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난세영웅(亂世英雄)(2)
조금 전까지 생사를 걸고 치열하게 싸우던 두 사람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을 만큼 두 사람은 친해진 모습이었고, 지켜보던 모든 사람들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나를 선배라고 불러도 되느냐? 아마 저 꼰대 같은 인물들이 좋아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미후왕은 예의 바른 이윤후의 말에 기분 나쁘지는 않았지만, 정파의 인물이 사파에게 선배라고 칭하는 것이 흔한 일이 아니었다.
미후왕의 말처럼, 이윤후의 말에 정파의 몇몇 인물 중에는 곱지 않은 시선으로 이윤후를 바라보며 수군거리는 자들도 있었다.
“남들의 시선은 저와 관계없습니다. 스승님께서도 정사를 나누어 편견 있는 눈으로 바라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미천한 무림의 경험을 가지고 있지만 제가 봐 온 사파의 인물들은 모두 악인이 아니었습니다.”
이윤후의 소신 있는 말에 미후왕은 다시금 미소를 보였다.
무림을 경험하기 전엔 정사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으나, 검성은 이윤후에게 정사를 구분 짓지 말고 모든 사람을 만나 보고 직접 판단하라는 이야기를 해 주었고, 과연 스승의 말대로 이윤후가 직접 만나 본 사파의 인물 중에 그리 나빠 보이는 이는 없었다.
쌍사련의 지욱이 그러했고, 눈앞의 미후왕도 악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저 성격이 괴팍하고 자유롭다는 느낌이 들 뿐이었다.
“너도 알겠지만 오절의 시대에는 정파의 세상이었지만, 흑월도존께서 사마련을 만들고 사파를 규합한 이후는 사파의 세상이다.”
“알고 있습니다.”
살짝 뜬금없는 미후왕의 말이었지만 이윤후는 말을 받아 주었고, 갑작스런 두 사람의 대화에 다들 궁금하여 집중하기 시작했다.
“흑월도존께서 무림일통의 꿈만 접지 않으셨다면 현재 남궁세가는 물론 모든 정파가 우리의 발아래 꿇었을 것이다.”
미후왕의 말에 정파의 몇몇 사람들은 발끈했지만 미후왕 앞에 나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듣고 있던 대부분의 사람은 미후왕의 말에 부정할 수는 없었다.
굴욕적인 이야기였지만 흑월도존이 무림일통의 뜻을 스스로 접지 않았다면 무림이 사파천하가 되었으리라는 것은 다들 인정하고 있었다.
“나는 흑월도존 그분을 무림의 지존으로 만들어 드리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오절과 검성이 무림에서 사라지지 않았다면 흑월도존의 천하는 오지 않았을 거라 말하더군. 난 그 말이 아주 싫었다. 우리의 존재를 부정하는 듯한 생각이 들었거든. 그래서 그 말을 하는 이들을 가만히 두지 않았지.”
“그래서 절 찾아오신 거였군요? 저의 스승님을 만나 실력을 직접 보려고요.”
이윤후는 그제야 미후왕이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 거 같았다.
미후왕은 혈왕문의 문주일 때 산서의 패왕이었던 금검보의 억압을 받아야만 했고, 혈왕마라수를 극성으로 익히기 위해 폐관에 들어갔다.
그가 폐관수련을 마쳤을 땐 이미 혈왕문의 이권을 모두 금검보에게 빼앗긴 상태였고, 그의 아내가 그들의 손에 죽은 후였다.
미후왕은 눈이 뒤집혀 단신으로 금검보를 찾아갔고, 혈왕마라수를 대성한 그는 금검보를 혼자서 궤멸시켰다.
하지만 그는 수많은 부상을 안은 채 도주해야 했고, 금검보의 혈사에 지원을 하러 온 무림맹의 정예들에게 추적을 당해야 했다.
힘겨운 도주를 며칠째 거듭하던 미후왕은 결국 무림맹의 추적자들에 의해 궁지에 몰렸고, 복수를 마쳤다는 생각에 생을 포기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앞에 묵색 대도를 든 인물이 나타났다. 그 인물은 단숨에 무림맹의 추적자들을 쓰러뜨리고 미후왕을 구해 주었다.
그가 바로 흑월도존 유상휘였다. 그 당시 자신이 창안한 무공을 완성하고 무림에 나온 그는 혈왕문의 문주가 쫓기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미후왕을 구한 것이었다.
유상휘는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하며 미후왕이 함께해 주길 권했고, 그날로 미후왕은 유상휘를 위해 모든 일에 앞장섰다.
그렇기에, 미후왕은 유상휘를 검성과 오절에 비교하며 깎아내리는 자들에게 반드시 응징을 가해 왔다.
그런 미후황 앞에 검성의 제자가 나타났으니, 몸이 달아 움직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하나만 묻자.”
“말씀하시지요.”
“네 스승은 살아 계시느냐?”
미후왕의 말에 이윤후는 바로 답하지 못했고, 모든 이들이 이윤후의 입에 집중하고 있었다.
“살아 계십니다.”
“오!”
“검성께서 살아 계시다니!”
이윤후의 말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이미 오래전에 무림에서 사라졌던 검성의 생존은 모두에게 놀라운 사실이었다.
“저도 하나만 묻고 싶습니다.”
“무엇이든 답해 주마.”
원하는 답을 들은 미후왕은 기분 좋은 듯 이윤후를 향해 말했다.
“흑월도존께서는 살아 계십니까?”
이윤후의 물음에 이번에는 모두 미후왕의 입에 집중했다.
“형님께서는 살아 계신다. 아직은 정신이 돌아오지 못하고 계시지만…… 살아는 계신다.”
미후왕의 답에 이번에는 좌중이 조용해졌다. 흑월도존의 생존은 정파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나마 병상의 상태라는 것이 다행일 뿐이었다.
“정파의 무림맹에서 회담을 요청했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습니까?”
“들었다만, 사파가 회담에 응할 이유가 있느냐? 부질없는 이야기지.”
“회담의 조건에 흑월도존의 치료가 걸려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이윤후의 말에 미후왕은 물론 좌중의 정파 사람들도 놀라 그의 말에 집중했다.
“사파에서는 그냥 회담 요청을 받아 줄 이유가 없겠지요. 하지만 이번 회담의 성사에 약선 어르신이 쓰러져 있는 흑월도존의 치료를 해 주겠다는 단서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윤후는 살짝 유인경에 대한 이야기도 할지 고민했지만 이미 그의 말에 미후왕의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기에 말을 아꼈다.
“그게 사실인가? 약선이 형님의 상태를 봐주는 것이?”
“네. 사실입니다.”
“확인해 봐야겠군. 돌아가 봐야겠어.”
미후왕은 표정이 굳어진 채 말했다.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사왕련에서는 무림맹의 회담 요청 조건을 비밀로 한 채 거부하고 있음을 확실했다.
미후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지면을 박차고 날아오르며 순식간에 사라졌다.
“한 차례 폭풍이 지나간 듯하군요.”
“아…… 남궁 소저.”
미후왕이 사라진 방향을 한참 쳐다보고 있던 이윤후는 남궁나연이 다가오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거, 연회를 망치게 되어 어쩌죠?”
“이 소협이 망치신 것도 아닌데 미안해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나저나 미후왕이 다시 저희를 괴롭히는 일은 없을 듯한데 어떤가요?”
남궁나연은 두 사람의 대화 속에서 어느 정도 상황을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데, 회담에 그런 조건이 붙어 있는지는 몰랐네요. 하긴 무림맹의 수뇌부 회의가 끝이 난 것을 보고 무슨 일이 있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남궁나연은 정파 수뇌부의 드디어 며칠간의 회의를 끝내고 사왕련에 회담을 제의한 일을 두고 무언가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였으나, 설마 약선이 전면에 나선 것일 줄은 몰랐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무림에는 검성과 약선이 이번 회담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제 소문이 파다하게 날 것입니다.”
이윤후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으며 이야기했고, 남궁나연은 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알 수가 있었다.
남궁세가의 연회는 이미 끝이 난 모양새였다. 오늘 본 것을 빨리 알리고 싶은지, 벌써 몇몇 사람은 돌아가고 있었다.
“오늘 여기서 있던 일도 소문이 꽤 크게 나겠네요.”
남궁나연은 빠져나가는 사람들을 보며 말하곤 이윤후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이제 꽤 유명해지시겠어요.”
“제가요?”
“네. 사왕련의 사왕 중 한 명인 미후왕과 비등하게 싸운 정파 무림의 기린아라고 아마 소문이 파다하게 나지 않겠어요?”
“뭐, 그 정도까지…….”
남궁나연이 대놓고 이야기하자 이윤후는 부끄러운 듯 살짝 얼굴이 붉어졌고, 그런 모습이 귀여운지 남궁나연은 키득키득 웃었다.
“지금의 정파 무림엔 영웅이 필요하니, 이 소협이 싫어하더라도 사람들은 더욱 부풀려 이 소협의 활약을 크게 소문낼 거예요. 이미 이 소협의 사형도 주목을 받았지만 사라져서 안 보이니, 이번 활약으로 두 사람 모두 입에 오르내리겠죠.”
“그런가요?”
이윤후는 머쓱한 표정을 지어 보였으나 남궁나연의 말처럼 될 가능성이 높다고 그도 생각하고 있었다. 검성과 약선도 이윤후를 남궁세가에 보내면서 그런 이야기를 했기 때문이다.
[난세(亂世)가 오면 사람들은 영웅이 나타나길 기대한다. 내가 살아 있음을 모두가 안다면 내가 영웅이 되어 정파를 구해 주길 바랄 것이다. 하지만 나와 애령은 이미 흘러간 시대의 사람이다. 난세에 영웅이 필요하다면 아마 그것은 네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윤후에겐 낯부끄러운 소리였지만, 검성의 제자로서 다시금 검성의 무공을 무림에 자랑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오늘을 계기로 아마 정사회담이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으니 남궁세가의 경계를 낮춰도 될 것입니다.”
현재 사왕련에서는 정파의 회담 요청에 미온적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약선이 흑월도존을 치료해 주겠다 공표하면 사왕련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게 비천과 검성의 생각이었다.
“이건 좀 죄송하네요.”
이윤후는 눈앞에 들어온 큰 구덩이를 가리켰다. 비뢰낙일 초식으로 인해 대전에 깔려 있던 비싼 대리석을 가루로 만들고 깊고 큰 구덩이를 만들어 놓았다.
“죄송하시면 변상해 주세요.”
“네? 그게, 제가 돈이 그렇게 많지는…….”
이윤후는 예상외의 남궁나연의 말에 살짝 당황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래도 이 소협으로 인해 이렇게 되었으니 변상해 주세요. 물론 돈 말고 다른 것으로 변상하셔도 됩니다.”
남궁나연의 말은 농담이었으나, 이윤후가 당황하자 반응이 재미있어 그녀는 조금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다른 것이라면……?”
“제 부탁을 한 가지 들어주세요.”
“그거야 뭐…… 제가 들어드리지 못할 부탁만 아니라면 무엇이든 해 드리겠습니다.”
“무엇이든요?”
순진했던 이윤후는 남궁나연이 던진 미끼를 덥석 물었고, 남궁나연은 확답받듯이 재차 물었다.
“아…… 네. 제가 들어드릴 수 있는 거라면요.”
적극적인 남궁나연의 반응에 살짝 자신이 실수한 것이 아닌가 생각했던 이윤후였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제가 해 드릴 것이 있을까요?”
“내일 세가에 손님이 오는데, 손님맞이하는 것을 조금 도와주세요.”
“손님이요? 오히려 실례가 되지 않을까요? 전 남궁세가 사람이 아닌데…….”
“실례가 될 일이라면 부탁드리지도 않아요. 그냥 제 옆에 계셔만 주세요.”
이윤후는 남궁나연의 말에 살짝 의심스러웠지만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지낼 숙소를 아직 받지 못하셨죠? 창연!”
남궁나연은 분주하게 정리를 지휘하고 있던 창연을 불렀고 그녀의 부름에 창연은 바로 달려왔다.
“네. 아가씨.”
“이 소협이 묵을 숙소를 마련해 줘. 그리고 내일 오찬에 이 소협도 함께하기로 했으니 준비하고.”
“네?”
남궁나연의 말에 창연은 그녀와 이윤후를 번갈아 보았고, 영문을 모르는 이윤후는 살짝 어색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창연이 무슨 말을 하려 했으나, 남궁나연의 매서운 눈초리에 입을 닫아야 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창연이 살짝 굳은 표정으로 이윤후를 바라보고는 앞장서 나가자, 이윤후도 남궁나연을 향해 예를 취하고는 그를 따랐다.
‘이거 왠지 귀찮은 일에 휘말린 듯한데…….’
이윤후는 창연의 태도에서 뭔가 귀찮은 일일 것이라 짐작했고, 무슨 일일지 궁금하긴 했으나 등 뒤에서도 화가 난 것이 느껴지는 창연에게 물어보긴 힘들었다.
‘창연은 확실히 남궁 소저에게 마음이 있는 듯한데…….’
이윤후는 그냥 창연의 뒤를 말없이 따라가기 시작했고, 창연은 이윤후에게 안내할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