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차력(借力)(2)
“광풍파천이 이렇게 파훼되다니...”
주저앉은 담석영은 넋이 나간 듯 중얼거렸다. 그의 모습에 이윤후는 조금 미안한 듯 다가가려했으나 참아야했다.
이윤후도 사실 이렇게 잘 막아질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었다.
검성이 매번 자신이 펼친 비뢰검결의 초식을 한손으로 간단하게 막아내는 모습이 기억나서 자신도 그렇게 막아낼 수 있을까 불현 듯 생각나서 해본 것이었는데 간단히 되어 이윤후 자신도 놀랐다.
막아낸 방법은 만상오행(萬象五行)의 차력(借力)의 응용이었는데 매번 쉽게 막아내는 검성에게 그 방법을 물어보고 알고만 있었지 직접 써본 것은 지금이 처음이었다.
[꽤나 충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구나, 너도.]
귓가에 들리는 전음 소리에 이윤후는 약선을 보았다.
[여기 있는 모두가 오늘 확실히 알았을 게다. 검성의 제자의 무위를 말이다.]
약선의 말에 이윤후는 미소를 지었다. 검성은 칭찬에 인색했는데 약선은 그럴 때마다 이윤후를 칭찬하고 성과를 평가해주었는데 그것이 참 좋았던 이윤후였다.
그리고 오랜만에 다시금 약선의 칭찬을 듣자 기분이 좋아진 이윤후였다.
“어험... 비무의 승자는 검성의 제자인 이윤후 소협입니다!”
이윤후의 무위에 놀랐던 것은 남궁염도 마찬가지였기에 감탄 한 채 굳어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서야 앞으로 나서면서 승리를 선언했다.
둥둥둥-
승리선언과 북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다들 정신을 차린 채 함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뇌절검룡!”
“뇌절검룡!”
저마다 이윤후의 명호를 소리치며 불렀고 그의 무위를 본 사람들은 이걸 못 본 사람들에게 말하면 믿어 줄 가 생각까지 들었다.
“미련한 놈.”
넋이 나간 채 주저앉았던 담석영을 담영성이 어느새 내려와 부축했고 그제야 정신이 돌아온 담석영은 눈물을 흘렸다.
“숙부님... 죄송합니다. 제가 가문의 이름을 더럽혔습니다...”
담석영이 목 놓아 울자 담영성은 그를 담담하게 토닥여주었다.
“아니다. 너는 물론이고 내가 나선다고 한들 이기지 못했을 상대다. 이 비무를 밑거름 삼아 정진하여라.”
“숙부님...”
크게 혼날 거라 예상했던 담석영은 예상치 못한 위로에 더욱 크게 울음이 터졌고 소리를 내지 않으려 속으로 삼켰지만 그의 큰 눈에선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이윤후는 담석영에게 다가가려했지만 남궁염이 그를 막아섰다.
“지금은 말을 건네지 마십시오. 다음에... 하시지요.”
남궁염은 무인으로서 이런 패배를 당하고 그 상대에게 위로 받는 것이 좋지 않음이 알았기에 이윤후를 말렸다.
이윤후에게 악의가 없었겠지만 이런 패배는 담석영에게 큰 치욕이었기에 지금은 자리를 피해주는 게 맞다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이윤후는 약선과 남궁나연이 있는 자리를 향해 갔고 남궁나연은 기다리지 못하고 마중을 나섰다.
“대단하네요. 미후왕과의 대결에서도 놀랐지만 오늘은 또 한 번 놀라게 만드는군요.”
남궁나연은 진심으로 감탄하며 이윤후를 향해 칭찬을 했다. 그런 그녀의 칭찬도 좋았지만 이윤후는 약선의 칭찬을 듣고 싶었기에 약선의 말을 기다렸다.
“그 사람이 너를 아끼는 것은 그저 첫 제자라서 마음이 쓰여서 그런 거라 여겼는데 오늘 보니 확실히 알겠구나. 그 사람이 제자를 그토록 아꼈던 이유를 말이야.”
“괜찮았습니까?”
“그래. 처음에 상대의 공격을 적절히 흘리며 상대한 것도 좋았고 힘을 아낀 채 상대한 점도 좋았다. 어떤 자들은 전력을 다해 상대하는 것이 좋다고 하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상대와 나의 차이를 인지하고 적절하게 힘을 배분하는 것이 더 어렵고 중요하지.”
“예전 말씀해주셨던 걸 기억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힘을 아끼고 배분하라는.”
“그래. 지금이야 괜찮지만 실전에선 간악하고 교활한 자들이 많기에 상대의 힘을 빼놓고 나중을 노릴 수도 있기에 힘의 배분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늘 잊지 말고 명심하도록 해라.”
약선은 이윤후가 자신의 말을 기억하고 행하고 있다는 말이 기분 좋아 미소를 거둘 수가 없었다.
‘나도 진짜 제자를 구해야겠구나. 그 사람의 제자라도 이렇게 좋은걸...’
약선은 이윤후를 너무 예뻐하고 자랑하는 검성을 매번 타박했는데 이젠 정말 자신도 제자를 두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담공자가 꽤 충격이 큰 듯 하네요.”
남궁나연은 부축을 받아 자리를 옮기는 담석영을 보고는 말했다.
“지켜 본 사람들도 놀랐는데 당사자는 더욱 충격이 심할 수밖에 없죠.”
남궁나연의 말을 받은 이는 어느새 다가온 팽기찬이었다.
“이윤후라고 합니다. 팽대협을 이렇게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윤후가 팽기찬을 알아보고 바로 포권하여 예를 취했고 팽기찬도 같이 예를 취했다.
“대협이라니 과분하군요. 남궁세가로 오는 길에 번개를 가르고 미후왕을 길들였다는 뇌절검룡의 소문을 듣고 살이 많이 붙은 소문이라 생각했는데 직접 보니 오히려 축소된 게 아닌가 싶군요.”
팽기찬은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는 남궁세가를 돕기 위해 먼저 출발한 선발대의 역할이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지금은 오히려 자신이 선발대로 와서 다행이라 여겼다.
팽가에서도 검성이 문파를 만들자 장로급 인원들이 직접 방문했음에도 검성을 만나지 못했는데 이렇게 검성의 제자와 미리 안면을 트는 것은 좋을 수밖에 없었다.
이미 팽가에서도 검성의 제자가 남궁세가에 와있음을 알고 팽기찬에게 친분을 만들어 놓으라고 지시가 온 상황이었고 이윤후의 존재를 알고 남궁세가의 도움에 인색했던 문파들까지 부랴부랴 남궁세가에 지원을 보내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만큼 현 무림은 검성과 검성의 제자인 이윤후와 관계를 터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마지막에 담공자의 무공을 막아낸 수법이 무엇이죠?”
“그건 나도 궁금하군. 손동작에 딱히 힘이 실려 있다고 느끼진 못했는데 강맹했던 기운이 마치 빨려 들어가듯 그냥 사라져버린 것이...”
남궁나연의 물음에 팽기찬도 말을 보태었다.
“상세하게 말씀 드리긴 어렵지만 사부님이 보여주셨던 것을 따라해 본 겁니다.”
“배운 것이 아니라 따라한 것이라고?”
이윤후의 대답에 팽기찬은 더욱 놀랐다. 사실 자신이 보기에도 특별한 식(式)이 있어 보이지 않았기에 초식으로 보이진 않았지만 그저 본 것을 따라한 것이라는 이윤후의 대답은 예상 밖이었다.
“사부님이 쓰실 때는 조금 더 작은 손짓만으로도 제 공격을 모두 막아내셨는데 저는 그렇게 쉽게는 되지 않네요.”
이윤후는 담석영의 검기를 막아내었던 자세를 다시 보이며 설명했는데 남궁나연과 팽기찬은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검성이 이윤후의 공격을 막아내었던 손짓은 만상오행공의 오행상생(五行上生)을 이용한 차력의 응용이었다.
처음 이윤후는 검성이 오행상극(五行相剋)의 차력으로 자신의 공격을 쉽게 받아낸다고 생각했지만 그 반대였고 검성이 수련을 봐주기 위해 수련 동에 올 때마다 유심히 관찰했었다.
만상오행공을 익히고 있었던 이윤후였기에 검성의 움직임을 몇 번 보고는 원리를 파악해놓고 있었다.
“검성께서 다시 무림에 나서주신 것도 무림의 경사인데 이렇게 대단한 제자까지 키워내 주셨으니 더 큰 경사라고 할 수밖에 없군요.”
팽기찬은 이윤후와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었지만 남궁나연과 약선의 눈치가 보여 더는 이윤후를 잡아두지 못했다.
“천통자는 늦게나 도착할거 같다고 하니 방에 돌아가 좀 쉬려무나.”
약선은 팽기찬이 이윤후를 계속 물고 늘어지자 가로 막으며 이윤후를 잡아끌었다.
“네, 그래야겠어요. 팽대협 저는 이만 할 일이 있어 다음에 뵙겠습니다.”
약선의 채근에 이윤후는 자신을 보며 입맛을 다시는 팽기찬을 향해 인사를 하곤 약선의 손에 이끌려 거처로 향했다.
“이런... 검성께서 제자를 끔찍하게 아낀다고 제자를 위해 문파까지 만들었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세력과 무관하셨던 분이 설마 제자를 위해 그렇게까지 하셨겠어?라고 생각했는데 이 소협을 직접보고 나니 저 같아도 저런 제자가 있다면 세상에 자랑을 하고 싶어서라도 무림에 내놓겠군요.”
팽기찬은 사라져가는 이윤후를 바라보며 계속 아쉬운지 말했다.
“그런 소문이 있나요?”
남궁나연은 팽기찬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저도 소문이라 온전히 믿지는 않지만 그렇게 말하는 이가 적지 않더군요. 검성이 이제 와서 무림의 패권에 욕심이 났을 리는 만무하고 소문이 맞지 않나 싶군요.”
“이 소협은 원치 않더라도 무림의 중심에 설 수밖에 없게 되겠네요.”
“그렇게 되겠죠. 이소협의 소문이 퍼지고 남궁세가로 가고 있던 저에게 세가에서도 어떻게든 연줄을 만들어 놓으라고 할 정도인데 다른 문파들은 사활을 걸고 검성과 이소협과 연을 만들기 위해 움직이겠죠.”
“......”
팽기찬의 말에 남궁나연은 이윤후가 원치 않은 일에 휘말릴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되어 걱정이 되었다.
“정사회담의 결과와 상관없이 이제 정파는 검성의 행보에 따라 희비가 달라질 겁니다. 남궁세가에 모질게 들릴지 모르지만 현재 갑자기 남궁세가를 돕겠다고 태도를 바꾼 문파들 대부분은 그냥 남궁세가를 돕고자 하는게 아니라 정확히는 검성이 돕고 있는 남궁세가를 돕고자하는 문파들이니까요.”
“예상하고 있었지만 남에게 들으니 마음 아픈 이야기네요.”
남궁나연은 팽기찬이 말하는 바를 잘 알고 있었다. 팽가는 이미 이윤후가 도착하기 전에 지원을 해준 곳이었다.
하지만 검성이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무림맹의 맹주였던 비월검공과의 인연으로 인해 정사회담에도 적극적으로 나서고 제자인 이윤후를 남궁세가로 보낸 것이라 소문이 나자 남궁세가의 지원에 인색했던 문파들이 부랴부랴 남궁세가로 지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남궁세가로서는 뻔히 속이 보이는 행동이라 말들이 내부적으로 많았지만 그런 것들을 신경 쓸 만큼 남궁세가의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모른 척 하고 있었다.
“아마 그들은 정사회담이 성공적으로 끝이 날거라 보고 남궁세가를 지원하는 모양새를 보이는 문파도 많겠죠.”
“그럴 겁니다. 검성이 나섰고 약선이 흑월도존을 치료해주기로 한 이상 사왕련이 이 일을 더 키우기엔 부담스러울 테니까요.”
“하지만 사왕련의 련주인 독고진이 정파에 원한이 깊은 자라고 알고 있어요. 자신의 스승까지 져버리고 벌인 일을 그냥 접어 두진 않을 거라 생각이 드네요.”
남궁나연의 대답은 사실 남궁세가의 회의에서 나왔던 이야기였다. 남궁나연도 상황이 좋게 풀려가자 정사회담이 성공적으로 끝이 나고 약선이 흑월도존을 치료한다면 큰 부딪침 없이 끝이 나지 않을까라는 순진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세가회의에서 독고진에 대한 이야기와 사파들의 상황을 듣고 자신이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음을 알았다.
“현재 정파인들이 상황을 너무 긍정적으로 보는 감이 있기는 하죠. 그들이 정사회담을 수락한 저의(底意)를 판단해야겠죠.
현재 사왕련은 련주 독고진으로 인해 흑월도존 시절의 사파일통과는 다른 상황이라 아마 그들이 이번 정파의 정사회담을 수락한 이유는 무림맹에서 제시한 흑월도존을 약선이 치료해준다는 것. 그것을 사왕련에서도 거부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팽가에서는 현 상황을 정확히 보고 계셨군요. 그런데도 이렇게 지원을 해줘서 크게 감사를 드립니다.”
남궁나연은 다들 남궁세가의 지원에 인색했을 때 가장 먼저 지원 결정을 해준 팽가의 결정을 알았기에 감사의 말을 건네었다.
“저희 형님께서 남궁세가의 세가연합회 탈퇴의사를 듣고 조금 걱정하셨습니다. 모든 일은 지금의 상황이 마무리되고 난 후 논의하자고 하시더군요.”
남궁나연은 아버지인 남궁인을 비롯해 세가 장로 및 어른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했고 바로 오대세가에 통보를 한 상태였다.
“남궁세가는 이미 모든 것을 결정했습니다. 현재 남궁세가는 다시 예전의 명성을 찾기 위해 노력할겁니다. 그 시작이 세가연합회의 탈퇴라고 생각해주시고 응원해달라고 전해주십시오.”
남궁나연의 단호한 말에 팽기찬은 조금 놀랐다. 남궁나연은 말을 마치곤 찾아온 창연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팽기찬에게 양해를 구하고 물러났다.
“세간의 평가와는 전혀 다르군. 남궁세가에 여장부가 있었어.”
팽기찬도 이윤후와 남궁나연이 다 물러나자 자신도 거처로 돌아가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