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압도적 무위(武威)
결연한 표정의 혈천도객이 자신의 애도 혈루를 들어 다시 싸우겠다는 의지를 보이자 이윤후도 상월검을 잡은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이 소협. 손속에 정을 두어서는 안 됩니다. 혈천도객은 수많은 정파인을 죽인 혈귀입니다. 저희가 이곳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선 말했던 세 사람을 반드시 쓰러뜨려야 합니다.]
천통자의 전음에 이윤후는 그를 잠깐 쳐다보다 이내 혈천도객에게로 시선을 고정했다.
이윤후 역시 눈앞의 상대를 온전히 물러나게 해줄 생각은 없었다. 그렇기에 혈천도객의 자존심을 긁어 다시 도를 들게 한 것이었다.
그는 방금 전 혈천도객과의 대결에서 도객을 상대하는데 있어서 여러 가지를 살피며 공방을 주고받았다.
혈천도객은 이윤후가 전력을 다하지 않은 채 자신을 상대함을 알고 분노하여 이 후 전력을 다했음에도 이윤후가 너무나 쉽게 자신의 공격을 받아내자 의지가 꺾였던 상황이었다.
자신을 하찮듯 내려다보는 상대를 만난다면 대부분의 무인들도 그처럼 분노하여 더욱 거세게 반항하겠지만 실력 차가 압도적인 상대를 만나게 된다면 그 의지는 꺾이기 마련이었다.
지금 혈천도객에게 이윤후가 그런 존재였다. 하지만 이윤후의 도발적인 한마디에 혈천도객은 정신을 차렸고 무엇보다 많은 이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패자의 짐을 진 채 이렇게 물러설 수는 없었다.
직접 부딪쳐본 이윤후의 실력은 혈천도객이 무림출두 이후 처음 느껴보는 벽이었다.
“혈천도객 사호명. 그대에게 부탁이 있습니다.”
이윤후와 다시 마주한 혈천도객은 혈루를 앞으로 들고 포권을 하며 말했다. 갑작스런 그의 그러한 태도에 이윤후를 비롯한 지켜보는 모두가 놀라고 있었다.
사왕련 내에서도 혈천도객의 별호가 아닌 본 이름을 알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다.
지금 모여 있는 련내 사람들 대부분도 그가 자신의 이름까지 밝히며 이제 갓 스물이 지난 정파의 인물에게 저 자세로 나왔다는 사실이 보고도 믿기질 않았다.
“부탁이 무엇이죠?”
혈천도객의 저 자세로 당황한 것은 이윤후도 마찬가지였기에 조금은 놀라며 되물었다.
“그대의 스승인 검성께서는 정사파를 막론하고 상대에게 삼초식을 양보해줬다고 알고 있습니다.”
“......”
이윤후는 혈천도객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짐작했지만 설마 모두가 지켜보고 있는 이 자리에서 말할까 싶었다.
“삼초식을 양보해주십시오.”
혈천도객의 대답과 함께 지금껏 조용히 둘을 지켜보던 련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좋습니다. 사부님이 하수에게 삼초식을 양보했다는 이야기는 저도 알고 있으니 저도 그렇게 하죠.”
이윤후의 말에 혈천도객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으나 이미 굽히고 들어가기로 한 만큼 더 이상 동요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를 지켜보는 사왕련 무사들의 사기는 크게 떨어졌고 혈령대부와 암천마군의 표정 역시 분노로 구겨졌다.
“암천마군, 자네가 지켜보기에도 검성의 제자 실력이 도객이 저렇게 비굴하게 나올 정도로 강해 보이던가?”
혈령대부의 물음에 암천마군이 잠시 생각에 빠진 듯 바로 답하지 못했지만 이내 입을 열었다.
“분명 보기엔 혈천도객이 싸움을 주도하는 듯 보였으나 실상은 검성의 제자가 그의 모든 공격을 회피했었죠. 저희가 보는 것보다 직접 마주한 혈천도객의 상황을 보건데 이윤후의 강함을 느꼈을 거라 봅니다.”
“흐음...”
“혈천도객은 검성의 제자인 이윤후가 공세를 취한다면 자신이 필시 막아낼 수 없을 거로 판단하여 저렇게 굴욕적인 상황을 감수하는 듯 합니다.”
암천마군은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이게 사실이 아니라면 굳이 혈천도객이 이윤후에게 삼초를 양보해 달라고 할 리가 없었다.
그냥 말없이 자신의 절초를 펼치면 되니까 그런데 자신이 절초를 펼치기도 전에 이윤후가 공세에 나선다면 필패한다는 확신이 있으니 저런 부탁까지 하고 있다는 게 암천마군의 결론이었다.
‘암천마군이 나서겠다했지만 나도 준비를 해야겠군.’
혈령대부는 암천마군의 추론에 일리가 있다 여겼고 그와 같이 이윤후를 쳐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혈천도객은 삼초식 양보에 대한 이윤후의 허락이 떨어지자 곧바로 자신의 혈루도를 양손으로 부여잡은 채 내력을 슬슬 끌어올리고 있었다.
일합에 모든 것을 끝내려는 듯 보였다.
‘요란스럽군.’
이윤후는 혈천도객의 기수식을 바라보며 조금은 지루해짐을 느꼈다.
천통자가 사왕련의 수좌라고 말하기에 기대를 하며 나섰는데 검을 맞대본 그는 전혀 자신의 상대가 안 될 실력이었다.
혈천도객은 이윤후가 겨뤄본 빙궁의 조준혁이나 미후왕에 비하면 형편없어 보였다.
이윤후가 잠깐 딴 생각을 하는 동안 준비가 된 듯 혈천도객이 양손으로 다잡은 혈루를 상단으로 치켜들었고 이윤후도 그의 도를 받아줄 준비를 마쳤다.
혈천도객의 혈루도에서 맹렬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는데 한눈에 봐도 그의 모든 내력이 실려 있다 느껴졌다.
파밧-
한순간 혈천도객의 신형이 사라지며 이윤후와의 거리를 좁혀왔고 공격을 받아줄 생각이었던 이윤후는 피하지 않았다.
쐐액-
콰과과-
혈천도객의 전력이 담긴 혈루도는 이윤후를 향해 양단되어 왔다. 그러나 내력이 갈무리 된 듯 그의 동작은 한결 자연스러웠다.
공기를 찢을 듯한 굉음을 울리며 내려친 혈천도객의 혈루도를 피하지 않고 맞서는 이윤후의 모습에 천통자를 비롯한 일행들은 놀라 소리치려고 했으나 그것은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쩌정-
이윤후가 자신을 향해 내리쳐오는 혈루도를 향해 검이 아닌 손을 내뻗었고 그 순간 혈루도를 감싸고 몰아치던 기운이 사그라졌고 동시에 혈루도가 쪼개져버렸다.
“말도 안 되는...”
털썩-
자신의 부러진 혈루를 보고 허무한 외침을 내뱉은 혈천도객은 완전히 전의를 잃고 풀쩍 주저앉았다.
촤악-
“크헉!”
혈천도객이 주저 않자 이윤후는 곧장 검을 휘둘러 그의 목을 쳤고 혈천도객은 그대로 꼬꾸라졌다.
무림의 혈귀로 악명이 높았던 혈천도객의 죽음치고는 볼품없었으나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목이 떨어진 혈천도객을 보고도 믿지 못하고 넋이 나가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차린 듯 이윤후의 매서운 손속에 다시 한 번 경악을 해야 했다.
혹여나 이윤후가 상대에게 정을 베풀까싶어 조언했던 천통자 조차 이윤후의 단호한 행동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이윤후는 전의가 꺾인 혈천도객을 살려두면 이곳을 빠져나가는데 방해가 될 것을 알고 있었고 사정을 두지 않고 바로 손을 썼다. 그리고 혈천도객이 쓰러지자마자 자신을 향해 날아든 살기를 느끼고는 재빨리 신형을 움직였다.
쐐액-
파바박-
이윤후는 자신을 향해 날아든 암기를 피해내었고 바닥에 암기가 박히자 다시 곧바로 검을 치켜 올렸다.
채쟁-
맑은 금속성이 울렸고 암기가 날아온 방향에는 쌍검을 든 암천마군이 서 있었다.
파박-
한차례 부딪친 암천마군이 거리를 벌려 물러나자 혈령대부도 그의 대부를 들고 암천마군 옆에 섰다.
“이렇게 나오는 건가요?”
이윤후의 말에 혈령대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수하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사왕련의 수좌가 처참하게 패배하고 이어서 암습을 시도해 실패한 모습은 누가 봐도 꼴사나웠다.
“한때이긴 하나 무림의 절대자였던 검성의 제자를 대함에 소홀함이 있었던 거 같아 제대로 대접해주려는 것이니 서운해 하지 마시오.”
혈령대부는 스스로 그런 말을 하면서도 부끄러운지 얼굴이 수염으로 눈과 이마 밖에 보이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피부가 벌겋게 물들어있었다.
파박-
그러나 다행히 물러서있던 암천마군이 바닥을 박차면서 이윤후와 맞붙으면서 혈령대부는 더는 입을 떼지 않아도 되었다. 찰나의 시간이었지만 부끄러움에 붉게 물든 얼굴을 하고 있던 혈령대부는 암천마군의 적절한 대응으로 더는 변명을 하지 않아도 된 것에 안도하면서 이윤후에게 달려들었다.
촤자장- 채챙-
암천마군의 쌍검이 유려하게 움직이며 이윤후를 압박했으나 이윤후는 상월검을 들어 가볍게 공격을 막아냈다.
이윤후의 시선이 암천마군에 쏠렸을 때 혈령대부의 대부가 허공을 가르며 이윤후를 향해 내리꽂혔다.
스윽-
콰광-
암천마군의 공세를 막아내느라 이윤후의 두 손이 자유롭지 못한 상황에 혈령대부의 대부가 이윤후를 내리쳤음에도 그의 도끼는 이윤후가 아닌 잔상을 베고 바닥을 내리쳤다.
“이형환위(移形換位)?”
퍼벙-
“커흑...”
이윤후는 어느새 혈령대부의 배후로 이동해 그의 오른쪽 옆구리에 일장을 먹였고 그 충격으로 혈령대부가 바닥을 굴렀다.
스윽-
다시 한 번 이윤후의 신형이 사라지며 암천마군 앞으로 이윤후가 나타났다.
암천마군은 위기를 느끼고 쌍검을 휘둘렀지만 그가 베어낸 것 역시 또 다른 이윤후의 잔상이었다.
촤아악-
투둑-
이형환위를 펼친 이윤후의 신형이 다시 암천마군의 배후에 나타났다.
상월검을 쥔 이윤후의 손이 가볍게 일검을 휘둘렀다.
솜털처럼 가벼운 이윤후의 칼 짓 한 번에 암천마군은 단발마 비명도 내뱉지 못한 채 몸뚱이에서 목이 떨어져 나가며 바닥을 뒹굴었다.
분리된 그의 목 언저리에서부터 피분수가 뿜어져 나오 바닥을 흥건히 적셨고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엄청난 충격에 빠진 채 아무런 말조차 내뱉지 못하고 쥐죽은 듯 서있었다.
“모두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습니다. 현재 이곳에 여기 쓰러진 자들보다 강자가 없음을 알고 있으니 지금이라도 물러선다면 더는 살수를 펼치지 않겠습니다.”
이윤후의 담담한 말이 끝나자마자 입구를 막고 있던 사왕련 무사들은 허둥지둥 물러서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천통자와 은위단 그리고 철대호와 기하윤 역시 스스로 본 것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검성은 정말 엄청난 괴물을 키워내었구나... 그저 첫 제자라 그렇게 아끼는 줄 알았는데 이 일을 보지 못한 이들에게 말해줬을 때 누가 믿겠는가...?’
천통자는 자신이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을 비천에 어떻게 보고해야 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나마 이 믿을 수 없는 사건을 자신만 본 것이 아니라 보고를 하더라도 모두가 믿을 수밖에 없을 거라생각했다.
“우리는 지금 새로운 검성의 여정을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싶군.”
천통자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고 압도적인 이윤후의 무위에 감탄해 했다. 그러면서도 두려운 마음이 일었다.
일행 모두는 같은 편인 그들도 이런 기분일진데 이윤후의 말 한마디에 겁먹은 쥐새끼들 마냥 허겁지겁 물러난 사왕련의 무인들의 행동이 이해가 되고도 남았다.
“돌아오셨습니까?”
이윤후의 말에 다시 한 번 천통자와 모두가 놀라 뒤를 보았다. 그곳엔 약선이 초췌한 모습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은 환영신마와의 대결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가늠케 하듯 옷가지가 군데군데 찢어지고 초췌해 보이는 안색이었지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은 그녀가 환영신마와의 대결에서 이겼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와 있었는데 네 대결이 흥미로워 지켜보고 있었다. 검성, 그 사람이 정말 대단한 제자를 두었구나. 네 사부에게 이 일을 말해준다면 정말 기뻐할게야.”
약선의 말에 그제야 긴장이 풀어진 이윤후는 얼굴을 붉혔다.
그런 이윤후의 모습은 조금 전 그가 사왕련의 수좌 셋을 단숨에 제압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였다.
“저들이 막지 않을 듯 하니 이제 돌아가시죠.”
이윤후의 말에 약선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미 주위에는 사왕련의 무리들은 보이질 않고 입구의 커다란 출입문까지 활짝 열려있었다.
사왕련의 무리들은 검성의 제자와 일행들이 얼른 련을 떠나주기만을 바라는 마음이었는지 허겁지겁 도망치면서도 알아서 문까지 열어둔 것이었다.
“그래, 일이 너무 쉽게 풀리는 듯 하긴 하지만... 일단 떠나야겠지.”
약선은 살짝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듯 등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이내 앞 장 섰다. 그녀가 나서자 이윤후와 일행들이 뒤이어 따랐고 끝까지 숨어서 그들을 지켜보던 몇몇의 사왕련 무사들은 그들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담담한 약선과 이윤후와는 달리 천통자와 은위단의 무사들 그리고 철대호 기하윤은 떠나는 자신들을 지켜보는 사왕련의 무인들의 시선을 느끼면서 전율을 느끼고 있었다.
그들에게 포위당할 당시만 해도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사지에서 자신들을 구원해준 이윤후의 등을 바라보며 각기 다른 마음을 먹고 있었다.
‘저런 분을 모시게 되다니... 저 분이 믿고 등을 맡겨줄 수 있을 만큼 강해져야지.’
철대호는 이윤후의 호위로 온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으나 그런 마음은 접고 더욱 무공을 단련하여 이윤후에게 힘이 되고 싶은 마음이었다.
‘이제 무림은 이 소협을 중심으로 개편될 것이야. 관계를 돈독히 쌓아두어야 한다.’
천통자는 이번 일이 무림에 알려진다면 검성과 이윤후의 의천문은 지금보다 더욱 정파 무림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그들의 생각을 아는지 그저 앞서가던 이윤후가 문득 뒤를 돌아보며 천통자와 일행을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