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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 돌아오다-123화 (123/251)

123화― 남궁세가의 비사(秘史)

아직 어린 나이의 그녀였지만 성숙미가 있었고, 아름다운 그녀의 모습에 이윤후는 살짝 넋을 잃고 있었다.

“이리 앉으세요.”

“오랜만입니다. 남궁 소저.”

남궁나연의 말에 정신을 차린 이윤후는 그녀의 맞은편 자리에 앉았고, 그녀는 따르던 찻잔을 이윤후에게 건네며 배시시 미소를 보였다.

“일전에 만나 뵙고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다시 보는군요.”

이윤후는 일전에 봤던 남궁나연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의심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조금 낯설어했고, 그런 이윤후의 마음을 아는지 남궁나연도 미소 지었다.

“창연입니다.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들어와.”

남궁나연의 허락이 떨어지자 창연이 무언가를 들고 들어왔고, 한 장의 서찰을 남궁나연에게 내밀었다.

“무엇이지?”

“사왕련의 미후왕(美猴王)이라는 자가 보낸 것입니다.”

“일전에 소란을 일으켰던 그자인가?”

창연의 말에 남궁나연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물었다.

“네. 그자들이 남궁세가의 무인 둘을 사로잡아 갔는데, 한 명을 전령으로 서찰과 함께 보냈습니다.”

“음…… 잠시 실례할게요.”

남궁나연은 이윤후를 앞에 두고 너무 자신들만 이야기하자 그에게 양해를 구했고, 이윤후는 따로 상관하지 않았기에 조용히 차를 들고 있었다.

남궁나연은 서찰을 뜯어보았고, 이내 표정이 창백해졌다.

“무슨 내용입니까?”

창연은 남궁나연이 서찰을 읽고 심각한 표정을 짓자 걱정스럽게 물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을 살리고 싶다면 우리의 안휘성 지배권을 넘기라는 내용이야.”

“그렇게까지…….”

창연은 남궁나연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이미 사왕련의 횡포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었고, 시비를 걸어오면서 계속 남궁세가의 이권에 대해 넘보고 있었다.

남궁세가 주변의 여러 정파들이 이미 사왕련에게 굴복했고, 그나마 남궁세가의 그늘에 있는 문파들만이 겨우 저항하고 있을 뿐이었다.

“이미 사왕련은 안휘성 일대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오고 있습니다. 이번 요구는 절대 들어줘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고 그들과 전면전을 벌이란 말이야? 이미 남궁세가를 따르던 이들마저 이번 사왕련의 선포로 인해 등을 돌리고 있어. 아버지도 안 계신 마당에…….”

남궁나연은 울 듯한 표정으로 말했고, 이윤후는 그제야 그녀의 분위기가 바뀐 이유를 알 거 같았다.

‘천방지축 아가씨처럼 보이더니…… 책임감에 이렇게 바뀐 거였군.’

이윤후의 짐작처럼 남궁나연은 아버지이자 가주인 남궁인이 무림맹으로 떠나고 스승이었던 안명까지 떠나자 혼자 남궁세가를 뒷받침해야 했다.

사왕련의 선포가 있기 전까지야 괜찮았지만, 그들의 선포 이후 남궁나연은 세가의 위협을 혼자의 결정으로 세가를 지켜 나가야 했고, 자연스럽게 어른스러워질 수밖에 없었다.

“사왕련과 무력 충돌이 있는 겁니까?”

듣고만 있던 이윤후가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전면적으로 부딪치는 것은 아니지만 사왕련과 사파에서 계속 저희의 영역에 들어와 시비를 걸고 꼬투리를 잡고 있습니다. 이번 저희 사람들이 잡혀간 것도 정작 저쪽에서 우리 영역에 들어와 시비를 걸어 벌어진 일인데, 오히려 우리 쪽이 시비를 걸었다고 말하고 있는 경우이고요.”

“이거 사부님이 먼저 저를 이곳으로 보내신 이유를 알 듯하군요.”

이윤후는 검성이 급하게 자신을 먼저 이곳에 가라고 했을 때는 조금 의아해하며 일단 오긴 왔지만, 이제 보니 꽤 상황이 심각해져 있음을 알았다.

무림맹에서 의견을 조율하고 이미 사왕련에 회담을 제의했지만, 여전히 대답은 미룬 채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 일부러 충돌을 일으키려 하는 모양새였다.

천통자를 통해 남궁세가의 어려움을 들은 검성은 자신이 움직이기 힘들어 미리 이윤후를 이곳으로 보낸 것이었다.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이 소협이요?”

“남궁세가에서 직접 나서게 되면 문파 간 그리고 세력 간의 충돌로 비화할 가능성이 높으니 제가 움직이죠. 제 얼굴도 알려져 있지 않고요.”

“그렇지만…… 위험하실 것인데…….”

이윤후의 말에 남궁나연은 기뻤지만, 괜히 이윤후를 자신들의 위험 속에 끌어들이는 것 같아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이윤후의 말 자체는 남궁나연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스승님께서 남궁세가의 일에 적극적으로 도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보낸 것이고요.”

이윤후의 말에 남궁나연은 창연을 바라보았고, 선뜻 혼자 결정을 내리기 어렵기에 의견을 구한 것이다.

“방금 스승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혹시 검성께서 아직 건재하신 겁니까?”

“아…… 제가 그렇게 말했습니까?”

이윤후는 자신도 모르게 검성에 대해 말한 것을 인지했고, 말실수를 했음을 알았다. 창연은 계속 이윤후가 처음엔 사형의 말에 의해 찾아왔다고 했지만, 조금 전부터 검성이 직접 시킨 것처럼 이야기하자 의아해하고 있었다.

“스승님께서 사형과 저에게 늘 남궁세가의 비월검공과 인연을 이야기하셔서…… 제가 그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려다가 실수한 듯합니다. 하하…….”

이윤후는 얼버무리려 했지만 남궁나연과 창연은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보았고, 이윤후는 어색한 웃음을 지어야 했다.

“흠…… 일단 남궁세가의 잡힌 무인을 구해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두 사람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이자 이윤후는 말을 돌리듯 이야기했다.

“지금 현재 그들은 어디에 잡혀 있죠?”

“현재 황산 아랫마을에 있습니다.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을 보내 두었습니다.”

“그런데 사왕련은 어디에 있습니까?”

“사왕련은 이곳의 반대편 위치에 있습니다. 황산에 자리 잡고 있지만, 서로 마주 볼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사왕련의 위치는 접근하기 힘듭니다.”

창연의 말에 이윤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애초에 남궁세가가 황산에 자리 잡고 있는데, 어째서 사파의 문파가 황산에 자리 잡을 수가 있었던 거죠?”

이윤후는 궁금한 것을 묻기 시작했다. 애초에 사왕련 이전의 사마련과 남궁세가가 황산에 함께 자리 잡고 있는 것 자체가 의문이었다.

“그건 사왕련으로 이름이 바뀌기 전 사마련의 역사와 관련이 있어요.”

이윤후의 물음에 남궁나연이 답했고 이윤후는 그녀를 보았다.

“사마련에 대해서는 아시나요?”

“자세히는 모르지만 듣기는 했습니다.”

이윤후는 유인경에게 들어서 사마련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긴 했지만, 그 역사와 자세한 것들은 몰랐다.

“사마련을 만들고 사파를 규합한 흑월도존 유상휘는……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원래는 정파의 인물이었어요.”

“네?”

남궁나연의 말에 이윤후는 깜짝 놀라 되물었고, 창연은 남궁나연이 이야기해 주는 것이 못마땅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정확하게는…… 흑월도존 유상휘는 남궁세가의 사람이었어요.”

“…….”

남궁나연의 이어진 말이 놀라워서 이윤후는 입이 딱 벌어졌다. 어느 정도 사연이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이윤후가 생각하던 예상을 넘는 말이었다.

“할아버지는 어릴 적 좋아하던 사람이 있었어요.”

남궁나연의 말이 이어졌고, 이윤후는 집중하기 시작했다.

비월검공 남궁학은 어릴 적부터 좋아하던 여인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여인은 작은 사파의 문주의 딸이었다. 가문이 반대할 것을 염려해 서로 몰래 만났고, 그 인연은 수년간 이어졌다.

하지만 남궁세가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남궁학에 정파 여러 문파에서 자신의 딸과 남궁학을 이어 주려고 줄을 대었고, 남궁세가에서는 그중 한 여인을 뽑아 남궁학을 혼인시키려 했다.

하지만 좋아하는 여인이 있었던 남궁학은 혼인을 거부했고, 남궁세가에서 남궁학이 사파의 여인과 만나는 것까지 알게 되었다. 그것이 정파에 알려질 것을 염려한 남궁세가에서 그 사파를 무림에서 없애 버렸고, 남궁학은 그 사실을 알고 세가를 원망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세가를 저버리기엔 그는 나약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남궁학은 비월검공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무림에서 검으로 명성을 쌓았고, 남궁세가 역시 승승장구하며 명성을 높여 갔다.

남궁학이 젊은 나이에 세가주가 되었을 때, 한 소년이 남궁세가에 찾아와 그를 찾았다. 그것이 바로 유상휘였다.

그는 자신이 남궁학의 아들이라고 밝혔고, 남궁학도 그를 처음 만나자마자 유상휘가 자신의 아이란 것을 알아보았다. 자신이 사랑했던 여인을 꼭 닮아 있는 아이였기 때문이었다.

세가에는 측근에게만 알린 채 유상휘를 비밀리에 보살피며 거두었지만, 그의 존재는 남궁세가의 분란의 원인이 되었다. 남궁학의 아내는 현명했지만 다른 이들이 유상휘의 존재를 가만두려 하지 않았고, 남궁학에게 늘 그를 내쫓아야 한다고 말했다.

남궁학은 유상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황산에 위치한 남궁세가의 밀지로 그를 보내어 무공을 수련하고 지내게 했고, 수시로 들러 그를 살펴주었다.

하지만 그런 남궁학이 못마땅했던 남궁세가의 장로 중 하나가 유상휘를 죽이려 들었고, 결국 유상휘는 남궁세가의 밀지에서 상처를 입고 도주를 했다.

자신의 어머니는 유상휘가 남궁세가의 일원이 되길 바랐지만, 남궁세가에서 그것을 허락지 않는다는 것을 안 유상휘는 어머니의 신분으로 살기로 결심을 했다.

그 당시는 오절의 명성으로 인해 사파는 힘을 잃고 있었고 정파가 득세하는 시절이라, 사파는 정파에게 늘 당하는 게 일상이었다.

그것을 본 유상휘는 사파의 힘을 모아 자신을 핍박하고 어머니의 가문과 문파를 멸한 남궁세가에게 복수하겠다는 결심을 했다.

남궁세가의 검법을 부정하며 유상휘는 도를 들었고, 남궁세가의 밀지에서 익혔던 무공과 아버지인 남궁학이 알려 준 무공을 바탕으로 새로운 무공을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그것을 대성했을 때, 그는 사파를 하나씩 규합하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 아래 사파가 모두 무릎을 꿇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았다.

사마련이라는 이름을 올리고 새로운 문파를 만들었을 때, 과시하듯이 남궁세가가 있는 황산에 자리 잡았고 남궁세가의 밀지에 사마련을 세웠다.

유상휘가 사파일통을 하고 정파마저 넘볼 때 가장 위험했던 것이 남궁세가였다. 그 당시 남궁학이 병상에 있었고 남궁학이 늦은 나이에 얻은 아들은 어렸다.

유상휘가 남궁세가를 찾았을 때, 남궁세가는 사마련의 정예를 막을 힘이 없었다.

하지만 유상휘는 남궁세가를 멸하지 않았고, 병상에 있는 남궁학과 몇 마디 나누고는 남궁세가를 떠났다.

그가 떠나며 남겼던 말은 남궁세가는 사마련의 무림일통의 가장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유상휘가 무림일통의 발걸음을 시작할 무렵 마교에서 움직였고, 그들을 막기 위해 정파와 힘을 합치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남궁나연의 긴 이야기가 끝이 나자, 이윤후는 그제야 모든 것이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황산이라는 곳에 남궁세가와 사마련이 자리 잡게 된 이유도, 그간 큰 다툼이 없었던 이유까지도 말이다.

하지만 유상휘가 물러난 사왕련은 지척에 있는 남궁세가가 눈엣가시와 같을 수밖에 없었고, 계속 시비를 걸며 큰 싸움을 일으키려 하는 것이었다.

“사왕련에서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는 이유가 있나요?”

이윤후로서는 굳이 힘을 쓰지 않고 작은 시비를 계속 걸며 빌미를 잡으려는 사왕련의 행동이 조금은 이해가 가지 않았기에 물었다.

힘을 가진 사왕련이라면 남궁세가와 전면전은 피해를 보긴 하겠지만, 그렇게 꺼려 할 부분은 아닌 거 같았다.

“아마도 사파가 현재 사왕련의 이름 아래 뭉친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일 거라 생각하고 있어요.”

“사왕련의 독고진이 사파를 아직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군요.”

“네. 남궁세가의 명성이 예전 같지는 못해도 오대세가의 한 곳이고, 우리와 싸움을 시작한다는 것은 정파와 전면전을 시작하는 것이니 쉽게 결정을 못 내리고 있는 거 같아요.”

남궁나연의 말에 이윤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이 옳다고 여겼고, 이전에 검성에게 들었던 무림의 상황과 일치하는 듯했다.

“그럼 일단 미후왕인지 하는 원숭이 왕에게 남궁세가의 사람들을 찾아오는 것부터 해야겠군요.”

이윤후는 남궁나연의 이야기를 듣고 한참 생각하더니 말했고, 그의 자신 있는 말투에 남궁나연은 살짝 미소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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