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이윤후의 고민
남궁세가의 영화당(暎花堂).
현재 대리가주인 그녀는 가주인 남궁인이 사용하던 창룡원이 아닌 자신의 거처 영화당에서 세가의 일들을 돌보면서 지내고 있었다.
서걱- 서걱
그곳에서 창연은 벼루에 물을 넣은 후 먹을 갈고 있었고 남궁나연은 서찰을 쓰려는 듯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담공자는 아직도 방에서 나오지 않는 거야?”
“네. 이 소협에게 그렇게 완패당한 것이 꽤나 충격이 큰 듯합니다. 대결 이후론 전혀 밖으로 나오지 않고 있고 담공자의 숙부만이 수시로 거처를 드나들고 있다고 합니다.”
창연이 먹을 다 갈고 옆으로 물러나자 남궁나연은 붓을 들어 서찰을 적기 시작했다.
“담공자가 그렇게 되고 마을에 조금은 신경 쓰이는 소문이 돌고 있습니다.”
창연은 서찰을 쓰고 있는 남궁나연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레 이야기했다.
“소문? 무엇이지?”
붓을 멈추지 않고 남궁나연이 물었다.
“이 소협이 의도한 행동은 아니었겠지만 담공자와의 비무에서 사람들이 보기엔 이 소협이 담공자에게 엄청난 수모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기에 그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습니다.”
창연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남궁나연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녀가 보기에도 비무에서 이윤후가 담공자에게 벌인 일은 과해보였다.
물론 그녀는 이윤후가 일부러 담석영에게 수모를 주기 위해서 그런 일을 벌이진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비무를 하는 동안 이윤후는 초반 담석영의 검을 내내 흘리기만 하다가 그의 마지막 혼신의 일검을 너무도 손쉽게 파훼해버렸다.
이윤후의 그런 행위는 남들이 보기엔 그저 이윤후가 담석영을 철저히 가지고 논 비무로 보였을 것이다.
“소문이 퍼진다 한들 이 소협에게는 딱히 영향은 없을 거야. 그저 흠집 내기 좋아하는 자들이 소문을 부풀리고 와전하겠지만... 결국 잠잠해지겠지.”
남궁나연은 그런 소문은 쉽게 퍼질 거라 생각했다. 이윤후는 현재 무림의 모든 이가 주목하는 존재였고 그를 시기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오절의 검성의 제자. 세력도 갖지 않고 제자도 두지 않았던 검성이 선택한 이윤후는 모두의 관심의 대상이자 질투의 대상인 것이었다.
가뜩이나 검성이 만든 의천문에 많은 문파들의 사절이 문전박대 당하면서 불만들이 터져 나오는 시점이라 사람들은 검성을 흠집 내기보다는 그의 제자인 이윤후를 흠집 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좋은 빌미를 준 셈이었다.
“중요한 시기이니 만큼 이 소협을 대놓고 흠집 내고자 하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소문을 주시하도록 해. 누가 소문의 중심에 있는지도 말이야.”
“네. 알겠습니다.”
“이건 아버지에게 보내줘. 여전히 이쪽에 대한 걱정이 많으신 듯 하니 걱정을 조금 덜어들어야 할 텐데...”
남궁나연은 서찰을 창연에게 건넸다.
“가주님도 아가씨를 믿고 계실 겁니다. 그저 먼 곳에 계시고 상황이 상황인 만큼 걱정이 많으실 수밖에 없으시겠죠.”
“그래, 아버지는 늘 날 믿어주셨지. 이제는 아버지의 믿음에 보답을 할 때이고 말이야.”
남궁나연의 말에 창연은 남궁나연이 정말 많이 변했다고 새삼 다시 느꼈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남궁인의 배려 속에 다소 제멋대로의 성격으로 자랐고 철이 없어서 늘 세가의 어른들에게는 골칫덩어리로 취급받던 남궁나연이었다.
하지만 세가의 위기 속에 남궁나연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듯 세가의 어려움을 잘 풀어가고 있었고 지금은 세가의 장로들조차 남궁나연을 믿고 지켜보고 있었다.
창연은 받아든 서찰을 챙기고는 영화당을 나섰고 창연이 나서고 얼마 후 이윤후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쪽으로 앉아요.”
이윤후가 들어오자 남궁나연의 얼굴에 미소가 그려졌다.
“안 그래도 이소협과 이야기를 나눴으면 했는데 먼저 연락이 와서 다행이에요.”
남궁나연은 한쪽의 작은 탁자로 이윤후를 안내해 앉히고 자신도 맞은편에 앉았다.
이윤후가 영화당에 들어선 것을 알았는지 곧장 시비가 차를 내와서는 탁자에 올려두곤 말없이 방을 나갔다.
“손님들이 왔다고 들었는데 사왕련에 동행 할 일행이었나요?”
담석영과 비무 이후로 이윤후를 계속 보지 못했기에 그녀는 이윤후가 차를 들기도 전에 궁금한 것들을 물었다.
“네. 사부님께서 보내주신 사람들이었어요. 그리고 어제 도착한 이들은 서문세가의 사람들로 동행할 예정이고요.”
이윤후는 천통자가 동행을 요청한 비천의 은위단을 서문세가의 사람으로 이야기 한 채 남궁세가로 들인 상황이었다.
“아, 그렇군요. 그래도 인원이 너무 적은 거 아닌가요? 아무리 치료를 위한 방문이지만 적진 한가운데로 가는 건데 너무 적은 인원이 가는 게 아닌가 싶네요.”
남궁나연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고 그런 그녀의 표정이 귀여웠던 이윤후는 웃음을 보였다.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사왕련이 아무렴 약선과 저를 겁박하려 들까봐서요.”
“그렇긴 하지만...”
남궁나연도 이미 사왕련의 련주인 독고진과 사왕은 모두 정사회담 장소인 정주의 화경부로 떠난 사실을 알고 있었다.
사왕련에 약선을 상대할 만한 고수가 없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위험한 건 매한가지였기에 걱정스러운 표정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아, 그건 그렇고 저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셨죠?”
“네. 약선 어르신께서 사왕련과 이야기를 마쳐서 삼일 뒤 사왕련으로 갈 듯 합니다. 얘기를 드려야 할 거 같아서 만나기를 청했습니다.”
“그렇군요. 아직 정사회담 기일이 좀 남지 않았나요? 먼저 치료를 하면 저들이 말을 바꾸지 않을까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치료라는 게 쉽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단 흑월도존의 상태를 먼저 확인해야 하니까요. 어쩌면 긴 시간 치료를 해야 할 수도 있으니 미리 가서 상태를 보는 게 좋다고 약선 어르신이 말씀 하셔서요.”
“아! 그러네요. 그래도 좀 걱정스럽네요. 저들이 말을 바꾸지 않을까...”
남궁나연은 남궁세가의 명운이 걸린 일이다 보니 자꾸 안 좋은 쪽으로만 생각이 미치고 있었다. 혹시나 약선이 흑월도존의 병을 고치지 못해서 그들이 말을 뒤집을 수도 있을 것이고 혹여나 고치면 고쳤으니 회담을 뒤집을 수도 있다 생각했다.
그런 남궁나연의 고민을 이윤후도 알았다.
“그들이 그렇게 나오지 않을 거라 생각하지만, 혹여나 이번 일이 잘못 된다하더라도 사부님과 저는 남궁세가를 도울 것입니다. 사부님께서 남궁세가의 가주님과 약속을 하셨다고 했고 비월검공과의 인연도 깊으니 남궁세가의 어려움을 좌시하지 않을 겁니다.”
이윤후의 말에 잠깐 걱정에 빠졌던 남궁나연은 금세 배시시 웃었다.
‘아름다운 여인이다. 하지만...’
이윤후는 남궁세가로 와서 달라진 남궁나연을 겪으면서 그녀가 참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인이라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에게 끌릴수록 유인경에 대한 생각도 나서 이윤후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유인경과 서로 확실히 마음을 확인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의 호감을 알고 있었고 이윤후 역시 그녀에 대한 마음이 있었다.
수련동에서 수련을 하면서도 가끔 생각났었고 빙궁에 가서 다시 만났을 때 확실히 자신의 마음을 깨닫고 모든 것이 끝이 난 후 고백을 하겠다고 마음도 먹었다.
그러나 남궁세가로 와서 남궁나연을 보고 유인경과 다른 여성의 매력을 느꼈을 때 마음이 흔들렸다. 결국 고민하다 약선에게 고민을 털어놓았고 약선은 웃으며 이렇게 말해주었다.
[네 마음이 가고 싶은 대로 하렴. 나는 너의 짝이 인경이라도 좋고 남궁가의 여식이라도 괜찮다. 네 사부도 아마 같은 생각일 것이야. 하지만 너의 입장을 확실히 해야 한다. 만약 인경이든 남궁가의 여식이든 네가 정확히 마음의 결정을 못하고 여지를 남겨둔 채 두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준다면 결국 너에게도 좋지 않을 것이야. 네 사부는 한 사람을 연모하여 그 사람이 죽고 난 후 아무에게도 여지를 주지 않아 여인들의 원망을 받았다. 그러나 나는 네가 많은 여인을 만나보고 네 짝을 결정했으면 좋겠구나.]
약선의 말에 이윤후는 느끼는 것이 많았다. 무림의 위기랄 수 있는 상황에서 약선에게 자신의 감정에 대한 이야기를 물은 것이 부끄러웠다.
“무슨 일 있으신가요?”
남궁나연은 이윤후가 자신을 바라본 채 말이 없자 조금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물었다.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빈객들이 묵는 숙소에 사람이 꽤나 많이 찬 듯싶던데요? 누가 또 왔습니까?”
이윤후는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이윤후를 비롯해 약선과 일행들은 남궁세가의 배려로 현재 빈객들이 쓰는 숙소가 아닌 세가의 중요 손님을 대접하는 본당으로 숙소를 옮긴 상황이었다.
“팽가와 담가에서 먼저 도착 한 이후에 여러 곳의 지원이 온 상황이에요. 무림맹에서의 회의도 잘 마무리되어 많은 문파들에서도 직접적인 도움은 아니더라도 여러 방면에서 지원을 해주고 있답니다.”
특히 담가는 남궁세가가 세가연합회의 탈퇴를 약속하면서 자신의 세력들과 자신들의 뜻에 찬동하며 남궁세가의 지원을 반대하고 있던 세력들을 모두 이끌고 찾아왔다.
또한 무림맹의 지원결정이 난 후 남궁세가로 향한 문파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검성의 제자 이윤후가 남궁세가 있다는 것이 소문나면서 검성과 그의 제자와 연을 맺기 위해 오는 문파의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속이 훤히 보이는 지원들이었지만 남궁세가는 그것을 가려 받을 만큼 상황이 좋지 못했다. 이미 사왕련과 크고 작은 부딪침 속에 남궁세가의 피해는 알려진 것보다 컸고 오대세가의 수좌(首座)이면서 세력이 왕성할 때는 수십 수백에 달했던 빈객(賓客)들이 한명도 없는 것만 봐도 현 남궁세가가 얼마나 어려운 시기인지를 알 수 있었다.
“그렇군요. 세가의 분위기가 많이 바뀐 듯싶습니다. 세가 사람들의 표정도 밝아진 듯 하고...”
“네. 독고진이 사왕련으로 이름을 바꾼 뒤 일대를 자신의 영역으로 선언하고 저희를 압박해왔을 때 가장 먼저 세가의 빈객들이 핑계를 대면서 하나 둘 떠나갔었죠. 그리고 세가의 식솔들까지도 떠나기 시작했고...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모두 나아졌어요. 이 소협이 오면서 많은 곳이 지원을 보내주고 있고 떠나갔던 빈객들도 다시 돌아오고 있어요.”
남궁나연은 말하면서도 씁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남궁소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거 같군.’
이윤후는 남궁나연의 씁쓸한 표정을 보고도 특별히 이유를 묻지 않았다.
‘현재 남궁세가를 돕겠다고 온 자들 중에는 예전 남궁세가에 신세를 지던 빈객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니 결국 어쩔 수 없이 받은 모양이군.’
이윤후도 남궁세가의 본당에서 지내고 있다 보니 남궁세가의 식솔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거의 천통자가 듣고 온 말해준 이야기를 듣는 거였지만.
남궁세가의 위험에 가장 먼저 떠났던 빈객들이 남궁세가로 속속들이 돌아오고 있음은 현재 남궁세가 식솔들에게도 많은 이야깃거리가 되고 있었다.
그 중 천우도객(天宇刀客)이란 인물이 가장 입방아에 오르고 있었는데 빈객들 중 가장 오래 머물고 남궁세가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던 인물인데 가장 먼저 핑계를 대고 도망갔다가 또 가장 먼저 돌아와 남궁세가의 모든 이들에게 비난을 받고 있는 인물이었다.
남궁나연도 그런 그를 다시 빈객으로 맞이하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지만 대리가주로서 세가를 위해서 다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천우도객이 강서에서 가장 큰 규모인 천강문 주의 동생이라는 것도 그를 쉽게 문전박대하기 어렵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