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화― 약선의 방문(1)
“너 기분 좋은 일이 있나보다?”
“저요? 갑자기 무슨 말이십니까?”
검성의 물음에 천통자는 화들짝 놀라 자신의 턱수염을 매만졌다.
‘이런 나도 모르게 웃은 건가?’
천통자는 차가운 검성의 태도가 결국 이윤후를 설득하면 돌아설 것을 상상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그것을 본 검성이 물은 것이었다.
‘윤후를 설득하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검성은 자신의 눈을 피한 채 멋쩍은 웃음을 짓는 천통자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검성은 이미 문파를 만들었을 때부터 무림에 나설 생각을 마친 상태였다.
그저 비천이나 소림과 무당이 원하는 그림대로 움직여주기 싫은 것 뿐.
“자네 윤후에게 가줄 수 있는가?”
“이 소협에게요? 무슨 전할 이야기나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검성의 입에서 이윤후의 이야기가 나오자 천통자가 놀라 물었다.
“정사회담은 나와 현재 무림맹의 맹주를 비롯하여 몇 명이 참석을 하게 될 거야. 그들이 정사회담에 무슨 일을 꾸민다 한들 내가 막아줄 수가 있지. 하지만 윤후와 애령이 가게 될 사왕련은 위험할 수가 있을 거 같아서 말이지.”
“설마 저들이 약선에게 위협을 가할까요? 다른 일도 아니고 흑월도존의 치료를 위해 방문하는 것인데요?”
“현재 사왕련의 주축은 흑월도존 체제 아래 불만을 품은 자들로 알고 있는데 아닌가?”
“그렇죠. 그래도... 그들이 약선을 건드리는 것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약선의 강함은 잘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검성과 버금간다고 평가를 받던 강자가 아닙니까? 그리고 약선은 서문세가의 사람입니다. 현재 서문세가주인 서문환이 얼마나 자신의 누이를 아끼는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습니다. 사왕련이 혹시라도 약선에게 해를 끼친다면 서문세가의 진면목을 볼 수 있을 지도요.”
천통자는 말하면서 잠깐 사왕련이 약선을 해하려 드는 것도 괜찮겠는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생각을 털어버렸다.
“그래, 약선이라면 현 무림에 누구와 싸워도 지지 않을 실력자지. 지금 겨루어보진 않았으나 신투보다도 애령이 강할 것이니 말이야. 하지만 적진 한가운데 들어가야 하고 윤후를 같이 보낸 것도 마음에 걸려. 두 사람 다 무공의 강함은 어떨지 몰라도 다른 면에서는 걱정이 되어서 말이야.”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제가 그럼 같이 동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천통자는 검성의 말뜻을 이해했다. 검성은 두 사람이 혹시나 책략에 휘말릴 가 걱정을 하는 것이었고 이미 호위를 두 사람 보냈지만 무림에서 잔뼈가 굵은 천통자까지 동행하길 원했다.
“그리고 네가 없는 동안 비천과 연락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 붙여주고 가도록 해.”
“네. 본회에 보고해 놓겠습니다.”
천통자는 검성의 부탁에 잽싸게 답하고 예를 취한 후 방을 나섰다. 한시라도 빨리 출발해 이윤후와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이 기회에 이 소협을 설득해서 이번 일을 해결하도록 설득해야지.’
생각만 해도 좋은지 천통자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
남궁세가의 화원(花園).
남궁세가의 안주인이자 현재 대리 가주 노릇을 하고 있는 남궁나연이 연화당 앞에 섰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전에 꽃을 좋아했다. 하여 남편인 남궁인은 그녀의 거처였던 연화당에 화원을 조성해주었다.
어머니의 영향 덕에 남궁나연도 꽃을 좋아했고 그녀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이곳을 가꾸는 것은 남궁나연의 몫이 되었다.
어린나이에 어머니를 잃었던 남궁나연은 어머니가 생각난다고 처음엔 화원을 찾지 않았으나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녀는 어머니가 생전에 가꾸었던 꽃과 나무가 죽어가는 것을 더는 지켜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름다운 곳이군요.”
화원을 거닐던 이윤후는 사방에서 피어나는 꽃 냄새에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워낙 어린나이부터 글공부를 했고 이후 검성을 만나 무공수련만 하느라 이렇게 본격적으로 조성된 화원을 보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다른 세가들에 비하면 작은 규모지만 어머니가 좋아했고 제가 좋아하는 곳이에요.”
남궁나연은 이윤후의 말이 빈말이 아님을 느꼈기에 미소를 지으면 답했다.
“이게 작은 규모라고요?”
“다른 오대세가나 세력이 좀 있는 장원의 화원은 거의 이것보다 몇 배는 더 크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어요.”
“그렇군요. 저희 어머니도 꽃과 나무를 좋아하시긴 했지만 이렇게 큰 화원은 처음이라 저는...”
이윤후는 잠시 어머니의 생각이 났다. 대학자인 아버지에게 시집와서는 청렴한 아버지의 아내로 살았기에 사치스런 생활은 하지 않았던 어머니였기에 이런 화원은 꿈도 꾸지 못했을 터였다.
“그러고 보니 이 소협의 부모님은 어떠한 분이신지도 모르네요. 검성님의 제자로만 이제껏 알려지고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아직 없으니 말이에요.”
“저는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불쑥 끼어드는 이가 있었고 그는 바로 담가의 담석영이었다.
그는 아침 식사를 마치고는 바로 남궁나연을 찾아 나섰고 그녀가 연화당으로 갔다는 시비의 말을 듣고 바로 달려와 두 사람의 대화에 낀 것이었다.
담석영을 보자 남궁나연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다. 아래 마을에서 예기치 않은 그의 고백에 세가로 돌아오자마자 세가의 어른들에게 시달렸던 그녀는 그가 불편하여 계속 피해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끈질기게 따라붙는 탓에 손님으로 와있는 그를 계속 피하기는 힘들었고 어느새 세가의 사람들과 친해져 그녀의 동선을 이제는 더 빨리 파악하고 이렇게 찾아오고 있었다.
“담 공자께서 이 소협의 집안을 아신다고요?”
“현재 무림의 관심이 검성과 제자인 뇌절검룡에게 쏠려있는 탓인지 금세 소문이 나기 마련이죠. 저도 이곳으로 오는 길에 뇌절검룡의 소식과 신분에 대해 같이 들었던 것이니 기분 나빠하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담석영은 혹시나 이윤후가 오해할까 조심스레 말을 했고 이윤후가 크게 반응이 없자 자신을 향해 말해달라는 듯 눈빛을 보내는 남궁나연을 보았다.
“제가 말하는 것보다는 이 소협에게 직접 들으시는게...”
본인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담석영은 남궁나연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을 포기해야했다.
“말해주세요. 이 소협은 이미 저에 대해 다 알고 계시잖아요.”
남궁나연은 큰 눈을 깜박이며 귀엽게 졸랐고 그 모습에 담석영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크게 중요한 일도 아닌데요. 아버지께서는 관인이셨고 현재 퇴임하시고 황산 아래 작은 마을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계세요.”
이윤후는 대수롭지 않은 듯 이야기했고 남궁나연은 관인일라는 말에 조금 놀란 표정을 보였다가 담석영을 바라보았고 그녀의 시선에 담석영은 고개를 끄덕여 그의 말이 맞는다는 듯 답해주었다.
“이제 부모님도 제가 무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도 있겠네요.”
이윤후는 멋쩍은 듯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의 위명이 이미 무림 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고 당연히 이제는 그의 부모님에게도 이야기가 들어갔을 터였다.
수행을 하는 와중에도 백아를 통해 소식을 전하고 있었던 이윤후였지만 그의 부모님은 자신의 아들이 무림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여기고 계실지 궁금했다.
“보통의 무가(武家)라면야 좋아 할 텐데 이 소협의 집안은 다를 수도 있겠네요.”
“보통의 무가라면 자신의 집안이 검성과 연만 닿아도 큰 영광이라 여길 건데 이 소협의 집안은 대학자이신 이화운님의 가문이니 다를 겁니다.”
담석영의 말에 남궁나연은 조금 놀랐으나 내색치 않았다. 사실 대학자라고 하기에 높은 관직을 지낸 것은 짐작했으나 그쪽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남궁나연은 이름을 듣고도 몰랐기에 괜히 아는 척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마 질색하실 듯합니다. 제가 보낸 편지도 한번을 답장 주시지 않으셨는걸요.”
이윤후는 말을 하고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미 자신은 아버지의 기대를 스스로 저버렸던 터라 아버지인 이화운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가 없었다.
자신의 형인 이강후는 본인의 노력을 통해 결국 작은 자리나마 관직에 들었으나 정작 큰 기대를 받았던 이윤후는 그런 아버지가 싫어 자신의 뛰어남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릴 적에는 형을 닦달하고 무시하는 아버지의 모습이 싫어 그랬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자신이 아버지의 큰 기대를 저버린 것에 대한 미안한 감정이 있었다.
“아니에요. 이 소협의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이 소협을 자랑스럽게 생각하실 거에요.”
남궁나연이 자신을 위로하듯 말을 건네자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이윤후는 이내 표정을 풀고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이 소협은 현재 무림의 희망인걸요. 남궁세가의 귀한 손님이기도 하고요. 무엇보다 제가 어렸을 적 그렇게 사고치고 다녀도 아버지와 어머니께서는 저를 아껴주셨어요. 이 소협의 아버지를 만나보지 못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자랑스러워하실 거에요.”
“이 일이 끝나면 집에 들려 아버지와 만나봐야겠네요. 남궁 소저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이윤후는 집을 나온 후 내색하진 않았지만 아버지와의 일을 계속 신경 쓰고 있었기에 남궁나연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크흠...”
담석영은 이윤후와 남궁나연이 길게 눈을 마주치고 있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기에 금세 헛기침을 하며 두 사람 사이에 껴들었다.
“제가 깜박했는데 이 소협의 손님이 찾아왔다고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남궁 소저에게도 전하라고 했습니다. 중요한 손님이 왔으니 영빈당(迎賓堂)으로 모시고 오라고요.”
“손님이요? 저한테 올 손님이 있을 리가... 아, 어르신이 오셨는가 보네요.”
“영빈당으로 오라는 건 중요한 손님인 듯싶네요. 서둘러야 할 듯싶어요.”
남궁나연은 손님이 영빈당에 있다는 말을 듣고 조금은 조급해져 먼저 발걸음을 옮겼다.
남궁세가에 손님이 오면 보통 입구 근처에 외당에서 머물게 하고 용건에 따라 안내를 하는데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영빈당으로 바로 오라고 한 것은 세가에 중요한 손님이 온 것이었기에 남궁나연의 마음이 급했다.
“도대체 누가 온 거야? 창연.”
화원을 나서자 밖에 대기하고 있던 창연이 그녀에게 따라붙었다. 창연은 남궁나연의 곁으로 어느새 따라붙은 두 남자, 이윤후와 담석영을 조금은 꺼리는 듯 표정을 보이고는 입을 열었다.
“약선(藥仙)께서 오셨습니다.”
“역시 약선 어르신이었군요.”
창연의 말에 먼저 답한 것은 이윤후였다. 그는 자신을 찾아온 손님이라는 말에 가장 먼저 약선을 떠올렸었다.
검성이 이윤후를 먼저 남궁세가로 보내면서 약선이 차후에 출발 할것이라 언질을 해주었었다.
약선과 이윤후가 사왕련으로 가고 검성은 유인경을 데리고 정사회담을 위해 화경부로 가기로 되어 있었다.
“약선께서 이렇게 무림의 일에 관여하시고 있다는 게 신기하긴 하네요.”
담석영의 말에 남궁나연과 창연 모두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불마사의 혈겁때도 무림맹에서 서문세가와 약선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돌아온 대답은 약선은 현재 세가에 있지도 않고 어디 있는지 모른다는 답변이었다.
그리고 서문세가는 봉문하다시피 불마사의 혈겁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무당과 소림의 큰 희생으로 불마사의 혈겁을 막아낸 후 서문세가와 약선을 원망하는 이도 적지 않았다.
그렇게 무림의 위기 때도 움직이지 않았던 약선과 서문세가가 동시에 이번 일에 참여하고 있으니 무림인 모두가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약선이 이렇게 나서는 이유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약선이 평생을 두고 사랑했던 사내이자 정파 무림의 정점(頂點).
바로 검성 나진하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