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2화― 재대결(再對決)(2)
스스스―
조준혁의 오른손에 하얗게 냉기가 서렸다. 그는 오른손을 자신의 옆구리 상처에 가져다 대었다. 피가 흐르던 상처가 마치 냉각되듯이 피가 굳어 갔고 이내 피가 멈추었다.
“비무 중에 상대 걱정은 접어 두는 것이 좋겠군요…….”
조준혁은 살짝 찡그리며 이윤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임기응변으로 피를 멈추게는 했지만, 이미 많은 피를 흘렸고 완벽한 치료법이 아닌지라 언제 상처가 벌어질지 몰랐다.
이윤후도 조준혁이 걱정스럽긴 했지만, 생각을 털어 버린 채 검을 들었다.
“그럼, 사양치 않고 다시 가겠습니다.”
이윤후는 이 대결을 얼른 마무리 짓는 것이 조준혁을 위한 일이라 여겨 검을 들었지만, 그것은 오만한 생각이었다.
촤장―
찰나의 순간, 조준혁은 어느새 다가와 검을 내질렀고 이윤후는 놀라 검을 들어 막았다.
채쟁― 챙―
조준혁의 검이 점점 빨라졌다. 급소만 노리며 찔려져 왔고, 이윤후는 가까스로 검을 피하거나 막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쾌검의 싸움은 순간적인 판단의 실수로 승패가 갈릴 수 있었기에 이윤후는 상황에 몰두하며 점점 상황에 적응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가까스로 막았으나, 점점 이윤후는 편안하게 막기 시작했고, 오히려 그런 모습에 조준혁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놀란 것은 조준혁뿐만이 아니었다. 지켜보던 단지경과 유인경 모두 처음엔 조준혁을 걱정하고 있었지만, 조준혁이 쾌검으로 몰아붙이자 이길 수도 있겠다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생각은 길게 가지 못했다.
“마치 준혁의 모든 것을 흡수하는 듯하군요.”
단지경이 이윤후의 실력을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지금 느낀 감정은 딱 이것이었다.
“잘 보았구나.”
말이 없던 검성이 단지경의 말에 답해 주었다.
“윤후는 아직 경험적인 측면에서 많이 모자라지. 갑작스러운 일의 대처에 아주 약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배우려는 자세가 되어 있기에 새로운 상황에 대처가 빠를 수밖에 없지 지금처럼 말이야.”
“그래도 분명 처음엔 막기에 급급했던 검을 어찌 저렇게 수월하게 막을 수가 있나요?”
조준혁이 몰아붙이기 시작하자, 유인경은 이윤후가 일방적으로 당했던 그때를 떠올렸었다. 하지만 이윤후는 그때와 다르게 금세 적응했고 지금은 오히려 공격을 먼저 하기 시작했다.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윤후는 내가 평생을 걸쳐 만든 무공을 단 오 년 사이에 익힌 아이다. 이전의 패배도 내공이 뒷받침되었다면 절대 지지 않았을 거야. 내공이 부족하여 쓰고 싶은 초식을 쓰지 못해 패했을 뿐이지.”
검성은 약간 자랑 섞인 말을 하고는 두 사람의 싸움에 시선을 두었다.
공격을 주도하던 조준혁은 어느새 반대로 막기에 급급한 상태가 되어 있었다. 수비에 적응한 이윤후가 검을 내기 시작하면서 조준혁은 뒷걸음질 치면서 막아 내기에 바빴고, 그의 의복은 미처 막지 못한 검에 찢어져 맨살을 드러내고 있었다.
“크흑…… 이럴 수가…….”
조준혁은 자신을 향해 날아드는 이윤후의 검을 어렵게 쳐 내고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큰 상처를 입었지만, 자신이 대결에서 불리할 것이 없다 여겼다. 기세를 잡았다 생각했는데, 어느 순간부터 기세는 이윤후에게 넘어가 있었다.
겨우 반격을 하던 이윤후가 오히려 이제 공세를 주도하고 있었고, 밀려나던 조준혁은 어느새 벽을 등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굴욕적인 것은 이윤후가 자신의 몸을 염려하여 손속에 정을 두고 있다는 점이었다.
“더 하셔야 합니까?”
채앵―
이윤후는 벽까지 몰아붙인 조준혁에게 말했고, 그의 말에 조준혁의 마음이 꺾인 듯 잡고 있던 검을 바닥에 떨구었다.
그와 동시에 단지경이 두 사람 사이로 뛰어들었고 바로 조준혁의 혈도를 집어 나갔다. 조준혁이 스스로 출혈을 잡았던 옆구리 상처에서 다시 피가 흐르고 있었고 이에 단지경이 급히 개입한 것이었다.
조준혁은 단지경이 혈도를 잡자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이미 많은 피를 흘린 그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었는데, 패배를 인정하고 나자 기절을 한 것이었다.
“일단 밖으로 나가시죠.”
단지경이 조준혁의 상태를 염려하여 검성과 이윤후를 바라보고 이야기했고, 어느새 검성이 다가왔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다. 출혈 때문에 정신을 잃은 것이니 일단 바닥에 앉혀 보아라.”
“아…… 네.”
단지경은 검성의 말에 조금 어리둥절했으나 일단 그가 시키는 대로 정신을 잃은 조준혁을 앉혔고, 검성은 그의 등 뒤에 앉았다. 그제야 이윤후와 유인경은 검성이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채었다.
유인경이 어느새 이윤후 곁으로 다가와 그의 팔을 끌며 말했다.
“오행을 이용한 치료법을 쓰려는 거군요.”
“그런 듯하네요.”
“그게 무엇이죠?”
단지경이 그들에게 묻자 유인경은 살짝 답을 망설이며 이윤후를 바라보았다. 유인경은 이미 오행 치료법에 대해 경험을 해 보았기에 그 효능을 알고 있었다.
“사부님께서 창안하신 오행을 기초로 한 무공이 있는데, 무공을 달리 활용하면 치료법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아마 사부님께서는 조 대주에게 그것을 하시려고 하는 듯합니다.”
“궁주님, 저 치료법이 보통의 치료법과는 달라요. 아마 조 대주에게 엄청난 기연이 될 거예요.”
단지경이 이윤후의 설명에 조금 믿지 못한 듯한 반응을 보이자 유인경이 나서서 말했고, 단지경으로서는 어찌 되었든 조준혁의 안전이 우선이었기에 그가 무사하길 바라며 검성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검성은 정신을 잃은 조준혁의 등 뒤에 오른손을 가져다 대고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역시 물의 기운이 강하구나. 하지만 너무 지나쳐.”
검성은 조준혁의 몸에 수기(水氣)가 강함을 알았다. 어찌 보면 빙공(氷功)을 사용하는 빙궁의 대주답게 당연하기도 했다. 하지만 검성의 말처럼 조준혁의 몸에는 수기가 지나칠 정도로 많은 부분 차지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목기와 금기가 체내에 부족했다.
스스스―
조준혁의 등에 댄 검성의 손이 희미한 빛이 났고, 시간이 흐르자 창백해졌던 조준혁의 안색이 조금씩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검성은 조준혁에게 부족한 목기와 금기를 채워 주었고, 몸 안의 기운들이 안정화되자 회복 속도가 빨라지면서 조준혁의 혈색도 돌아오게 되었다.
“단 궁주.”
“네. 검성 어르신.”
단지경은 검성의 부름에 다가갔다.
“우선 몸의 급한 기운을 안정화시켰으나 피를 많이 흘린 터라 회복이 빠르진 않을 것이다. 며칠은 피를 생성할 수 있는 음식과 약을 쓰도록 해라. 그쪽은 내가 잘 모르니 의원에게 물어보고.”
“아…… 네. 알겠습니다.”
단지경은 조준혁을 부축하고는 조금 신기한 듯 그를 살피었다. 확실히 자신이 혈도를 잡았을 때에 비해 혈색도 좋아지고 생기가 도는 조준혁의 모습이 놀라웠다.
“이제 올라가지. 우리도 오래 이곳에 머물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벌써 가십니까?”
검성의 말에 단지경은 아쉬운 듯 되물었다.
“무림의 상황은 그대도 알지 않나? 다음에 여유가 있을 때 다시 오도록 하지.”
“네. 그럼 나중에 꼭 다시 들려 주십시오.”
이윤후는 다가가 조준혁을 업었고, 단지경은 앞장서서 지하동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 * *
남궁세가(南宮勢家).
현재 남궁세가는 세가주인 남궁인이 무림맹의 임시 맹주가 되면서 세가주가 공석이었는데, 사파들이 남궁세가 영역까지 세력을 넘어오면서 크고 작은 다툼이 끊이지 않고 있었다.
사왕련에서 황산과 그 일대가 자신들의 영역이라는 선언을 하면서 남궁세가가 속한 안휘성 일대까지 그들의 영역에 포함되었다.
그 선언이 있고 나서 사파들이 남궁세가의 영역을 넘어오는 일이 잦아졌고, 세가주가 부재 중인 남궁세가에서는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런 남궁세가에 이른 아침부터 방문자가 찾아왔다.
“누구시오?”
남궁세가의 정문을 지키던 무사들은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사내를 향해 경계를 풀지 않은 채 물었다.
요즘 워낙 일대가 시끄럽다 보니 남궁세가 무사들의 경계심은 한층 높아져 있었고, 찾아온 손님한테마저 경계를 하고 있었다.
“전 검성의 제자인 이윤후라고 합니다. 남궁세가에 볼일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사내의 말에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찾아온 이는 바로 이윤후였다. 그는 북해빙궁에서 검성과 유인경과 함께 무림으로 돌아온 후, 검성의 명령에 따라 혼자 남궁세가로 와 있었다.
정체를 밝힌 이윤후를 이리저리 살피던 남궁세가의 무사들은 한 명이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갔고, 남은 한 명은 이윤후를 계속 살피고 있었다.
“일전에 찾아왔던 남궁세가의 제자와는 다른 분이군요?”
“아…… 그건 사부…… 아니, 제 사형입니다.”
이윤후는 남궁세가의 무사가 말하는 이가 검성이라는 것을 알았기에 적당히 얼버무렸다. 이미 검성에게 당시 남궁세가를 방문했을 때 소란이 있었음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들이 가볍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남궁세가 안으로 들어갔던 무사가 누군가를 데리고 나왔다. 그는 바로 남궁인이 세가에 있을 때 시중을 들던 창연(蒼鳶)이었다.
“검성의 제자분이시라고요?”
창연은 이윤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네. 일전에 제 사형이 찾아왔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전 이윤후라고 합니다.”
“안 그래도 아가씨에게 그 이름을 들었던 거 같군요. 제가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창연은 이윤후에게 경계심을 풀며 안으로 안내했다. 이윤후는 살짝 창연의 시선에 불쾌한 기분도 들었지만 현재 남궁세가의 상황을 알고 있었기에 이해하고 넘어갔다.
‘보통 인물은 아닌 듯하군.’
이윤후는 창연의 뒤를 따르면서 그가 평범한 안내역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로 약속을 하고 오신 것은 아니지요?”
창연은 걸으며 이윤후를 바라보지도 않은 채 물었다.
“네. 사부…… 아니, 사형께서 남궁세가가 어려운 사정이 있으니 제가 먼저 가서 도우라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이윤후의 말에 창연은 말을 멈추었다.
“저희를 돕기 위해 오신 거였군요. 제가 그것도 모르고…….”
창연은 한결 부드러워진 말투로 돌아보며 이야기했고 그의 바뀐 태도에 이윤후는 어리둥절해했다. 하지만 이내 창연은 다시 앞장서서 안내하기 시작했고, 이윤후는 그런 창연의 태도에 살짝 어이가 없었으나 묻지 않고 그를 따라갔다.
“이곳은 연화원(蓮花院)입니다.”
창연의 말에 이윤후는 주위를 둘러보자 곳곳에 꽃과 나무가 가득해 마치 화원에 온 듯했다.
“현재 가주 대리를 하고 계시는 남궁나연 아가씨의 거처입니다. 모셔 오라고 했으니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아…… 현재 그분이 가주 대리를 맡고 있습니까?”
이윤후는 서안으로 가는 길에 만났던 남궁나연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기억하는 남궁나연은 절대 세가주 대리에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기에 의아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압니다. 아마 만나 보면 놀라실 겁니다.”
창연은 이윤후의 말의 의도를 안다는 듯 이야기했고 ,이윤후는 살짝 민망한 듯 표정을 보였다.
꽃과 나무의 길을 지나 연화원의 건물에 도착하자 창연은 문 앞으로 가 기척을 했다.
“검성의 제자인 이윤후 소협께서 오셨습니다.”
“안으로 모시도록 해라.”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안에서 청아한 음성이 들려왔고, 창연은 이윤후에게 안으로 들어갈 것을 권했다.
이윤후로서는 여인이 혼자 있는 방에 혼자 들어가는 것이 꺼려졌으나, 창연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고, 결국 이윤후는 혼자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 안으로 들어서자 남궁나연이 차를 따르며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 보았을 때도 아름답고 단아한 여인으로 보였던 남궁나연이었지만, 잠시 못 본 사이에 더욱 기품 있고 아름다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