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숨겨진 의도
월랑이라는 명호 자체도 송우기가 직접 자신을 부르는 말이었다.
그것은 도존의 상징인 달의 늑대가 되어 도존을 지키겠다는 의미였다. 그런 그의 충성심은 반역을 도모한 독고진의 세력들에겐 큰 걸림돌이었기에 미리 손을 써 사도천에 변고가 생긴 것으로 꾸며 월랑을 사도천에 복귀하도록 했고 그 바람에 유인경의 곁에 그가 없었다.
이후 월랑은 사도천에 도착하고서야 자신이 독고진에게 속았다는 것을 눈치 채고 돌아가려다 유인경이 무사히 사왕련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을 듣고 계속 그녀를 찾아다니다 이제야 만난 것이었다.
“월랑이 유 소저에게 온 것은 큰 힘이 될 겁니다. 월랑이 사도천의 후계 자리를 버렸다곤 하나 사도천에서의 영향력이 있기에 유 소저에게는 큰 힘이 되는 셈이지요.”
“그렇군요.”
천통자의 이야기에 이윤후의 얼굴이 밝아지자 천통자는 내심 속으로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유인경의 존재는 사왕련에서도 눈치를 챘을 터... 하여 그녀가 다시 전면에 나서기 전, 분명 사왕련은 그녀를 제거하려들 텐데 이 소협에게 알려야 하나.’
독고진이 도망친 유인경에게 굳이 추가로 자객을 보내지 않은 이유는 추측컨대 도존의 혈육인 유인경에 대한 미안함과 그녀가 딱히 사왕련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 유인경이 무림의 전면에 나서게 되고 그녀의 곁에 월랑이 있다면 독고진으로써는 그녀를 살려두기 힘들어 질게 분명했다.
현재는 그녀의 존재만으로도 사왕련의 존속 자체가 흔들릴 여지가 충분했다.
거기에 도존의 혈육인 그녀를 사왕련에서 직접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을 사파인들이 알게 된다면 도존을 끝까지 따랐던 추종자들에게는 독고진을 따라야하는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독고진이 흑월도존의 대제자였기에 결국 그를 따르는 것이 병상에 누운 도존을 따르는 것이라 여겼던 사파인들이 적지 않은데 그 대의 명분이 사라지는 셈이었다.
“사왕련과의 결전을 준비해야하니 천통자, 네가 남궁세가의 가주가 돌아오는 것에 맞춰서 자리를 마련하거라.”
“제가요?”
천통자는 생각에 빠졌다가 약선의 말에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제가 나서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무엇이 말이냐?”
“제가 누구인지는 여기 있는 사람들이야 알지만 다른 사람들 눈에는...”
“이미 넌 모두의 주목을 받고 있을 텐데, 이제 와서 네가 평범한 점장이라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 거 같으냐?”
“크흠...그것도 그렇군요.”
천통자는 약선의 말에 뼈아프지만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그는 남궁세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많이 회자가 되고 있었다. 남궁세가에서 각 문파의 거동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음에도 천통자만은 거리낌 없이 세가를 활보하며 돌아다녔고 약선과 이윤후가 머물고 있는 거처에도 계속 출입하고 있는 것도 그뿐이었다.
누가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은 행보였다.
“이거 천통자로 사는 것은 이번이 마지막이겠군요.”
천통자는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천통자라는 신분도 현재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비천에서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한 신분을 설정하여 그렇게 살아오는데 이번 천통자의 삶은 나름 편했기에 조금은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사왕련의 주축들이 오기 전에 검성께서 먼저 오셨으면 좋겠네요. 남궁가주도 마찬가지고.”
“아마 먼저오지 않겠느냐? 그 사람은 삼일 안에 도착할 듯 하고 남궁가주도 연이의 말을 들으니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했으니 아마 더 빨리 도착할 듯 싶구나.”
약선은 날마다 찾아오는 남궁나연과 담소를 나누다보니 남궁나연을 편하게 부르고 있었다.
남궁나연이 이곳을 찾는 큰 이유는 이윤후 때문이었지만 그래도 매번 찾아와서 약선과 담소를 나누며 상황에 대한 조언과 소소한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었다.
“도존의 이야기는 유 소저에게 전해졌나요? 도존은 어떻게 되었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윤후가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자신이 너무 오래 방에 틀어박혀있었던 지라 도존에 대해 까맣게 잊고 있었다가 불현 듯 생각이나 물은 것이었다.
“도존은 아직 정신을 차리진 못하였다.”
“도존도 사부님처럼 스스로 회복에 전념하기 위해 의식을 닫은 것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천통자의 몽환대법(夢幻大法)을 써서 깨울 수는 없습니까?”
이윤후는 지하의 석실에서 두 사람이 나눈 대화를 기억했기에 그리 물었으나 약선과 천통자가 동시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성의 경우야 자신이 불치병에 걸렸다 생각하여 몸에 이상이 없음에도 스스로 의식에 잠식되어 있었지만 도존의 경우는 다릅니다.”
“아... 만독곡의 절독(絶毒)때문이군요.”
천통자의 말에 이윤후는 그제야 알겠다는 듯 말하자 약선이 말을 이어 받았다.
“그래. 검성, 그 사람은 몸에 이상이 없었기에 몽환대법을 통해 내면의 의식을 깨우는 것으로 기나긴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지만 도존은 절독을 억제하기 위해 자신의 기운 전체를 독의 억제를 막기 위해 잠든 상태라 몽환대법으로 깨운다면 그 즉시 독이 몸 전체에 퍼질 것이다.”
“그렇군요. 도존도 대단하군요. 스스로 이겨내지 못할 독이라 판단하고 그런 조치를 한 것은요.”
“그렇지. 나도 신의께 의술을 배울 때 사례로만 본 것이었는데 직접 행하고 그것이 가능한지는 처음 알았다.”
약선도 도존의 몸 상태를 통해 깨달음을 얻은 상태였다. 그녀가 신의에게 배운 기록은 정확히 도존의 상태처럼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의 환자를 가사상태로 만들어 체내활동을 멈추면 병의 진행이나 독의 진행을 멈출 수 있다는 기록이었다.
하지만 환자를 가사상태로 만드는 것도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체내기능을 멈추게 하면 죽음이나 다름없었기에 약선은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유형의 환자를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경험하고 나니 깨닫는 것이 없을 수가 없었다.
“도존을 깨어나게 하려면 해독이 우선이라는 거군요.”
“그렇지. 하지만 쉽지는 않을 듯 하구나. 인경이에게는 미안하지만 시일을 두고 치료를 해나가야 할 듯 해.”
“네. 어쩔 수가 없으니 유 소저도 이해 할 것입니다.”
이윤후는 말을 하면서도 유인경이 도착한다면 큰 실망을 할 것이 걱정되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천통자의 말에 모두 그를 보았다. 그는 시선이 자신에게 집중되자 입을 떼었다.
“사왕련을 빠져나올 당시엔 워낙 상황이 급박하고 정신없어서 몰랐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상한 점이 한 두 군데가 아니라서요.”
“저도 그 생각은 했습니다.”
“이 소협도 느끼셨군요?”
천통자는 자신의 의문에 이윤후가 동조해주자 기쁜 듯 말을 이어나갔다.
“사왕련이 아무리 주축들 모두가 정사회담을 위해 빠져나갔다곤 하나 저희가 너무 쉽게 그곳을 빠져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물론 약선과 이 소협의 활약 덕이었지만 사왕련의 저력을 생각해본다면... 마치 우리가 탈출하기 쉽게 스스로 길을 열어준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천통자는 말을 하며 약선과 이윤후의 눈치를 살폈다.
이미 무림에선 약선과 이윤후가 사왕련을 빠져나온 활약을 칭송하고 있는데 천통자는 그것이 사왕련의 의도가 있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기에 조심스러웠다.
“눈치 볼 거 없다. 이미 나도 이상하다 여겼고 윤후와도 모이기 전에 이야기를 나눴던 부분이었다.”
“그렇습니까? 그럼... 약선께서도 짐작하고 계셨던 거군요.”
천통자는 다소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모두가 그것을 느꼈다면 문제는 사왕련이 왜 자신들의 명성에 흠집을 내면서까지 자신들을 놓아준 것 인가였다.
“약선께서 환영신마를 상대하고 이 소협이 사왕련의 주축 셋을 쓰러뜨렸지만 비천에 알아보니 회담에 따라나선 독고진과 사왕은 그렇게 큰 규모의 인원을 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련주 직속의 잠룡대주와 잠룡대 일부가 따라나섰을 뿐이죠. 그런데 우리가 그곳을 빠져나올 때 사왕련의 주축 부대의 모습들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천통자의 말이 이어지자 약선도 이윤후도 말이 없었다.
이미 두 사람은 자신들이 빠져나올 수 있었던 것이 누군가의 안배 내지는 사왕련의 계획이었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환영신마도 나와의 대결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처음엔 지하에서 싸우는지라 힘을 다 쓰지 않는 다 여겼지만 내가 그에게 마지막으로 출수한 일장을 그는 너무 쉽게 맞아준 듯 해.”
약선은 모두를 내보내고 환영신마가 이윤후와 일행을 쫓지 못하도록 시간을 끌 생각이었지만 그가 대결에서 허점을 크게 노출하면서 쓰러뜨리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다소 찝찝한 승리였지만 약선도 당시 상황에선 이상함을 느끼기엔 상황이 급박했다. 실력으로도 약선은 환영신마를 이길 자신이 있었고 그 상황이 조금 빨리 왔다고 당시엔 생각하며 이윤후와 일행에게 달려갔었다.
“소문주님...”
이윤후는 자신을 부르는 기하윤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모두 자신을 쳐다보자 시선이 부담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저희를 주시하던 자들이 있었는데,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자가 있었습니다.”
“실체를 드러내지 않았다는 게 무슨 소리지?”
이윤후는 기하윤의 능력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의 말에 별다른 의심을 하지 않았다. 약선과 천통자 또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제가 사왕련에 들어가서 느낀 시선은 둘이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지하에서 나타났던 환영신마였고 나머지 하나는 끝까지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환영신마 말고 기척을 숨긴 채 우릴 지켜 본 이가 더 있었다고?”
“네. 그자가 신마만큼 강한 인물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저희가 사왕련에 들어가자마자 기척을 숨긴 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사왕련을 떠나 남궁세가에 도착 할 때까지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약선은 기하윤의 말에 놀라 물었다. 약선도 나름 기감을 느끼는데 탁월했기에 환영신마의 존재는 처음부터 눈치 채고 있었다. 하지만 기하윤이 말하는 또 다른 시선은 느끼지 못했기에 놀라 묻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자에게서 적의(敵意)가 느껴지지 않았고 굳이 퇴로를 찾는 어려운 상황에서 저희가 먼저 도발 할 필요가 없을 듯 하여... 죄송합니다. 제가 스스로 판단했습니다.”
기하윤은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그녀에게 이윤후가 다가가 일으켜 주었다.
“나와 약선님이 다시 싸움에 휘말리는 것을 염려하여 한 행동이겠지만 다음엔 먼저 알려주도록 해.”
“네... 소문주님... 죄송합니다, 약선님.”
기하윤은 이윤후의 위로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였고 약선을 향해서도 고개를 숙였다.
“아니다. 너의 감이 그렇게 판단했다면 아마도 맞겠지. 우릴 지켜보던 이가 적의가 없었다는 말은 우리가 아무 일없이 복귀한 것만 봐도... 문제는 그가 누구이냐는 것인데...”
“약선께서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은밀한 추적술을 쓰는 자라... 생각해봐도 떠오르는 자가 없군요.”
약선의 심각한 표정에 천통자가 말을 보탰다.
‘사왕련의 인물인가? 아니면 사패 중...?’
천통자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자신의 기억을 아무리 더듬어 봐도 생각나는 이가 없었다.
“이제 곧 그자가 누구인지 알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도존을 데려가도록 안배한 이유도 알 수 있을 테고요.”
이윤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약선도 그런 그의 덤덤함에 심각한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었다.
“그래. 고민해본들 무엇을 알 수 있겠느냐. 우린 원하는 바를 이루었고 그들이 무슨 생각이든 상관없지.”
약선의 표정이 풀리자 기하윤도 그제야 걱정하던 표정이 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