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구출(救出)(2)
나름 침착한 성격인 이윤후였지만 바로 앞에 서 있는 윤영찬은 도저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렇게 대놓고 싫은 인물은 처음이었기에 대화를 더하는 것도 이윤후는 하지 않기로 했다.
이윤후가 바로 검을 뽑아 들자 사원칠수도 거리를 두며 이윤후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이윤후는 최대한 저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오도록 일부러 과도하게 행동하고 있었고, 나무 뒤편의 정신을 잃은 남궁세가의 무사들에게 신경 쓰지 못하도록 하려고 했다.
이윤후를 단순히 남궁세가의 무사를 구하러 온 자라고 판단했던 윤영찬과 사원칠수도 그가 뿜어내고 있는 기도에 놀라며 경계하기 시작했다.
사사삭―
파밧―
사원칠수가 빠르게 이윤후를 중앙에 둔 채 주위를 돌며 압박하기 시작했고, 사원당의 검진(劍陳)인 사원검진(邪元劍陳)을 펼치고 있었다. 원래는 혈왕문의 혈라검망진(血羅劍網陳)이라는 이름이었지만, 혈왕문이 없어지자 윤영찬은 검진 이름까지 바꾸어 버렸다.
“눈이 어지러운 검진이군.”
이윤후는 이렇게 검진에 갇혀 본 적은 처음이었기에 안력을 끌어올리며 사원칠수의 모든 움직임을 담아 내려고 애를 썼고, 최대한 움직임을 줄인 채 숨죽이고 있었다.
파바밧―
촤라락―
빠르게 움직이는 검진 사이로 단검과 각종 암기가 수시로 이윤후를 노려져 왔으나 이미 집중을 하는 그에게 암기술이 통할 리는 만무했다.
모든 공격을 막아 내며 수준을 가늠한 이윤후는 움직이기로 결심했고, 상월검의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검진이 처음이라 조금은 흥미로워 가만히 있었지만, 바쁜 몸이라 더는 안 되겠습니다.”
파밧―
“커헉…….”
“크학…….”
이윤후가 지면을 박차고 움직이며 순식간에 검진 한가운데로 진입했고, 빠르고 갑작스러운 이윤후의 움직임에 사원칠수는 놀라 검을 휘둘렀으나, 이윤후는 가볍게 막아 내고는 두 사람을 베어 버렸다.
두 사람이 순식간에 쓰러지자 검진은 깨어졌고 나머지 인원들의 움직임도 멈추었다.
“어떻게……? 네놈은 대체 누구냐?”
지켜보던 윤영찬은 크게 놀라며 소리쳤다.
“어떻게라고 할 것도 없이 검진을 반복하여 움직이는 그대들이 이상하게도 한 방위에 가서 두 명이 겹치는 부분이 있더군요. 나름 빠르고 빈틈이 없는 검진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겹치는 부분에서 어긋나는 듯한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요?”
이윤후의 말에 사원칠수와 윤영찬은 서로를 바라보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네놈이 어떻게 그것을……? 아니, 한 번 본 검진의 허점을 단시간에 그리 파악했다는 말이냐?”
윤영찬도 사원검진의 허점을 잘 알고 있었다. 원래는 혈왕문의 혈라검망진이었던 이 검진은 열두 명의 검수가 펼치는 것으로, 일곱의 인원으로 펼칠 수 있게 바꾸었기 때문에 분명 허점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만. 이대로 물러나 주신다면 저도 여기까지만 하고 싶습니다.”
이윤후는 쓰러진 사원칠수의 두 사람을 가리키며 말했고, 그의 말에 한 사람이 쓰러진 두 사람을 살피러 움직였다.
“아직 숨이 붙어 있습니다.”
쓰러진 두 사람의 생사를 확인하고는 소리쳤고, 윤영찬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이윤후를 노려보았다.
“좋다. 여기서 우린 물러나도록 하지. 하지만 조건이 있다.”
“말씀하시죠.”
윤영찬이 예상외로 물러나겠다고 말하자, 이윤후는 다소 의외인 듯 답했다. 사실 이런 말이 통할 상대라고는 생각지 않았고, 그저 귀찮은 일을 피하고 싶은 마음에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윤영찬이 예상외로 받아들인 것이었다.
“네놈의 이름과 소속을 말해다오. 분명 남궁세가의 인원을 아닐 테지? 남궁세가의 의뢰를 받은 것인가?”
윤영찬의 물음에 이윤후는 상월검을 검집에 거두며 뒤로 물러섰고, 사원칠수도 이윤후의 움직임에 따라 윤영찬 뒤로 물러섰다.
이미 윤영찬이 이 싸움의 끝을 선언한 상황이었고, 이윤후가 물러서는 이유가 남궁세가의 무사들의 안전을 위한 이동임을 알았기에 사원칠수도 눈치 빠르게 물러선 것이었다.
“전 이윤후라고 합니다. 딱히 소속은 없습니다. 그저 스승님께서 남궁세가에 신세 진 일이 있어 도우러 왔을 뿐입니다.”
“네 스승이 누구냐?”
이윤후는 되도록 검성의 이름을 밝히기 싫었으나, 윤영찬은 물고 늘어졌다.
“나진하라고 합니다. 무림에서 검성이라고 불리시는 분이지요.”
“뭣이? 검성의 제자?”
이윤후의 말에 윤영찬과 사원칠수 모두 소스라치게 놀랐고 소란이 일었다. 윤영찬으로서도 이윤후가 보통의 인물은 아닐 것이라 생각했지만, 검성의 제자는 예상 밖의 신분이었다.
“이제 가도 되겠습니까?”
이윤후는 나무 뒤에 눕혀 놓았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을 양쪽 어깨에 둘러업고는 이야기했고, 윤영찬이 노려보기만 할 뿐 말이 없자 그냥 그 자리를 떴다.
윤영찬과 사원칠수는 더는 이윤후를 추격하지 않았고, 사라지는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보았다.
“당주님, 미후왕께서 아신다면 문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사원칠수의 한 사람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윤영찬에게 말했다.
“하필 그분이 련으로 돌아가셨을 때 이런 일이 생기는지 모르겠군. 하지만 그분이라면 크게 화를 내시지는 않을 거야. 아마도…….”
“네? 그게 무슨……?”
윤영찬에게 물었던 사원칠수 중 한 사람은 그의 대답에 의아한 듯 다시 물었지만, 윤영찬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옅은 미소만 띤 채 이윤후가 사라진 방향을 주시하고만 있었다. 사원칠수는 그런 윤영찬의 의중을 알지 못해 미후왕이 돌아온 후에 생길 일을 걱정 중이었다.
* * *
이윤후가 잡혀갔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구해 오자 남궁나연은 오랜만에 연회 열기로 했다.
매번 사왕련의 시비에 당하기만 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에게 위로의 자리를 마련하기 위한 자리였다.
오랜만에 열리는 연회에 남궁세가는 분주하게 움직였고, 가까운 정파 문파의 사람들에게도 초대를 하기도 했다. 남궁세가의 최근 위세가 좋지 못해서 이미 안휘성 일대의 정파들 대부분이 사왕련에게 굴복했지만, 아직까지 남궁세가의 뒤를 받쳐 주는 문파도 남아 있었기에 그들과 친목을 다지기 위한 자리이기도 했다.
저녁이 되자 남궁세가는 연회로 북적이기 시작했고, 커다란 광장은 마련된 술자리로 시끌시끌했다.
이윤후는 남궁나연의 배려로 같은 자리에 배석이 되었고, 찾아온 정파 사람들과 남궁세가의 사람들에게 소개되어 큰 환영을 받았다.
남궁인이 무림맹의 임시 맹주 자리에 있기는 했지만, 무림맹에서 남궁세가의 위기에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었고, 남궁인은 힘이 없었다.
남궁세가 사람들은 물론 안휘성 일대의 정파 사람들은 무림맹과 다른 정파들이 자신들을 희생양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는데, 검성의 제자가 남궁세가를 돕기 위해 방문해 줬다는 사실은 그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남궁나연이 연회를 크게 벌인 이유도 이윤후의 존재를 이용하려는 의도가 강했고, 그녀의 의도는 현재까지 성공적이었다.
“혹시 기분이 나쁘신 것은 아니지요?”
소항회의 회주가 다녀간 후, 드디어 인사치레가 끝난 남궁나연은 옆에서 힘든 표정을 보이고 있는 이윤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제 기분이요?”
“네. 이 소협을 이렇게 이용하는 제가 영악하다고 생각하시죠?”
남궁나연의 말에 이윤후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실 그도 이미 남궁나연이 연회를 크게 벌인 이유가 자신과 검성의 이름값을 빌려 세가의 결속과 아직 등을 돌리지 않은 정파들의 힘을 모으기 위함임을 눈치채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이렇게까지 해야 할 상황이라는 사실에 조금 놀랐을 뿐입니다.”
이윤후의 담담한 말에 남궁나연은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할아버지가 계실 적에는 남궁세가가 오대세가의 으뜸이자 정파무림에서 최고의 세력이었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보시다시피 남의 이름을 빌려야 할 정도로 쇠약해져 있어요.”
남궁나연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의 술을 들이켜고는 이윤후를 빤히 보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에게서 저희 세가원들을 쉽게 데려온 것이죠?”
남궁나연은 이윤후가 돌아왔을 때부터 궁금하여 물었지만, 이윤후는 대답해 주지 않았기에 술기운에 다시 한번 물었다. 속 쓰린 세가의 사정 이야기를 더는 하고 싶지 않았기에 말을 돌릴 의도도 있었다.
“그건…….”
콰광―
이윤후가 입을 여는 순간, 갑자기 폭음이 남궁세가를 울렸고 모두 놀라 일어났다.
“검성의 제자 놈은 이리 나오너라!!”
폭음이 들렸던 남궁세가의 입구 쪽에서 큰 음성이 울렸고, 내공이 실린 음성은 대전에 모여 있는 모든 이를 경악하게 했다.
“크흑…… 엄청난 내공의 소유자로군요.”
사자후에 내공이 낮은 이들은 주저앉아 있었고, 시중을 들던 시종과 하녀 중엔 귀에서 피를 흘린 채 혼절한자들까지 있었다. 그만큼 엄청난 사자후였다.
“남궁 소저는 제 주위를 벗어나지 마십시오.”
이윤후는 자신을 찾던 사자후의 주인공이 대전 쪽으로 다가옴을 느끼고 있었다. 누군지 모르지만, 상대가 엄청난 기운을 내뿜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여기 다 모여 있었구나?”
대전에 나타난 이는 붉고 짧은 머리를 지닌 노인이었고 자신의 머리 색과 어울리는 적색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전혀 도인과는 거리가 있어 보였다.
“저자는…….”
“미후왕(美?王)…… 사왕련의 사왕이 나타났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쳤다. 워낙 특이한 모습이라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했다.
순식간에 대전은 조용해졌고, 그 침묵이 마음에 드는지 미후왕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이윤후를 발견하고는 터벅터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마 네놈이 검성의 제자겠지?”
이윤후는 다가오는 미후왕을 향해 자신도 다가가기 시작했다.
미후왕이 이곳에 온 이유가 자신임을 안 이상 물러설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치는 상황을 바라지 않았고, 괜히 남궁나연이 자신의 곁에 있다가 싸움에 휩쓸릴 가능성이 있어 스스로 나선 것이었다.
“사왕련의 사왕께서 이곳까지 절 찾아오신 겁니까?”
이윤후는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고 미후왕도 걸음을 멈춘 채 이윤후를 바라보았다.
“네놈이 내 수하들을 상처 입히고 잡아 놓은 자들을 데려갔다고 들었는데, 그것만으로 널 찾아올 이유는 충분하지 않느냐?”
“애초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잡아간 것은 그들이니, 제가 데려온 것은 잘못이 아닌 듯합니다.”
“크크…… 제법 말솜씨가 있구나? 사실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니 소모적인 말싸움은 그만하고 싶구나.”
미후왕은 나이가 든 노인이었으나 건장한 체구였고, 키도 이윤후와 차이가 없을 정도로 컸다. 그의 붉은 머리 탓에 인상은 강했고, 눈빛마저 날카로워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은 오금이 지릴 정도였다.
그런 미후왕과 논쟁을 벌이며 대등하게 맞싸움을 하는 이윤후의 모습에 지켜보던 모든 이들은 이윤후를 마음속으로 응원하고 있었다. 괜히 소리 내었다가 미후왕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전혀 내색은 하지 못한 채 말이다.
“그럼, 그쪽이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너를 혼내 주기 위해서다.”
“저를요?”
이윤후는 대충 말의 흐름과 정황상 미후왕의 용건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네 사부라는 사람에게 용건이 있다만, 그를 만나려면 널 사로잡을 필요가 있겠지. 그래서 찾아왔다.”
미후왕은 가슴을 탕탕 치며 자신 있게 말했고, 그런 미후왕의 자신감에 이윤후는 헛웃음을 삼켜야 했다.
“저를 사로잡겠다 했습니까?”
파바밧―
이윤후의 말과 함께 수많은 인원이 이윤후와 미후왕을 포위하며 들어왔다.
“죽고 싶지 않으면 물러나라. 오늘 용건은 너희한테 있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그들을 포위한 인물들은 바로 남궁세가의 자랑인 창룡단이었고, 수십의 청의 무사들이 검을 뽑아 들고 미후왕을 포위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