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군룡세가(群龍勢家)(2)
“군룡세가(郡龍勢家)라…… 정파는 정말 마음에 드는 구석들이 없군.”
이윤후는 침상에 몸을 누인 채 눈을 감았다.
“그들이 이런 시기에 남궁세가와 만나는 일이라면 분명 보통의 용건일 리가 없어.”
이윤후는 검성이 이야기한 정파들의 본질에 대해 심각한 회의감이 들었다. 검성도 무림에 활동할 당시 정파들에게 큰 실망을 했다고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정파가 협의(俠義)로 대변되는 시대는 이미 사라졌다. 오히려 자신들의 문파만 위하고 이익만 쫓는 사파보다 못한 문파들이 많았다.
무림맹에서 길어진 회의만 보더라도 정파들이 얼마나 변하였나를 알 수가 있었다.
검성은 이윤후를 남궁세가에 보내면서 남궁세가를 위해서만 움직이라는 말을 해 주었다. 정사회담을 통해 정사 충돌의 중심에 놓여 있는 남궁세가를 위해 움직이긴 하지만, 최악의 경우엔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데리고 대피하라고도 이야기해 주었다.
“사부님은 회담이 결렬되어 정사대전이 시작된다면 발을 빼시려는 것이겠지.”
이윤후는 정사 누가 주도권을 잡는 일에는 딱히 관심이 없었다. 검성의 이야기처럼 만약 정사대전이 벌어진다면 물러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도 생각은 하고 있었다.
“유 소저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그는 문득 유인경 생각이 났고, 이어서 남궁나연의 얼굴도 불현듯이 떠올랐다.
“이런…….”
이윤후는 생각을 털어 버리는 듯이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침상에서 몸을 일으켰고, 괜히 두 여인을 동시에 떠올린 자신을 자책하듯 뺨을 세차게 쳤다.
“정신 차리자…….”
자신도 모르게 두 여인을 동시에 떠올린 이윤후는 스스로 놀라 어쩔 줄 몰라 했고, 결국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다시 산행을 위해 방을 나섰다.
* * *
“피곤하셨나 봐요?”
“아니요. 그냥 좀 생각할 게 많아서 그렇습니다.”
군룡세가의 손님들을 만나기 위해 마을로 내려가던 남궁나연은 이윤후가 계속 말이 없자 그의 곁으로 말을 몰아가 물었다.
“그래요? 지금 가는 객잔이 안휘성 내에서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는 객잔이니, 가면 후회는 하지 않으실 거예요.”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할 거라고 하셨지 않나요?”
“이 소협이 충고를 해 준 덕에 생각이 정리되었으니 보기 싫은 인물들과 마주 앉더라도 식사는 즐겨야죠. 저도 이 객잔 음식 좋아해서 자주 온답니다.”
남궁나연이 말을 하며 미소를 보이자 이윤후는 그녀를 따라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되었다.
“헛…….”
자신도 모르게 남궁나연의 미소에 빠져든 이윤후는 정신을 얼른 차렸다.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남궁나연은 그를 보고 배시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뒤통수는 창연이 노려보고 있어 따거울 지경이었다.
남궁나연의 눈물을 보며 위로하기 위해 안아 주었던 이윤후는 괜히 그녀를 볼 때마다 그 생각이 나서 최대한 그녀를 안 보려고 했으나 그러기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최대한 남궁나연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피하며 마을에 도착했고,, 오래 걸리지 않아 그녀가 말하던 객잔을 찾을 수 있었다.
삼 층으로 이루어진 큰 객잔이었는데,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일 층을 가득 메운 사람들로 시끌시끌했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남궁나연을 본 중년 사내가 잽싸게 뛰어나왔다. 남궁나연이 자주 온다는 말을 했듯이 점소이들이 그녀를 알아보았고 안내를 시작했다.
“오신다던 손님들이 먼저 도착해 있습니다. 올라가시죠.”
“그래요? 아직 약속 시간은 멀었는데…….”
“그분들도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일각 조금 안 되었네요.”
약간 살집이 있는 덩치가 뒤뚱거리며 이 층으로 올라갈 계단으로 모두를 안내했고, 이윤후도 남궁나연과 창연을 따라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 층에 올라서자 일 층과 달리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정중앙의 자리에서 두 사람은 앉아 있고 두 사람은 선 채 올라오는 남궁나연과 이윤후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분들입니다. 앉아 계시면 음식을 준비하겠습니다.”
점소이는 안내를 하고는 다시 일 층으로 내려갔고, 남궁나연은 자신들을 바라보는 이들을 향해 웃으며 걸어갔다.
“남궁세가의 남궁나연이라고 합니다. 군룡세가분들이 이리 일찍 올 줄은 몰라 저희가 기다리게 했군요.”
“흥! 남궁세가에서는 손님을 대하는 것이 형편없군요. 미리 와서 준비를 하고 기다려야죠.”
남궁나연이 예의를 차려 이야기했지만, 뒤에 서 있던 여인이 표독스럽게 말을 내뱉었고, 남궁나연의 고운 아미가 찌푸려졌으나 이내 표정을 바꾸었다.
“희야, 예의를 지키도록 해라. 남궁 소저는 현재 남궁세가의 가주 대리로 우리를 맞이하러 오신 것이다. 네가 함부로 해서 되겠느냐?”
앉아 있던 노인의 말에 희라고 불린 여인은 입을 닫은 채 고개를 숙였다. 노인은 군룡세가의 장로인 담수화였고 희라고 불린 여인은 군룡세가 가주 담영진의 둘째 딸인 담가희였다.
“죄송합니다. 남궁 소저.”
“아니요. 담 낭자의 말대로 제가 손님 접대에 소홀했으니 괜찮습니다.”
남궁나연은 최대한 속을 내비치지 않은 채 수습하고는 자리에 앉았고 이윤후를 향해 손짓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던 이윤후는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그쪽은 누구신지?”
이윤후가 다가오자 담수화는 경계를 하듯이 물었다. 담수화는 남궁세가의 인물들을 꽤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윤후는 처음 보는 자였기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윤후라고 합니다.”
이윤후는 자기소개하며 예를 취한 후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이윤후의 이름을 들은 담가의 네 사람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대가 검성의 제자가 맞습니까?”
담수화는 이윤후를 알아보고는 물었고, 이에 이윤후는 살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일부러 신분은 밝히지 않은 채 이름만 말했는데 자신을 알자 놀란 것이었다.
“아마 어제 일이 소문이 나서 그럴 거예요. 여긴 가깝기도 하고요.”
“아, 그런가요.”
남궁나연은 저들이 이윤후를 알아보는 이유가 그 때문이라 짐작해 이야기해 주었다. 남궁나연의 짐작대로 이미 이윤후에 대한 이야기는 안휘성 내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다.
“검성의 제자를 오늘 만날 거라곤 생각도 못 했군요. 전 군룡세가의 담수화라고 합니다. 이쪽은…….”
“담석영입니다.”
담수화의 옆에 앉아 있던 젊은 사내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는 이윤후를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그의 이름을 들은 창연은 살짝 긴장한 듯 남궁나연을 향해 귀엣말을 건네었다.
“신룡도객(神龍刀客)이라 불리는 담가의 후계자입니다.”
창연의 말은 이윤후에게도 들렸고 그의 말을 들은 남궁나연도 조금은 놀란 듯 그를 바라보았다.
“군룡세가의 후계자분이 이 먼 곳까지 오셨을지는 몰랐군요.”
“사실 숙부님께서 동행을 요청하시기에 어쩔 수 없이 따라온 자리긴 했는데, 검성의 제자 분을 만날 수 있어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담석영은 대놓고 호승심(好勝心)을 드러내며 이윤후를 바라보았고, 그런 담석영의 모습이 한두 번이 아닌지 담수화는 살짝 곤란한 표정으로 그를 진정시키고 있었다.
“이 녀석이 워낙 겨루는 것을 좋아하여 그러니 이해를 부탁드립니다.”
담수화는 담석영의 태도가 살짝 난감한 듯 이윤후를 향해 사과했다. 나이는 한참 담수화가 위였지만 검성의 제자인 것만으로도 담수화가 이윤후에게 함부로 하긴 어려운 존재였다.
“전 담가희라고 해요. 이쪽은 운월(雲月)이라고 저희를 따라온 시종이랍니다.”
뒤에 서 있던 담가희는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소개를 했고, 그 옆에는 표정이 없는 이십 대 중반의 사내가 서 있었다.
대충 서로의 소개가 끝이 났지만 담석영은 여전히 이윤후를 향해 뜨거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담가희 역시 이윤후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객잔으로 오는 길에 어제 있었던 이윤후와 사왕련의 미후왕과의 일전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담석영과 담가희 둘 다 이윤후에 대한 호기심이 있었는데 자신들의 앞에 나타나자 참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을 제쳐 놓고 남궁나연과 담수화는 소소한 담화를 나누며 아직까진 본론을 꺼내지 않은 채 서로를 가늠하려 하고 있었다.
“이제 슬슬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실 때도 된 듯하네요.”
남궁나연은 담수화를 바라본 채 말을 꺼내었고, 그런 그녀의 모습에 담수화는 자신의 흰 수염을 어루만지며 미소를 지었다.
“저희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보입니까?”
담수화는 상대를 떠보듯이 말했고, 그런 그의 행동에 남궁나연은 고소를 금치 못했다.
“이런 시기에 보란 듯이 군룡세가의 분들이 후계자까지 대동한 채 이곳에 오셨는데, 그저 소소한 이야기나 하러 오지는 않았을 거라 싶네요.”
큰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을 바라보는 남궁나연의 모습에 담수화는 조금은 놀란 듯 표정을 보였다.
‘남궁나연은 남궁세가의 금지옥엽으로 버릇이 없이 자라 사리 분별을 못 한다고 들었는데, 전혀 평판과는 다르군.’
담수화는 알려진 남궁나연의 이야기와 전혀 다른 모습에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흐음…… 남궁세가가 곤란한 지경에 빠져 있어 도움을 드릴까 하고 찾아온 것인데, 저희를 조금 경계하시는 듯하군요.”
담수화는 남궁나연에 비해 한참 어른이었지만, 남궁나연은 현재 가주대리의 직함이었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예의를 갖추고 있었다.
“남들이 듣는다면 군룡세가와 저희 남궁세가가 돈독한 사이라고 생각하겠군요. 누가 듣더라도 담 장로님의 그 말은 믿지 않을 거예요.”
남궁나연의 말투가 조금은 공격적이게 되자 뒤에서 지켜보던 창연이 조금 걱정스러운 듯 표정을 보였고, 이윤후도 정신을 차린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럼, 저희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곳에 왔다고 생각하시고 계십니까?”
담수화는 한참 어린 남궁나연의 태도에 화는커녕 흥미롭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아마도 거래를 통해 얻고자 하는 것을 얻으려는 것이겠죠.”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담수화는 남궁나연의 대답에 더욱 미소를 지은 채 물었다.
“이 시기에 담가가 굳이 남궁세가를 찾은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만 해 본다면 답은 나와 있는 것이겠지요.”
“하하, 이거 못 당하겠군요. 남궁 소저를 사람들은 아름답기만 한 천방지축이라 부르던데, 이거 평가가 잘못된 듯하군요.”
남궁나연의 대답에 담수화는 박장대소를 했고, 그의 말이 무례했기에 창연이 화를 참지 못하고 검에 손을 가져갔으나 담석영이 그를 노려보자 검에서 손을 떼어야 했다.
창연이 검을 잡자마자 담석영의 투기가 쏘아지듯이 그를 압박했고, 그 기운만으로도 전의를 상실한 것이었다.
쾅―
“원하는 것을 이야기하시죠?”
남궁나연은 앞의 탁자를 내리치고는 말했고, 그녀의 말과 함께 담석영도 창연을 옥죄던 투기를 거두었다.
남궁나연의 말에 담수화는 담석영과 담가희를 번갈아 쳐다보았고, 담석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흠…… 저희가 이곳까지 찾아온 이유는 남궁세가에 한 가지 제안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제안이요? 어떤 제안이죠?”
남궁나연은 대충 군룡세가에서 무엇을 이야기할지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확인하는 차원에서 질문을 했다.
담수화는 한참을 이야기하지 않은 채 남궁나연을 쳐다보다가 천천히 입을 떼었다.
“남궁세가가 현재 사왕련으로 인해 상황이 좋지 않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것을 도와드릴 것이 있나 하고 저희가 찾아왔습니다.”
“그냥 도와주시려는 것은 아니겠군요?”
“남궁세가에서 한 가지 약조만 해 주신다면 군룡세가는 남궁세가를 무조건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저희뿐 아니라 남궁세가의 지원에 미온적인 문파들을 설득하여 다른 문파들도 남궁세가를 돕도록 해 드릴 수 있습니다.”
“호호~!”
담수화의 말에 남궁나연은 객잔이 떠나가라 크게 웃기 시작했고, 가녀린 그녀의 웃음은 객잔을 가득 채웠다.
그러나 이내, 웃음을 거두고 차가운 표정으로 담수화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아마 그 지원을 해 주는 대가는 남궁세가의 세가연합회 탈퇴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