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환영신마의 제안(2)
“좋습니다. 하지만 저희 쪽 수하를 내어드릴 수는 없습니다. 괜찮으십니까?”
“내가 누군가를 데리고 일을 도모하는 사람은 아니다. 평생을 혼자 다녀왔는데 네가 수하를 붙여줘도 데려가지 않는다.”
“그럼 련주님이 복귀하기 전까지 백화문을 정리해주십시오. 이미 백화문에서도 남궁세가로 지원을 보낸 것으로 아는데 쉽게 정리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윤엽의 말에 환영신마는 쓴 웃음을 지었다.
백화문은 안휘성에서 남궁세가 다음으로 큰 문파였고 윤엽의 말처럼 남궁세가에 일부 지원을 보냈다 한들 단신으로 쓰러뜨리기엔 거대한 문파였다.
윤엽의 속셈은 환영신마가 백화문을 무림에서 지워버리든 아니든 상관이 없었다. 정확히는 못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노괴가 백화문에 어느 정도 피해만 주는데 성공한다면 남궁세가에 머물고 있는 백화문은 지원을 철수하겠지. 그 정도만 되어도 나쁠 것이 없다.’
윤엽은 어차피 환영신마의 처리를 지금 자신이 할 수가 없었기에 독고진의 복귀를 기다려야했고 환영신마가 제안한 일의 성공 실패는 중요치 않았다.
“그런데 저 자는 어떻게 합니까?”
윤엽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묵령을 가리켰고 환영신마는 그를 보고는 혀를 찼다.
“죽으면 안 되는 놈이니 치료를 좀 부탁하마. 돌아온 후 내가 처리하도록 하지.”
“바로 떠나실 겁니까?”
“백화문이 가까운 거리도 아니니 바로 가는 게 낫지 않겠나? 천천히 해도 되는 일이냐?”
“아닙니다. 빨리 처리해 줄수록 좋죠.”
“그럼 바로 떠나도록 하지. 네 주군에게는 내가 돌아오고 할 말이 있다고 전해라.”
“무슨 말입니까?”
“그건 직접 말하지.”
파밧-
환영신마의 신형은 그가 말을 마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안 그래도 어두운 지하였던지라 윤엽은 그가 사라지는 것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저 노괴가 주군에게 할 말이 무엇이지?”
윤엽은 찜찜한 기분을 털어내지 못한 채 쓰러져있던 묵령쪽으로 걸어갔다.
“죽진 않았군. 애초에 죽일 생각 없이 괴롭혔나보군.”
윤엽은 묵령의 맥을 짚어보고는 미약하지만 맥이 뛰는 것에 안심했다. 괜히 죽어있으면 어떻게 처리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라 생각했다.
“노괴가 오기 전에 정신을 차려준다면 물을 것이 많겠지.”
윤엽은 장신의 거구인 묵령을 혼자 데려갈 수 없어 사람을 불러야겠다 마음먹고 그를 놓아둔 채 사람을 부르러 나갔다.
츠츠츠-
윤엽이 사라지자 묵령의 전신에서 연무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작은 빛이 일렁이더니 그의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크흑...신마의 손속이 꽤나 매섭군. 죽을 각오를 했건만...”
놀랍게도 묵령이 멀쩡하게 일어나며 자신의 어깻죽지를 부여잡았다. 그가 잡은 어깨는 환영신마가 내력을 주입했던 곳으로 그의 묵포가 찢겨져 맨살이 드러나 있었는데 마치 불에 지진 듯한 화상에 피부가 상해있었다.
“회령단(回靈丹)의 효과로 일어나긴 했지만 날 죽이지 않았다는 게 문제군.”
묵령은 난감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묵령은 사실 사왕련에 도착한 이후 새로운 밀명을 받았다.
묵령은 흑월도존을 암살하기 위해 사왕련에 왔지만 사마령은 그에게 약선이 흑월도존을 데리고 탈출할 수 있게 도우란 밀지를 내렸다. 그러면서 환영신마가 명을 따르지 않을 테니 활불의 이름을 빌리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밀지에는 회령단이 동봉되어 있었는데 환영신마가 결국 자신이 속은 것을 안다면 너를 죽이려 들테니 회령단을 복용한 후 당해주고 몸을 숨기라는 명이었다.
사마령이 준 회령단은 불마사의 기보였는데 불마사의 지존인 활불만이 제조할 수 있었고 그 시대의 활불이 단 한번 연성할 수 있다고 알려진 단약이었다.
그것을 사마령은 묵령에게 내어준 것이었다. 회령단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묵령은 크게 감읍하며 사마령의 명을 따랐다.
하지만 문제는 환영신마가 그를 죽이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죽은 후 몸을 숨긴 채 사마령에게 돌아가려했지만 지금은 그것이 불가능했다. 이대로 사라진다면 환영신마는 의심할 테고 현재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곧 누군가 계단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리자 묵령은 다시 쓰러져있던 자리에 누웠고 일단 저들의 손에 몸을 맡긴 채 사마령과 연락을 취해야겠다고 생각했다.
***
백화문(白華門).
안휘성에서 남궁세가 다음으로 꼽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대문파로 문주인 육소군은 과거 환우십강의 일인이었던 육명우의 아들이었다.
육명우가 마교와의 일전에서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나이에 문주가 되었지만 호부호자(虎父虎子)라고 육소군 역시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백화문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백화문은 육명우가 문주일 때보다 두 배 이상 규모가 커졌고 무림에서도 인정을 받는 대문파가 되었다.
안휘성에서 점점 영향력이 떨어지고 있던 남궁세가 대신 백화문을 안휘성 제일 문파라고 꼽는 이들까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백화문이 야심한 지금 큰 위기를 맞고 있었다.
콰광-
백화문의 출입문이 박살나는 소리가 지축을 흔들었고 여기저기에서 비명이 들렸다.
“끌끌, 제법 큰 세력이라고 들었는데 형편없구나.”
환영신마는 혀를 차며 쓰러진 백화문의 무사들을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그는 당당하게 정문으로 들어와 문지기를 쓰러뜨리고 대문을 박살 낸 채 백화문주가 있다는 백화당(白華堂)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가 벌써 죽인 백화문의 무사들은 수십이 넘었고 그의 옷은 죽은 자들의 피로 인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저자를 막아라! 문주님에게 가는 것을 막아야 한다.”
어느새 새로 나타난 백화문의 무사들이 그를 포위하며 나름 검진의 모양새를 갖추면서 압박해오고 있었다.
“백화검수(白華劍秀)의 화망검진(華罔劍陳)을 보여주마.”
파바밧-
십여 명의 검수들이 환영신마를 휘감으며 재빠르게 움직이며 공격해왔다.
백화문의 창시자가 화산의 출신이라 백화문은 화산의 검과 많이 닮아있었는데 가장 뛰어난 검수들을 백화검수라 불렀고 이들이 바로 백화문의 정예였다.
“가소롭군. 이렇게 가볍디가벼운 검으로 나를 막으려 들다니.”
환영신마는 마치 애기가 재롱을 부리는 듯한 백화검수들의 움직임에 쓴웃음을 지었고 바로 행동에 들어갔다.
퍼펑-
“커헉...”
환영신마는 자신을 향해 검을 찔러오던 백화검수 한 명을 잡아채 그대로 가슴에 일장을 먹였다. 가슴이 움푹 파인 사내는 검붉은 피를 토하며 그대로 쓰러지며 숨을 거두었다.
뒤이어 환영신마는 자신의 별호답게 환영처럼 몸을 움직이며 한 명 한 명 쓰러뜨리기 시작했고 손속이 아주 잔혹하여 그가 일장 일권을 내뻗을 때마다 모두 즉사하였다.
그가 움직이고 불과 반다경(半茶頃)의 시간 만에 십여 명의 정예 무사들이 쓰러졌고 모두 죽어있었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나머지 무사들이 놀라 헐레벌떡 도망치기 시작했고, 그들이 막아서고 있던 백화당의 길이 열렸다.
백화문의 정예라고 할 수 있는 백화검수들이 너무도 손쉽게 당하자 하위 무사들은 환영신마를 막을 생각은 하지 못한 채 검까지 던져버리며 도주하였다.
환영신마는 자신을 방해하던 자들이 모두 사라지자 유유히 백화당으로 향했고 그곳은 한 무리의 무사들이 살기 넘치는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제법 기도가 있는 자들이구나?”
환영신마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자들의 기도가 이제껏 상대한 이들과 다름을 단번에 알아챘다. 특히 무리의 중앙에 서 있는 중년의 사내는 확연히 기운이 다름을 느꼈다.
“그대는 대체 누구기에 이곳, 백화문을 찾아와 이런 살육을 벌이는 것이오?”
나서서 외치는 중년인은 바로 백화문의 문주인 육소군이었다.
“이런 내가 용건을 밝히지 않았었나? 흠, 아닌데. 난 분명 문 앞에서 용건을 말하였다. 아하, 내 말을 들은 녀석들이 이미 다 죽어 너에게 전하지 못했겠구나, 하하하.”
환영신마는 너스레를 떨며 키득거렸고 그 모습에 육소군의 미간이 더욱 찌푸려졌다.
촤랑-
육소군의 뒤에 서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검을 뽑으며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듯 환영신마를 노려보았으나 육소군이 팔을 들어 그들을 제지했다.
“제법 침착한 아이구나. 네가 육소군이겠지? 한 문파의 문주의 그릇이긴 하군.”
환영신마는 육소군이 자신의 도발을 참아내며 수하들을 제지하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였다.
보통의 무림인들은 자신을 아래로 보며 이런 소리를 하면 참지 못해 먼저 달려들거나 수하들이 달려들어도 막지 않는 편인데 육소군은 환영신마의 정체를 모르는 상황에서도 수하들의 무공으론 그의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알고는 막아선 것이었다.
환영신마도 육소군과 부딪치기 전, 방해가 될 녀석들을 모두 처리하려고 도발을 한 것인데 육소군이 이를 막아서자 감탄한것이었다.
“너는 나의 이름을 알 자격이 있구나. 나는 무림에서 환영신마라고 불리고 있다.”
“화...환영신마??”
환영신마의 말에 육소군의 뒤에 서 있던 무사들이 심하게 동요했다. 그러나 육소군은 다시 한 번 팔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켰다.
“강호의 대선배시군요. 그런데 어찌하여 저희 문파에 방문하여 이처럼 잔혹함을 보이는 것인지요?”
“대선배? 크하하, 네놈 진짜 마음에 드는구나, 껄껄껄.”
육소군의 태도에 환영신마는 파안대소했고 실로 이렇게 웃어본 것도 오랜만인지라 환영신마의 웃음은 오래도록 끊이지 않았다.
“이런이런... 내가 오랜만에 마음에 꼭 드는 녀석을 만났는데 하필 내가 너의 문파를 무림에서 지워 버려야하는구나. 너는 내가 너의 문파를 없애면 날 따라오겠느냐?”
“뭐...뭣이!”
“문주님. 저 노괴를 죽여 모두의 원한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환영신마의 말에 침착하게 화를 삭이고 있는 육소군과 달리 뒤에 서 있던 수하들이 흥분하여 날뛰었다.
“흥분을 가라앉혀라. 우리가 몇 명이 덤빈다 한들 저자에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 너희들은 뒤로 물러 나거라.”
“문주님...”
육소군은 뒤돌아 모두를 바라보며 말하고는 자신은 환영신마와의 거리를 좁히며 마주섰다.
“오늘 백화문을 지워버리겠다고 오신 게 맞습니까?”
“그래. 백화문을 멸문시키러 온 것이다.”
환영신마는 당당한 육소군의 태도가 더욱 마음에 드는지 그를 마주보며 답하였다.
“그렇다면 이미 그 뜻을 이루신 것이나 다름없으십니다. 이미 백화문의 정예들과 수하들 수십이 노선배의 속에 죽었고 저까지 죽이신다면 백화문은 이 세상에 없는 것과 다름없습니다.”
“네 수하들의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냐?”
환영신마는 육소군이 하고자 하는 말뜻을 알아차린 듯 물었다.
“마주선 상대와 실력차를 모를 정도로 저는 어리석지 않습니다. 백화문의 멸문이 목적이시라면 저의 목을 취하시고 남은 이들은 살려주십시오.”
당당한 육소군의 말에 뒤에 서 있던 수하들이 검을 떨며 울부짖기 시작했고 육소군은 그들을 향해 다시 한 번 팔을 들어 행동을 저지시켰다.
“정말 아까운 녀석이군. 좋다. 네 너의 목숨만 가져가고 모두를 살려주도록 하마. 그것이면 되겠느냐?”
“물론입니다.”
환영신마가 천천히 육소군의 곁으로 다가왔다.
환영신마와 육소군의 거리가 좁혀질 때마다 백화문의 수하들은 밖으로 새어나오는 소리를 삼키며 발버둥치고 있었다.
“너는 내가 약속을 어기지 않을까 걱정되지 않느냐?”
환영신마의 손이 육소군의 목에 닿았고 그는 육소군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곧 자신의 목을 비틀 상대임에도 꼿꼿하게 서서 떨지 않는 그의 기백에 환영신마는 더욱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었다.
수없이 많은 이들을 죽여 왔지만 이렇게 주저하기는 그도 처음이었다.
“믿지 않았다면 제안을 드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마지막 남길 말은 없느냐?”
환영신마의 물음에 조금 멈칫하던 육소군은 이내 입을 열었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절대 복수를 꿈꾸지 말아라. 나의 아내와 아이를... 부탁한다. 문의 재산을 처분해 죽어간 모두의 가족들에게 공평하게 나누어주어라. 너희의 몫은 넉넉하게 챙기거라. 내가 죽고 절대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말아라... 나의 마지막 명이자 부탁이다.”
육소군의 외침에 무사들은 하나같이 피눈물을 쏟고 있었다.
“끝났습니다. 보내주십시오.”
말을 마친 육소군은 웃으며 환영신마를 향해 말했고 환영신마는 목을 잡았던 손을 풀며 그의 가슴에 가져다 대었다.
“네 시신을 온전히 저들이 가져갈 수 있도록 하마. 잘 가거라.”
퍼벙-
“크헉...”
환영신마의 일장이 육소군의 심장을 강타하며 육소군은 피를 토하며 그대로 주저앉았다.
“너희들은 시신을 거두어 주어라. 그리고 그가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을 지켜주어라.”
환영신마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쓰러진 육소군의 시신을 한번 쳐다보고는 사라졌고 그가 사라지자 백화문의 무사들이 일제히 육소군의 곁으로 다가와 대성통곡을 했다.
그렇게 백화문은 무림에서 사라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