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수라마검(修羅魔劍)
독고진과 사왕이 복귀한 사왕련은 무림을 향해 선전포고를 했다.
[사왕련 독고진의 이름으로 알린다. 우리는 스승님이신 흑월도존이 이루지 못한 사파의 무림일통(武林一統)의 대업을 이루기 위한 사왕련의 기치 아래 다시 모였다. 현 시간 부로 안휘성 일대를 사왕련의 영토로 선포하고 저항하는 세력들은 제거 할 것이다. 사왕련의 기치 아래 조아려라. 정파들이여, 너희들의 오만했던 과거를 반성하고 무릎을 꿇는다면 살려줄 것이고 거부하는 곳은 모두 사왕련에게 무릎을 꿇을 것이다.]
오만하고 광포하기까지 한 독고진의 선언에 무림맹과 정파는 분노했고 정사는 일촉즉발 풍전등화의 형세가 되었다.
독고진의 선언이 알려지고 하루가 되지 않아 사파는 행동에 들어갔고 각지의 성들에서 정사파가 부딪치기 시작했다. 어느 곳에서는 정파가 어느 곳에서는 사파가 멸문하는 상황이 연이어 벌어졌다.
그러나 주로 사파들이 득세하기 시작했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근거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곳에서 사파가 세력을 잠식해 들어가기 시작했다.
사왕련은 구룡도문과 적하문이 필두가 되어 정파를 궤멸시켜갔고 무림맹은 바쁘게 이곳저곳 지원을 다니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그나마 화산파가 섬서성 일대의 사파를 몰아내며 명문의 재건을 알렸다는 것은 정파에게 큰 희소식이었다.
기대를 받았던 화산 칠검이 하나같이 사고를 당하면서 죽고 막내인 관운경이 장문인이 되면서 세인들의 박한 평가를 받았던 화산이었지만 그들은 힘을 비축하고 있었고 무림의 위기에 그 힘을 드러내며 화산파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구파일방이 하나같이 사파와의 싸움에 고전하고 지지부진한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지만 유일하게 화산파만이 가장 빠르게 일대를 장악하며 섬서성의 다른 중소방파들을 도왔고 화산파의 명성은 더욱더 드높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했던 남궁세가와 사왕련의 대결은 사왕련의 기습으로 시작되었다.
콰과광-
굉음이 일고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새벽에 남궁세가를 기습한 사왕련은 남궁세가의 동서남북 사방에서 총공세를 펼쳤고 갑작스런 기습에 남궁세가의 피해는 적지 않았다.
“동문에 미후왕 서문에 혈음귀조 남문에 수라마검 북문에 흑룡창제 사왕 모두가 쳐들어왔습니다.”
기습을 보고 받은 남궁인은 나름 대비를 잘하고 있었지만 사왕이 동시에 여러 곳을 흔드는 모양새에 속수무책이었다.
“검성님과 약선님은 어디에 있나?”
보고를 하는 창연에게 남궁인이 물었다.
“검성께서 수라마검의 위치를 물으시고는 남문으로 가셨고 약선과 서문세가의 인원들은 서문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 소협께서는 미후왕이 동문에 있다는 것을 듣고 동문으로 가셨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을 검성께서 해주시는군... 그럼 우린 창룡대와 인원을 정비해 북문으로 간다.”
“네. 안 그래도 창룡대주가 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남궁세가의 명운이 오늘 밤에 결정이 날 듯 하구나.”
남궁인의 결연함이 느껴지는 말에 창연은 가슴이 크게 두근거림을 느꼈다.
“남궁세가는 무너지지 않을 겁니다.”
“그래. 남궁세가는 무너지지 않는다. 우리의 싸움을 하러 가자.”
남궁인은 창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먼저 밖으로 나섰고 금세 창연이 가로질러 안내를 시작했다. 밖에는 이미 창룡대가 도열하고 있었고 창룡대주인 남궁염이 자신의 애검인 추풍검을 들고 있었다.
“갑시다. 모두가 도와주는 이 싸움에 한쪽은 막아야 우리의 면이 서지 않겠습니까?”
남궁인의 말에 창룡대는 일제히 검을 쳐들며 함성을 질렀다.
그렇게 결연한 의지로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북문으로 향했고 각 지역마다 치열한 싸움이 이어지고 있었다.
***
남궁세가의 남문(南門)
큰 규모답게 남궁세가는 정문을 제외하고도 동서남북 방위에 각각 출입문이 존재했다. 그 중 남문은 사람들의 출입이 가장 많은 곳이었고 현재 남궁세가로 지원 온 무인들의 거처가 남문과 가까웠기에 피해도 가장 컸다.
사왕련의 수라마검은 남문을 장악하고 바로 남궁세가의 빈객들이 묵고 있는 숙소를 점령했다.
사왕련의 급습으로 잠을 자다가 봉변을 당한 이들이 많았고 수많은 사람들이 머물던 곳인 만큼 수라마검과 그의 수하들의 기습에 가장 처참했다.
각 문파에서 남궁세가에 지원을 보낸 무인들은 대부분이 인사치례의 지원이었기에 강한 무인들이 없었고 수라마검을 당해낼 자는 이곳에 없었다.
그나마 팽가의 팽기찬과 무림맹에서 파견된 천무단이 버티고 있을 뿐이었다.
“비열한 사파 놈들 기습이라니... 제대로 무기를 쥐어보지 못해보고 죽어간 자들은 억울하여 어찌 눈을 감는다는 말이냐!”
팽기찬은 죽어간 이들이 안타까운 듯 수라마검을 향해 소리쳤고 그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자신의 검에 묻은 피를 무표정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수라마검의 모습에 팽기찬과 지켜보는 이들은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선전포고를 했고 그런 후라면 밤이든 낮이든 대비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니더냐?”
“그것은...”
수라마검의 차가운 목소리에 팽기찬은 답하지 못한 채 머뭇거렸다.
“도존이 있는 곳을 말해주는 자는 살려주겠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면 모르는 것으로 간주하고 모두 저기 죽은 녀석들과 같은 곳으로 보내주마.”
수라마검은 깨끗이 닦아진 자신의 애검의 검신을 달빛에 비춰보고는 검 끝을 팽기찬을 향해 겨누었다.
샤삭-
촤악-
“크헉-”
“커...헉!”
수라마검의 검이 팽가와 천무단으로 향하자 수라마검의 수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들의 검이 춤추자 살아있던 생존자들이 하나 둘씩 쓰러지고 있었다.
“모두 서로의 등을 마주대고 사각을 최대한 없애라. 자신과 동료를 지켜라!”
주변의 동료가 하나 둘 쓰러져가자 살아남은 이들은 혼란 속에 마주하기를 주저했지만 그 순간 모용연의 외침에 다들 정신을 차리고 하나로 뭉치고 있었다.
하나의 큰 원처럼 모인 생존자들은 이전에 비해 기습을 수월하게 대응하기 시작했다.
팽기찬은 모두를 살리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모용연의 지시로 천무단원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확인하곤 안심하며 수라마검 앞에 마주섰다.
팽기찬은 수라마검을 맞상대할 자신은 없었지만 현재 이곳에서 그를 상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 밖에 없었고 수라마검이 움직인다면 대살육이 벌어질 것이 명확했기에 그를 끝까지 잡아두어야 했다.
‘다른 곳의 소란을 보아하니... 여러 곳에서 동시에 공격을 해온 것인가? 그렇다면 이곳에 대한 지원이 늦거나 없을 수도 있을 터... 하지만 그래도 막아야 한다. 어린 저 아이들도 버티는데 내가 외면할 수는 없다.’
팽기찬은 수라마검과 마주하며 만감이 교차하는 듯 여러 생각이 들었다. 이미 상황이 벌어지자 아무 것도 모르고 죽은 사람도 적지 않았으나 상황을 파악하고 도주를 택한 이들도 꽤 많았다.
팽기찬도 우선은 몸을 피하려다 천무단의 어린 무인들이 당하는 것을 결국 외면하지 못하고 나선 것이었다.
“과거 팽가의 혼원벽력도법(混元霹靂刀法)을 직접 보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그대도 그것을 익혔는가?”
수라마검은 팽기찬이 팽가의 사람임을 알아보고 물었다.
“일전에 팽우산과 겨룬 적이 있었다. 그대와는 관계가 어떻게 되지?”
“분가의 사람이요. 한두 번 마주친 적이 있으나 잘 알지는 못하오.”
수라마검의 입에서 팽우산의 이름이 나오자 팽기찬은 난감한 듯 했으나 대수롭지 않다는 듯 넘겼다.
팽우산은 팽기찬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분가의 사람이었고 어릴 때부터 무공에 재능을 보여 명성을 떨쳤지만 그의 출신이 분가인 이상 팽가의 절기들을 배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팽우산은 가르쳐주지 않은 본가의 혼원벽력도법을 몇 번 지켜본 것만으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자신의 것으로 체화시켜 새로운 도법을 만들어버렸다.
팽가에서는 그런 팽우산의 존재를 못마땅해 했고 본가의 무공을 훔쳐 배웠다는 명목으로 무공을 폐하고 내쫓으려했으나 그의 아버지가 그것을 알고 팽우산을 도망가게 하였다.
팽우산은 이후 팽가의 성을 버리고 살았고 무림에서 자취를 감추었기에 팽가에서도 더 이상 그를 쫓지 않았다.
그런 팽우산의 이름이 수라마검에게서 나왔으니 팽기찬은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일평생 검의 극한(極限)을 추구하며 살아왔지만 두 명의 도객에게 감탄한 적이 있는데 그 중 한명은 흑월도존님이시고 또 한 명이 팽우산이었지. 그가 펼친 도법은 아직도 잊히지 않아 다른 팽가의 도객을 만난다면 혼원벽력도법을 다시 견식해보고 싶었다. 나에게 다시 혼원벽력도법을 보여주길 바라마.”
수라마검의 눈빛이 달라지며 검을 잡았다. 마치 한 자루의 예검과도 같은 그의 자세에 팽기찬은 숨이 막혀왔다.
‘팽우산과 수라마검이 만나 겨룬 적이 있다면 그가 펼친 것은 혼원벽력도법이 아닐 터... 난감하군.’
팽우산은 자신의 앞에서 마치 기대를 한껏 품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을 한 수라마검에게 차마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잠시의 침묵이 흐르고 수라마검이 먼저 움직였다.
촤아앙-
수라마검의 검이 그의 목을 꿰뚫을 기세로 내질러 져왔고 팽기찬은 몸을 선회하여 피하고 도를 쳐올려 수라마검의 검을 튕겨내었다.
무거운 도가 검을 튕겼음에도 수라마검은 가볍게 착지하고 다시 거리를 좁혀 검을 베어왔다.
빠른 쾌검 다음 이번엔 변검(變劍)이었다.
수라마검의 검이 마치 수십 갈래로 갈라지는 듯 한 착각마저 들 정도로 변화무쌍하게 팽기찬의 전신을 감싸왔고 빠르고 변화가 많은 수라마검의 검을 전부 막아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촤악-
“크흑...”
수라마검의 검에 팽기찬은 순식간에 전신이 피로 물들었고 급소를 최대한 피하며 공격을 쳐내고 있었으나 모든 검로를 막아내지 못한 피해를 그대로 보고 있었다.
스스스스-
팽기찬은 자신을 마치 가지고 노는 듯한 수라마검의 검에 시간을 끄는 것을 포기하고 공격에 나서기로 마음먹었다.
내력을 끌어올리자 그의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수라마검은 그가 내력을 온전히 끌어올리도록 허용해주지 않았다. 이미 팽기찬의 실력이 수라마검이 만났던 팽우산에 비해 형편없음을 알았기에 자신이 원하는 혼원벽력도법을 보여주지 못하리라 생각하고 죽이기로 마음먹은 상태였다.
수라마검의 신형이 팽기찬을 향해 쏘아져나갔다. 그 모습에 팽기찬은 온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급하게 절초를 펼쳐야했다.
“벽력단혼참(霹靂斷魂斬)!”
콰과과과광-
팽기찬의 도에 뇌전이 쏟아지는 듯했고 그의 도가 수라마검을 양단하는 듯 보였으나 도가 내려치는 순간 수라마검의 모습을 사라지고 없었다.
“내가 팽우산으로 인해 팽가에 대한 환상을 가진 것이였나보군. 너에게 더는 볼일이 없을 듯 하니 죽어라.”
그리고 그의 배후에서 수라마검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극심한 내력을 소모하고 기진한 팽기찬은 자신의 끝을 직감했다.
수라마검의 검이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귓가에 온전히 들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수라마검의 검이 팽기찬의 목을 베기 직전 무언가에 놀란 듯 수라마검은 팽기찬에게서 떨어졌고 그곳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누구... 누구냐?”
수라마검은 크게 놀란 듯 그 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으며 소리쳤고 그의 얼굴은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있었다.
팽기찬은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도 믿기지 않았는데 자신을 가지고 놀았던 수라마검이 도대체 누구를 보고 놀랐기에 저런 모습인지 궁금하여 뒤를 돌아보았다.
그의 등 뒤에는 한 사내가 서있었고 그도 잘 아는 인물이라 수라마검의 반응이 이해가 갔다.
바로 검성 나진하. 그가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