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뒤늦은 깨달음
남궁나연은 대리가주가 된 이후 세가를 위해 자존심을 버린 채 체면을 차리지 않으리라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존심 높던 그녀에겐 지금의 하루하루가 버거웠다.
그녀는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않았던 과거를 후회됐다.
그리고 과거 약해져가는 세가와 그로 인해 늘 고민하고 노력했던 아버지를 외면했던 것을 후회했다.
“남궁소저.”
“네?”
이윤후의 부름에 자신이 깊게 생각에 빠졌었다는 걸 인지한 그녀는 놀란 눈이 되어 이윤후를 보았다.
“남궁소저가 많은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혼자 감당하지 마시고 고민은 언제든 이야기해주세요.”
“언제든지요?”
깊게 상념에 빠졌던 여인은 온데간데없고 장난기 있는 웃음을 보이는 남궁나연의 변화에 이윤후는 혀를 내둘렀다.
남궁나연은 이윤후가 자신을 위로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내색치 않으려 과장하듯 표정을 보이고는 있었지만 이윤후의 말에 큰 위로가 되긴 했다.
세가에는 현재 자신의 또래라곤 창연밖에 없었고 그의 버팀목이던 남궁인과 안명은 무림맹에 가있어 그녀는 늘 고민을 혼자서 삭히고 있었기에 말뿐이라도 이윤후의 말은 큰 위로가 되었다.
“네. 언제든지요.”
이윤후의 대답에 남궁나연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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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왕련
련주인 독고진을 비롯해 사왕과 호위부대들이 정사회담을 위해 정주로 출발하고 난 뒤 사왕련은 조용해졌다.
정사회담에 불만을 가진 사왕련 휘하의 크고 작은 문파장들의 항의도 독고진의 단호함에 결국 일축되었다.
대회의실.
넓은 대회의실에 누군가 들어섰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등에 불을 붙여 어둠을 밝혔다. 어둠을 밝힌 이는 바로 사왕련의 두뇌인 윤엽이었고 정사회담에 동행하지 않았던 그는 대회의장에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네 방으로 가도 되는데 굳이 왜 여기서 보자고 한 것이냐?”
한줄기 음성과 함께 대회의장에 홀로 있던 윤엽 앞으로 한 노인이 나타났다.
그는 환노(幻老), 환영신마였다.
“모두 부재중인 탓에 제 방에는 보고를 위해 많은 인원들이 수시로 드나들어서 여기로 모신 것이니 이해해주십시오.”
윤엽이 깍듯이 예의를 차리며 말했다.
윤엽은 환영신마가 독고진을 그늘에서 돕고 있는 인물이라 알고 있었을 때는 동료라고 생각했으나 그가 불마사의 천존이라는 것을 알고는 내심 태도를 조심하고 있었다.
“날 찾은 것을 보면 약선이 날짜를 알려온 것이더냐?”
“네, 정확히는 저희가 날짜를 정했습니다. 삼일 뒤 오전에 올 것입니다.”
“생각보다 빠르군. 아직 정사회담의 날짜는 멀었을 텐데?”
“흑월도존을 봐서 바로 치료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미리 어떤 상태인지 살펴 본 후 치료를 하고 싶다고 하여 허락했습니다.”
“그렇군. 어차피 너희가 원하는 것도 정사회담의 무산이니 미리 일이 벌어진다 해도 뭐 상관이 없겠군.”
환영신마는 돌아가는 상황이 마음에 드는 듯 기분좋은 웃음을 흘렸지만 그 웃음에 윤엽은 소름이 끼쳤다.
‘련주가 환영신마의 행동을 최대한 억제하라고 하긴 했으나... 이런 노괴를 어찌 억제한단 말인가?’
독고진은 정사회담 장소로 떠나면서 윤엽에게 환영신마에 대한 보고를 계속 하도록 했다. 특히 그가 련의 통제를 벗어난 행동을 하려할 때 막으라 했으나 현재 사왕련에는 그를 막을 자가 없었다.
“약선과 검성의 제자, 그리고 여덟 명 정도 인원이 오기로 했습니다. 약속대로 다른 이들은 죽이더라도 약선은 사로잡아야 합니다.”
“얼마 전에 도후 계집도 손쉽게 상대했는데 약선은 더 쉽지 않겠나? 걱정하지 마라. 약선이 다치는 것은 우리도 원치 않으니.”
윤엽은 환영신마의 말에 깜짝 놀랐다.
“도후를 죽였습니까?”
“죽이진 못했지만 예전에 비해 많이 약해졌더군. 몇 번 부딪쳐보더니 상대가 안 됨을 알고는 바로 내빼더군.”
환영신마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지만 듣고 있던 윤엽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오절의 명성이 과거의 이야기이긴 하나, 하나같이 최고의 무인들이었고 사파인들 에게는 경외의 대상이자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도후를 죽이지 못하고 놓쳤다면 혹시 화풍곡이 무림에 나서는 것이 아닙니까? 도후와 화풍곡이 연을 끊은 것은 이미 알려졌으나 화풍곡도 홍라염도(紅羅炎刀)의 주인인 도후가 누군가의 공격으로 죽는다면 좌시하지 않을게 분명합니다.”
“도후 그년에게 홍라염도가 없더군. 이미 홍라염도가 검성의 약혼자를 죽이면서 얻은 신장의 무기라는 것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자신이 쓰지 않는 듯 해.”
환영신마는 자신의 공격에 끝까지 맨손으로 덤비던 도후를 떠올렸고 화풍곡의 신물인 홍라염도는 이미 화풍곡이 가져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군요. 그래도 만약 도후를 건들인 것으로 화풍곡이 들고 일어난다면 저희나 그쪽 모두 난감할지도 모릅니다. 약선을 건드려 서문세가가 전면에 나서는 것만큼이나 화풍곡이 나서면 골치가 아파지니까요.”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화풍곡이 무림에 마지막으로 나선 것이 복귀하지 않은 도후를 잡기 위해 서 곡주가 직접 나선 것인데, 이후 단 한 번도 그들은 무림에 나서지 않았다.”
“어차피 그 일은 신마의 일이니 제가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무림인들은 현재 신마께서 저희 사왕련의 소속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또 생긴다면 저에게라도 귀띔을 해주십시오.”
“뭐라고?”
음성이 차갑게 가라앉은 환영신마의 대답에 윤엽은 섬뜩함을 느끼며 그를 보았다.
“신마께서... 도후를 죽이려 했지만 도후가 도주를 했다하셨는데 혹여 도후가 살아서 돌아갔다면 저희 사왕련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괜히 저희가 곤란해지니...”
“육시럴...그년이 날 이용한 것이었어.”
윤엽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환영신마는 욕을 하며 대노했다.
“그게 무슨...?”
환영신마의 행동에 의아함을 느낀 윤엽이 되물었으나 환영신마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있었고 그의 전신에서는 살기가 뿜어져 나와 더는 묻기 힘들었다.
‘노괴가 도대체 왜 저리 분노한 것인가?’
윤엽은 환영신마가 갑자기 왜 저리 대노하는지 감이 잡히지 않아 어리둥절해하며 조심히 그의 눈치를 살폈다.
“물러가라. 난 여기 조금 있다 나갈 테니.”
환영신마의 축객령(逐客令)에 윤엽은 곧바로 문을 향해 빠르게 걸어 나갔다. 그는 연신 이유를 물어볼까 하다 환영신마의 살기 가득한 모습에 이내 고개를 숙이고는 말없이 물러났다.
“어디까지 그년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것이지? 내가 도후를 일부로 쫓지 않고 죽이지 않은 것? 아니면 설마 그년은 내가 애초에 도후를 죽이지 않을 걸 알고 있었나?”
환영신마는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지존 사마령이 자신에게 활불의 명이니 하며 강제적으로 처음 맡긴 임무가 도후의 척살이었다.
그는 도후와의 대결에서 도후가 도주하는 것을 보고도 일부로 쫓지 않았다. 그리곤 도후가 도망갔다고 사마령에게 전달했고 그 후 아무런 지시를 받지 않았다.
환영신마는 처음 사마령이 활불의 이름까지 들먹이며 자신에게 임무를 맡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일부러 그녀가 준 임무를 실패하여 반응을 지켜볼 요량이었지만 도후의 척살에 대해 실패했음에도 사마령은 전혀 실패에 대한 언급도 그리고 책임도 묻지 않고 있었다.
“제길... 애초에 사마령, 그년이 날 가지고 논 것이었어. 그년은 일부로 내게 활불의 이름을 내세워 날 도발한 것이었구나... 그럼 도후는 그년이 처리한 것인가?”
환영신마는 윤엽의 말에서 사마령이 자신에게 내린 명의 본의(本意)를 파악할 수 있었다. 사마령이 그를 도후에게 보낸 것은 최종적으로 사왕련 소속인 환노가 도후를 척살했다는 사실이 필요했다는 것을...
문제는 사마령은 자신이 도후를 죽이지 않을 것까지 예상한 것 같다는 게 환영신마의 생각이었다.
“활불을 위한 뜻이겠지만 그년에게 놀아났다는 것이...”
환영신마는 그래도 사마령의 행동이 불마사와 활불을 위한 것임을 알기에 참을만했지만 그간 계속 고깝게 생각했던 사마령이 자신을 장기 말 사용하듯 이용하고 자신이 그녀의 뜻에 따라 움직였다는 사실에 화가 났다.
환영신마는 당장이라도 사마령을 찾아가 그녀를 찢어죽이고 싶은 마음이 치솟았으나 당장 여기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니 속으로 삭히고 있었다.
“주군의 뜻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죽여 버렸을 계집이었는데...”
환영신마는 과거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화를 삭였다.
검성을 포함한 정파의 상징과도 같았던 오절이 사라지고 무림은 대격변을 맞이했다. 오절이 사라지자 가장 먼저 정파는 사파들과 크고 작은 분쟁을 다시 시작했고 그 후 큰 사건이 터졌다.
바로 불마사의 무림 진출. 활불이라 불렸던 불마사의 지존은 무림을 유린했고 오절의 그늘아래 안락함을 즐겼던 정파들은 불마사의 행보에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갔다.
하지만 무림에는 태산북두(泰山北斗)가 존재했으니 소림과 무당이 누구에게도 패배할 것 같지 않았던 활불을 큰 희생을 치르고 무림에서 물러나게 만들었다.
당시 활불에게 몸을 의탁해 지내던 환영신마는 가까스로 그를 구해 서장으로 돌아오지만 불마사의 세력은 활불이 힘을 잃자 모래성처럼 흩어지고 말았다.
활불에게 구명지은(救命之恩)을 입었던 환영신마는 그를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회복 불가한 내상을 입은 활불은 차도가 보이지 않았고 죽음을 기다린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장 죽을 것 같았던 활불은 일 년 넘게 숨이 끊어지지 않았고 그것은 활불이 익힌 혈천마경의 영향이었다.
활불은 일 년이 지난 어느 날 환영신마에게 누군가를 구해 올 것을 부탁했고 그것이 바로 사마군과 사마령이었다.
진천문이 멸문하고 도망자 신세였던 두 사람은 죽기 직전 환영신마에게 발견되었다.
활불이 환영신마에게 부탁한 인물은 사마군이었다. 그래서 환영신마는 사마령은 내버려두고 사마군만 데려오려 했지만 사마군은 사마령과 함께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려 어쩔 수 없이 그는 둘 모두를 활불에게 데리고 돌아왔다.
이 후 사마군은 활불과의 만남을 통해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후대 활불이 되어 전대 활불의 뜻을 이뤄주기로 약조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죽어가던 활불은 자신의 모든 것을 사마군에게 격체전공(隔體傳功)으로 넘겨주었고 사마군은 긴 고통에서도 결국 활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사마군은 활불에게 격체전공을 받은 후 온몸이 앙상하게 말라붙었고 급속도로 노화가 온 것처럼 늙어버렸다.
사마령은 그런 사마군을 안고 울었지만 이미 격체전공 이후 자신의 상태가 그렇게 되리란 것을 전대 활불에게 들었던 사마군은 사마령을 위로하였다.
격체진공을 마친 활불은 환영신마에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세상을 떠났고 환영신마와 사마령은 새로운 활불이 나타남을 알리고 불마사는 새로운 조직을 개편했다.
활불이 된 사마군은 혈천마경을 익히기 위해 폐관에 들어갔고 불마사는 환영신마와 사마령 두 사람이 주축이 되어 수습하기 시작했다.
사마군의 폐관 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마령은 전점 불안했지만 그녀 역시 자신들을 구해준 활불의 유명(遺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고 사마군이 다시 자신의 앞에 나타날 그날을 기다렸다.
“모든 것이 활불의 생각대로 진행되고 있으니 굳이 그 계집을 건들일 필요는 없겠지... 주군의 대의가 이루어 질 날이 멀지 않았으니 그때까지는 살려두어야 해.”
환영신마는 스스로 다짐하듯 이야기하고 기분이 좋아져서는 웃음을 터뜨렸다.
“크크, 두 녀석이 지금은 자신들의 꿈에 부풀어 있겠지만 그 꿈이 얼마가지 않을 백일몽(白日夢)임을 깨닫는 날이 멀지 않았다. 그때까진 충분히 만끽하게 참아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