실력을 온전히 받아줄 상대가 없었다.
권왕과 신투는 이전에 비해 나이가 들어 약해져있었고 만나본 소림과 무당 그리고 개방의 수장들은 자신의 갈증을 채워줄 상대가 아니었다.
눈앞의 환영신마라면 자신의 무공을 온전히 받아줄 수 있을까 기대감이 있었다.
스르릉-
검성은 정천검을 일찌감치 뽑아들었고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의 기도에 환영신마는 말을 아끼며 내력을 끌어올리며 결전을 대비했다.
이미 도후를 쉽게 제압했던 환영신마는 검성과 약선도 그녀와 다르지 않을거라 착각을 했었으나 얼마 전 약선의 실력을 보고 그런 방심은 지운 상태였다.
“검성과 불마사의 천존의 대결이라... 의도치 않은 행운인가? 검성이 천존인 환영신마를 제거해준다면 불마사의 힘도 자연스레 약해질 터... 나쁘지 않겠어.”
검성을 뒤 쫓아 도착한 천통자는 검성과 환영신마가 부딪치려하자 쾌재를 부르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오는 도중 흩어지는 사왕련의 무인들을 보았기에 어리둥절했던 천통자는 도망치던 사왕련 하나를 잡아 이미 모든 상황을 파악한 상태였고 남궁세가의 위기가 끝났다 생각했기에 두 사람의 대결을 차분하게 지켜 볼 생각이었다.
“독고진을 주시하도록 해. 그가 어찌 나올지 모르니...”
“알겠습니다.”
천통자는 별다른 움직임이 없는 독고진을 경계했고 은위단에게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도록 지시 한 후 검성과 환영신마에게 향했다.
둘은 한참을 서로 노려본 채 움직임이 없었다. 그러다 먼저 움직인 이는 바로 환영신마였다.
파밧-
자신의 독문 보법인 환영신보(幻影神步)를 펼쳐 잔상을 만들어내며 검성의 시야를 어지럽혔다.
환영신마의 수없이 늘어난 듯해 보이는 환영신보의 움직임에도 검성은 동요하지 않은 채 날카로운 눈빛을 보였다.
촤작-
검성이 갑자기 돌아서며 검을 휘둘렀다.
배후로 진입했던 환영신마가 검성의 단칼에 베인 듯 보였지만 그것은 잔상이었다.
아지랑이처럼 사라진 잔상과 동시에 또 다시 배후에 유령처럼 나타난 환영신마가 쌍장을 내질렀다.
퍼버벙-
빗나간 일검과 함께 배후 공격을 당한 검성은 가까스로 환영신마의 쌍장을 회피했고 동시에 검성의 검이 빠르게 움직이며 환영신마의 미간을 향해 찔러갔다.
“제법 손속이 빠르구나.”
환영신마는 검성의 검을 또 다시 쉽게 피하며 발을 움직였다. 검성이 거리를 벌리려하자 환영신마는 그 틈을 주지 않고 다시 달라붙고 있었고 검성은 그런 환영신마를 떼어내고 자신의 거리를 만들려고 했다.
가까워진 두 사람의 거리 속에서 검과 권장이 어우러졌다.
수준 높은 공방전에 지켜보던 천통자는 입을 벌린 채 감탄하고만 있었다.
천통자는 눈으로 그 둘을 쫓는 것만으로도 무척 고역이었다.
무공 실력이 그다지 높지 않았던 그였지만 저렇게 짧은 서로의 거리 속에 빠르고 정확한 공방을 펼치는 검성과 환영신마의 실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노괴가 괜히 나이를 먹은 것이 아니구나...”
천통자는 검성을 상대하는 환영신마의 대처법을 보고는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劍)과 적수공권(赤手空拳)의 대결. 상대가 검성이라면 누가 봐도 환영신마의 불리함을 논할 수밖에 없었다.
그 이유는 사정거리. 검의 사정거리가 더 길었고 권장술을 주로 하는 환영신마보다는 검성 쪽이 대결에 유리함을 점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초상위 무인들의 대결에서 거리가 무슨 상관이 있겠냐고 할 수 있었지만 그런 그들이기에 더욱더 작은 유리함과 불리함이 큰 차이를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환영신마는 검성의 유리함인 검의 거리를 전혀 내주지 않은 채 철저하게 근접전을 벌이고 있었고 환영신마가 너무 달라붙어있는 탓에 검성은 검을 휘두르는 것조차 버거워하고 있었다.
검성이 거리를 벌리려하면 환영신마가 자신의 보법으로 거리를 좁히고 또 다시 거리가 벌어지면 다시 달라붙고 두 사람의 싸움은 치열하게 근접전을 원하는 환영신마와 거리를 벌리려는 검성간의 거리싸움이 되고 있었다.
하지만 천통자가 간과하는 부분이 있었으니 치열하게 거리 우위를 가져간 환영신마가 검성에게 적중시키는 공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에 환영신마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다.
“육시럴! 네 이놈 나를 가지고 노는구나!”
콰과광-
환영신마는 신경질적으로 장력을 방출했다.
그러나 동작이 큰 그의 공격을 검성이 맞아줄 리가 없었다. 가볍게 피하고는 거리를 벌린 검성은 환영신마가 더는 거리를 좁혀오지 않자 숨을 골랐다.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환영신마는 검성을 당장이라도 찢어죽일 듯 쏘아보았고 검성은 그런 환영신마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신마도 늙었구려. 도후와 내가 합공을 하는데도 손쉽게 회피하며 정파의 천라지망을 빠져나갔던 당신이었는데 고작 오십여합이 안 되는 공방에 숨을 그렇게 몰아시다니... 실망스럽군.”
검성의 말에 환영신마의 얼굴은 붉게 물들었고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그의 전신에서 살기가 피어올랐다.
“네놈 나를 시험했구나?”
검성의 도발에 억지로 마음을 추스른 환영신마는 검성을 향해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