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담석영의 맹세(盟誓)
“담 공자께서 저희 세가에 남아 주세요.”
“뭣이? 말도 안 되는……!”
남궁나연의 말에 담수화가 바로 발끈하며 나서려 했으나 담석영이 그를 막아섰다.
“숙부님은 나서지 마십시오. 가희가 잘못을 한 이상 여기서 수습하지 않는다면 세가에 큰 누가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석영아.”
담석영은 살짝 눈을 감고 생각에 빠진 듯하더니 이내 남궁나연을 바라보았고 그녀가 입을 떼었다.
“담 공자가 저희 세가에 남는 것이 이제 요구할 것에 대한 확신을 받기 위한 것이에요.”
“제가 볼모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군요.”
“네.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바로 돌려보내 드리죠.”
남궁나연의 당찬 말에 담석영의 무표정한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아마 그 목적이라는 것은 남궁세가에 대한 지원이겠군요?”
“네. 맞아요. 무림맹의 회의에서 많은 문파들이 남궁세가에 대한 지원을 거부했다고 들었어요. 그것을 담가에서 해결해 주세요.”
“아가씨, 그건 무리한 요구가 아닐지…….”
남궁나연의 거침없는 말에 뒤에 있던 창연이 놀라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으나 남궁나연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담가는 제가 요구한 것을 들어줄 충분한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남궁나연이 재차 이야기하자 담석영은 다시금 미소를 보였고 그 모습에 담수화나 담가희는 놀라고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너무 진지하여 무공 이외엔 거의 흥미를 보이지 않던 담석영이었고, 자라면서 더욱 무뚝뚝해져 웃는 것을 보기 힘들었는데, 그런 그가 남궁나연의 말에 미소를 짓자 놀란 것이었다.
“남궁 소저의 말처럼 반대하는 전원은 아니지만, 저희가 힘을 쓴다면 아마도 무리 없이 남궁세가에 대한 지원을 성사시킬 수 있을 겁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이유요?”
“저희가 남궁 소저의 요구를 들어줄 수 있다고 판단한 이유를 듣고 싶습니다.”
담석영의 물음에 담수화도 사실 그 부분이 궁금했기에 남궁나연의 입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담가가 저희를 만나러 온 것은 남궁세가 스스로 세가연합회의 탈퇴를 종용하기 위해서겠죠?”
“그렇습니다.”
“그런 요구를 하기 위해선 당연히 저희에게 도움이 될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일 테고 그것은 남궁세가의 지원이겠죠. 담 장로가 한 번 언급하기도 했고요.”
“그래도 그것만으로 저희가 무림맹의 많은 문파에게 영향을 미칠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기엔 무리가 있지 않을까요?”
“저도 그 부분은 의심스러웠지만 담 공자께서 이미 답을 주셨죠.”
남궁나연은 미소를 보였고, 담석영은 살짝 허탈한 표정을 보였다. 대화 속에서 담수화가 무림맹 내에 영향력을 행사해 지원을 받게 해 주겠다는 말을 했었고, 남궁나연은 그 말에서 담가의 영향력이 남궁세가가 생각하는 그 이상이 아닐까 의심을 했다.
그래서 살짝 떠보듯이 담석영을 볼모로 삼겠다고 먼저 운을 띄우며 무림맹에 지원을 받도록 설득해 달라는 말을 했고, 담석영은 바로 승낙을 했다.
남궁나연은 조금 의심을 했던 부분이지만, 담석영은 상대를 떠보지도 않은 채 그냥 받아 주었다.
“하지만 놀랍군요. 담가의 영향력이 그 정도라니…….”
사실 담석영의 즉답에 놀란 것은 남궁나연이었다. 반쯤은 아니겠지라는 의심이 있었지만, 이만큼 담가와 남궁세가의 힘이 벌어져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었다.
“오절의 시대 이후 모든 정파가 나태해졌지만, 담가는 힘을 모으고 후를 대비했습니다. 그렇기에 그만큼 영향력을 행사할 권력과 힘도 같이 얻었죠.”
“그렇군요. 제가 무리한 요구를 했으니 그쪽의 요구 또한 받아들일까 합니다.”
“우리의 요구라면?”
남궁나연의 말에 담수화가 놀라 되물었다.
“남궁세가의 세가연합회 탈퇴 말이에요.”
“남궁 소저, 진심이십니까?”
담수화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다시 한번 물었다.
“확답을 드리진 못하지만, 오늘 남궁세가의 회의에서 논의하고 행동할 거랍니다. 오늘 담가의 분들을 만나 보니 저희보다는 확실히 그 자리가 더 잘 어울릴 거 같기도 하네요.”
남궁나연도 세가회의를 소집해 놓고도 사실 조금은 자신의 생각이 맞는지 고민스럽기도 했지만, 담가를 만나 그들의 힘을 직접 듣고 확인하니 차라리 생각의 정리가 되었다.
“아직 정확한 확답을 드리지는 못하지만 회의를 통해 세가의 뜻을 모을 것이고, 설득이 잘된다면 남궁세가는 세가연합회를 탈퇴하겠어요.”
“그럼, 저희도 바로 돌아가 남궁세가에 대한 지원을 요청하겠습니다. 현재로서는 당장 정사대전이 벌어질 가능성이 적겠지만, 담가의 정예들을 바로 남궁세가로 보내겠습니다. 다른 문파들도 설득하고요.”
담수화는 생각지 못한 수확을 얻은 듯 목소리가 높아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담가희의 말실수로 인해 모든 것을 내주기만 해야 할지도 몰랐는데, 남궁나연의 말은 담수화로서는 목소리가 높아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숙부님께서는 돌아가 모든 일을 처리해 달라고 가주님께 말씀해 주세요.”
“그래. 돌아가는 대로 군룡대(群龍隊)를 보내도록 건의하마.”
담석영과 담수화의 대화를 듣던 남궁나연과 이윤후는 담석영이 자신의 아버지를 가주님이라고 부르자 이상함을 느꼈고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럼, 남궁 소저. 저희는 약조를 지키기 위해 먼저 돌아가겠습니다.”
“네. 그러세요.”
담수화는 목적한 바를 이루었기에 얼른 세가로 돌아가 모든 것을 알리고 싶어 최대한 빨리 서두르고 있었다.
담수화는 담가희와 시종을 데리고 객잔을 빠르게 내려갔고 담석영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남궁 소저.”
“네?”
담석영은 그들이 떠나자 남궁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굳이 세가연합회의 탈퇴를 하겠다는 걸 알려 준 이유가 무엇인가요?”
“말 그대로예요. 남궁세가는 힘을 잃었고 굳이 세가연합회의 그늘에 있을 이유가 없어졌어요. 담가에서 세가연합회 합류를 원하고 있고요. 이전에 오대세가가 바뀌는 일이 없었다면 모를까, 이미 이전에도 바뀌었던 적이 있어요.”
“…….”
“남궁세가도 그때 약해졌던 세가들의 탈퇴를 막지 않고 지켜보았고 오히려 나서서 바꾸는 것을 주도했던 적도 있다는 기록도 확인했어요. 우리에게는 세가연합회에 남을 명분이 없어요. 그럴 것이라면 원하는 것을 얻고 담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게 맞죠. 그래야 서로 앙금도 없을 테고요.”
“그렇군요. 남궁 소저의 혜안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군요.”
담석영은 진심으로 남궁나연의 결단과 행동력에 놀라고 있었다. 사실 계속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왜 굳이 담가가 원하는 것을 내주는지 말이다. 남궁나연은 담가희의 실수로 인해 원하는 모든 것을 얻어 내었지만, 얻기만 한다면 결국 담가와 감정의 골이 깊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주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었다.
‘알려진 바로는 무공에 뜻이 없는 버릇없는 아가씨로만 들었는데 전혀 다르군. 무공을 떠나 사람들을 다루는 솜씨나 언변 모두 대단해. 이 일로 인해 담가는 남궁세가에 큰 고마움을 느낄 테니 남궁세가의 일에 발 벗고 나서게 되겠지…… 이 모든 것을 생각하고 한 행동이라면 남궁세가는 빠른 시간 안에 이전의 명성을 회복할지도 모르겠군.’
담석영은 남궁나연에게 눈길을 떼지 못했고 그런 그의 모습에 창연이 나섰다.
“아가씨, 세가로 돌아가시죠. 지금 시기에 세가를 너무 오래 비우는 것도 좋지 않습니다.”
“하지만…… 음식들을 제대로 맛보지도 못했는걸…….”
남궁나연은 소란 때문에 들어오지도 못한 음식들이 아쉬운 듯 표정을 보였다.
“제가 이미 아가씨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싸 달라고 말해 두었습니다. 세가에 돌아가서 드세요.”
“정말? 역시 날 생각해 주는 건 창연밖에 없어.”
남궁나연이 활짝 웃자 창연도 살짝 쳐졌던 기분이 나아진 듯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그녀를 바라보고 미소를 짓는 담석영과 이윤후를 발견하고는 금세 창연의 표정이 굳어졌다.
‘담 공자도 설마 아가씨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건가…….’
창연은 남궁나연을 연모하는 마음을 가슴에 품었다. 보는 것만으로 만족하고 살았다.
남궁나연이 이윤후에게 관심을 보이는 모습에 괜히 질투가 나는 마음을 억지로 억누르고 있었는데, 새로 나타난 담석영까지 남궁나연에게 관심이 있는 듯하자 마음 한구석이 답답해졌다.
“담 공자님, 혹시 여기 오실 때 말을 타고 오셨나요?”
창연은 담석영에게 다가가 물었다.
“마차를 타고 여기까지 왔소.”
“그럼…… 말을 한 마리 구해야겠군요. 아가씨, 제가 먼저 내려가 말을 좀 구해 오겠습니다.”
창연은 담석영이 타고 갈 말을 구하기 위해 남궁나연에게 허락을 구하고 객잔을 먼저 내려갔고, 세 사람도 어색해하다가 객잔을 나서기 시작했다.
* * *
객잔 아래로 내려온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창연이 말을 구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돌아가면 정말 힘든 일이 남아 있겠군요.”
침묵을 참지 못하고 이윤후가 입을 열었고 생각에 빠져 있던 남궁나연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남궁세가를 위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이 소협 덕에 결심했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좀 져 주세요.”
남궁나연은 이윤후가 자신을 걱정하고 있음을 알았고 농담을 하며 미소를 보였다. 담석영은 두 사람이 어떤 대화를 하는지 알지 못해 듣고만 있었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도와드리죠. 그러려고 온 것이기도 하고요.”
남궁나연은 이윤후의 대답에 기분 좋은지 얼굴에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흠…… 두 분은 혹시 연인 관계이십니까?”
가만히 듣고만 있던 담석영이 두 사람 사이로 끼어들며 물었다.
“아니에요. 그렇게 보이나요?”
“네. 아주 가까워 보이기에 연인 사이로 보였습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가 아니라면 다행이군요.”
담석영은 남궁나연의 대답에 살짝 무표정했던 얼굴에 입꼬리가 실룩거렸다.
담석영은 지금까지 여인에게 딱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가문에서 그의 혼인을 추진할 때도 가문이 정해 준 사람과 혼인을 해야겠다고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남궁나연을 만난 담석영은 그녀에게 흥미를 느꼈고, 그녀가 자신을 남궁세가에 남게 했을 때 잘됐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다행이라니 무슨 말이죠?”
남궁나연은 설마 하는 마음에 물었는데 어느새 담석영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담가의 장남인 제가 남궁 소저를 좋아하게 된 거 같습니다. 이제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담석영은 한쪽 무릎을 꿇으며 자신의 애도를 남궁나연을 향해 내밀었다.
“군황도(群皇刀)를 걸고 맹세하겠소. 나 담석영은 그대를 목숨 걸고 지킬 것이오.”
진지하다 못해 결연하기까지 한 담석영의 행동에 남궁나연과 이윤후는 놀라 서로를 바라보았다. 길거리였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안 그래도 눈에 띄는 세 명이었는데 돌발적인 담석영의 행동에 행인들이 모두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었고, 담석영이 맹세의 말을 할 때는 모두 환호까지 지르고 있었다.
“오~ 담가의 소가주가 남궁세가의 아가씨에게 고백을 하다니.”
“이거, 담가와 남궁세가가 이제 서로 사돈지간이 되는 것인가? 사이가 안 좋다고 들었는데?”
담석영이 대놓고 자신의 이름을 밝힌 덕에 그의 정체를 모두가 알게 되었고, 남궁나연은 워낙 유명한 인물이라 마을에서 바로 알아보고 수군거리고 있었다.
담석영의 돌발 행동에 남궁나연은 당황했고, 이윤후는 살짝 물러나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괜히 두 사람과 같이 시선을 받는 것이 부담스러웠던 이윤후는 금세 군중들 사이까지 물러섰고, 남궁나연은 그런 이윤후의 모습에 원망스러운 듯 쳐다보았다.
“일어나세요, 담 공자. 많은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무슨 행동입니까?”
“앞으로 남궁 소저가 할 일에 제가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그대의 힘이 되겠다는 맹세를 스스로 하는 것입니다.”
담석영은 진중하게 답했고 그런 진지한 그의 행동에 남궁나연은 더욱 난감해했다.
결국 말을 구해 온 창연이 와서야 담석영은 일어났고, 남궁나연은 거의 억지로 담석영의 맹세의 상대가 되어야 했다.
하지만 이날 이일은 남궁세가의 부흥의 첫걸음이 되는 의미 있는 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