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지은보은(知恩報恩)(1)
화산 조양봉.
사람의 인적이 드나들지 않는 깊은 산속 작은 폭포 아래 누군가 전라(全裸)의 모습으로 폭포수를 견뎌 내며 서 있었다. 사내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폭포수 아래 한참을 그렇게 있었고, 반 시진이 지나서야 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걸어 나오는 사내는 바로 검성 나진하였다. 그는 물 밖으로 나오자 하늘을 바라보며 물기를 털어 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츠츠츠―
발가벗은 검성의 몸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순식간에 몸의 물기가 수증기가 되어 사라져 갔다.
물기가 마르자 검성은 한쪽에 벗어 두었던 옷가지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고 옷을 챙겨입기 시작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었나?”
검성은 다시 한번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해가 이미 중천에 떠 있었다. 검성은 약선의 거처로 돌아온 후 이윤후의 수련을 도와주고 나머지 시간을 이곳에 찾아와 자신의 수행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의 무공이 이미 등선(登仙)의 단계로 접어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많은 시간을 자연의 기척에 녹아들며 명상을 하는 것으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이렇게 자연과 동화될수록 체내에 힘이 축적되고 있음을 검성은 느끼고 있었고, 더욱 많은 시간을 이렇게 보내고 있었다.
옷을 챙겨입은 검성은 다시 하늘을 보았다. 그의 머리 위에는 백아가 선회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검성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간다, 이 녀석아.”
백아가 느릿느릿 움직이는 검성에게 보채듯이 선회하는 속도를 올리자 검성은 하늘을 향해 소리쳤다. 백아가 검성을 찾아온 이유는 밥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수행하느라 끼니때를 늘 챙기지 않는 검성을 챙기기 위해 약선은 백아에게 늘 검성을 데려오라고 부탁했고, 백아는 늘 이렇게 밥때가 되면 검성을 찾아와 보채고 있었다.
검성은 딱히 허기를 느끼지 않았기에 늘 수행을 하다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고, 약선은 검성이 자신에게 머물 때만이라도 같이 식사라도 하고 싶었기에 백아에게 부탁을 해 수행하는 검성을 찾아 데려오는 일을 맡겼다.
검성이 백아를 한번 바라보고는 약선의 거처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고, 백아도 그런 검성을 하늘 위에서 따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하게 걷는 듯했지만 금세 약선의 거처에 도착할 수가 있었다. 검성이 도착하자 백아는 자신의 임무를 마쳤다는 듯이 유유히 멀리 날아가 버렸다.
“백아가 찾아가기 전에 미리미리 좀 올 수는 없나요?”
사라지는 백아를 바라보던 검성은 뒤에서 들리는 말소리에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약선이 나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허기를 느끼지 않으니 밥때를 매번 놓치게 되는군.”
검성은 약선을 바라보며 미소를 보이며 말했고, 그 미소에 약선은 얼굴을 붉혔다.
“얼른…… 들어와요. 이미 식사…… 준비를 다 해 두었어요.”
약선은 붉어진 얼굴을 매만지며 얼른 뒤돌아 모옥으로 향했고, 그 모습에 검성은 다시 한번 웃음을 보이며 그녀의 뒤를 따라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 맛있는 음식의 냄새가 가득했다. 바로 자리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딱히 먹지 않아도 될 만큼 이제 검성의 몸은 보통의 사람들과 달라져 있었지만, 아직은 먹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최근에 무림에 무슨 일이 있나?”
검성은 바쁘게 젓가락을 놀리다가 한마디 툭 던졌다.
“왜요? 돌아온 후 아무것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잖아요.”
약선은 검성의 물음에 살짝 놀란 듯 물었다. 사실 약선도 검성이 돌아오고 무림의 상황을 검성에게 몇 번 알렸으나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기에 더는 약선도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었다.
“최근 화산 아래 움직임이 꽤 활발한 듯해서 말이야.”
“화산 아래요? 화산은 그렇게 바쁠 일이 없을 텐데…….”
“무슨 일이 있긴 있나 보군.”
“이미 알고 있잖아요. 정파와 사파가 일촉즉발의 상황일 것을 말이에요.”
“아, 그 일인가? 생각보다 사파의 행동이 빨랐나 보군. 벌써 상황이 매우 급해진 것을 보면…….”
검성도 이미 상황은 알고 있었지만, 정파와 사파가 부딪치는 건 좀 더 나중이 될 줄 알았다. 사파의 성향상 쉽게 뭉치는 곳이 아님은 검성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사왕련이 힘을 모으고 있음은 알았지만, 시간이 좀 더 걸릴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정파는 이미 비상상황인 듯하더군요. 서안에 모든 정파의 수장이 모여서 회의를 한 달 가까이 하고 있는데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고 하네요.”
“뭘 의논하기에 그렇게나 이야기하는 건가?”
“사파에서 선언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그렇죠.”
약선은 한꺼번에 이야기해 줄 수도 있었지만, 검성과 식사를 하며 이렇게 말이 많은 적도 많지 않았기에 일부러 검성이 계속 묻도록 유도하고 있었다.
“무슨 선언을?”
“사왕련이 황산에 자리하고 있는데 안휘성 일대를 자신들의 본거지로써 관리하겠다고 선언했어요. 그 말인즉 그 일대 문파들에게 이권을 모두 내려놓고 자신들에게 복종하라는 뜻과 같죠.”
약선의 말에 검성은 살짝 놀란 표정을 보였고, 약선은 이미 예상하였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남궁세가와 그 일대 문파에서는 비상이 걸릴 수밖에 없어요. 무림맹에 모두가 모인 이유도 그 때문이죠.”
약선은 말을 하고는 검성의 반응을 살폈다. 검성이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였던 남궁학과 아주 친했음을 알았기에 검성이 이야기에 반응을 보일 것을 알고 있었다.
“남궁세가가 위험한가?”
검성의 낯빛이 바뀌며 물었다.
“아직은 그렇지 않지만 정사대전이 정말로 벌어진다면 가장 위험할 곳은 남궁세가가 될 거 같아요. 사왕련의 코앞에 있으니까요.”
“그렇군…….”
“안 그래도 오늘 남궁세가에서 사람이 절 찾아온다고 연통이 왔는데 당신도 같이 만나 보시겠어요?”
“남궁세가에서? 그대를 왜 만나러 온 것이지?”
“저야 잘 모르죠. 남궁세가의 안명이라는 자가 절 찾겠다고 미리 연통을 보내왔어요. 꽤 격식을 중요히 생각하는 사람 같아요. 찾아올 수도 있는데 연락을 하고는 하루 뒤 오겠다고 하는 걸 보면요.”
약선은 이미 안명의 연락을 어제 받은 상태였고, 그가 산 아랫마을에 하루 보내고 있음을 알았다. 그냥 찾아왔어도 될 일인데 미리 연락을 취하고 이렇게 예를 갖추는 것을 보아 보통 꼼꼼한 자가 아님을 알 수가 있었다.
“같이 만나 보시겠어요?”
약선은 말하며 검성을 보았다. 사실 안명이 찾아왔다는 연통을 받고 만나지 않으려 했지만, 남궁세가의 인물이라는 말에 검성이 관심을 가질 거 같아서 일단은 만나겠다고 의사를 전해 둔 상태였다.
빼액―
밖에서 설응의 울음소리가 울렸고, 그 소리에 검성은 반사적으로 밖을 보았다.
“손님이 올라오고 있는 모양이네요. 어떻게 할래요?”
약선은 자신의 설응에게 주위 경계하도록 명해 두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거처로 누군가 가까워져 오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이야기를 할지 궁금하긴 하군. 같이 들어도 괜찮을까?”
검성의 말에 약선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검성이 당연히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했지만 그래도 기쁜 건 어쩔 수 없었다.
늘 식사만 하고 수행을 한다고 나가 버려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지도 못했는데, 약선으로서는 이렇게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물론이죠. 일단 정리를 해야 하니, 잠시 나가서 손님을 맞이해 줘요.”
약선은 검성을 집 밖으로 보내며 식사를 한 것을 치우기 시작했고, 검성은 안명을 맞이하기 위해 오는 길을 거슬러 내려가기 시작했다.
약선의 설응이 오고 있는 안명의 머리 위로 날고 있었기에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 * *
‘보통의 인물이 아니구나…….’
안명은 자신의 호위를 하기 위해 데려온 무사 둘과 발걸음을 멈추었고, 다가오는 검성을 주시했다.
안명이 무공은 그리 뛰어난 인물은 아니었으나, 상대를 살피는 눈은 뛰어났다. 한눈에 검성의 특별함을 알아보았고 무사들에게 언질을 주어 함부로 대하지 못하게 했다.
약선이 지내는 곳이니 검성이 약선과 관련이 있는 자라고 생각한 안명은 다가오는 검성을 향해 먼저 예를 취했다.
“무림맹의 군사인 안명이라고 합니다.”
“어서 오십시오. 약선 어르신에게 이야기를 듣고 마중을 나왔습니다.”
검성은 자신의 소개를 생략한 채 이야기했고, 검성의 정체가 궁금했던 안명은 살짝 인상을 썼다. 보통은 소개하게 되면 반대쪽도 신분을 밝히기 마련인데 그냥 넘어간 게 기분이 안 좋았다.
그래도 부탁을 하러 온 안명의 입장에서는 불쾌함을 표하기는 힘들었고, 검성의 뒤를 따라올라가기 시작했다.
“혹시 저희가 방문하는 것을 약선께서 불편해하시지는 않던지요?”
안명은 검성의 옆에 따라붙어서 물었다.
“따로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그냥 데려오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남궁세가의 분들이라고 들었는데, 무림맹의 분이시라고……?”
“아…… 현재 무림맹의 군사를 맞고 있지만 남궁세가의 빈객이었습니다. 현재 맹주가 남궁세가의 가주이신 남궁인이신지라 제가 보좌하고 있습니다.”
“무림맹의 맹주가 남궁세가의 가주입니까?”
“네. 임시 맹주이긴 합니다.”
안명은 검성의 신분은 몰랐으나 산에만 있어 소식을 몰랐을 것이라 짐작했다.
‘남궁인이라면 내가 남궁세가에 갔을 때 만났던 아이로군…….’
검성은 남궁인이라는 소리에 정천검을 찾으러 남궁세가에 갔을 때 만났던 자라는 것을 기억했다.
이야기를 나눈 사이 어느새 약선의 거처에 도착했고 약선이 나와 있었다. 안명은 약선임을 알아보고 얼른 달려가 예를 표했다.
“무림맹에서 온 안명이라고 합니다. 약선을 이렇게 뵐 수 있어 영광입니다.”
“반가워요. 서문애령이라고 해요. 안 그래도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차를 준비했으니 안으로 들어가죠.”
서문애령이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말하자 안명은 그의 음성에 넋이 나간 듯한 표정을 보였다. 이미 백 살이 넘은 나이였지만 사십 대 정도의 고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고, 그녀의 음성이 특히 아름다웠다.
“당신도…… 아니, 너도 들어오렴.”
약선은 안명과 남궁세가의 호위 무사들이 있었기에 검성에게 말을 놓았지만, 그 찰나의 이상함을 안명은 놓치지 않았다.
약선을 따라 두 남자가 모옥 안으로 들어갔고, 안명을 따라온 호위 무사들은 밖에서 대기해야 했다.
모옥 안에 들어온 안명은 방 안에 가득한 약향(藥香)에 살짝 주위를 둘러보았고, 이내 손질 중이던 약초들과 약초 주머니들이 가득한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자리에 앉아요.”
약선은 두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고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차를 내주고는 자리에 앉았다. 안명은 제법 차에 대한 조예가 깊었으나 약선이 내준 차는 조금 생소했기에 향을 먼저 맡아보았다.
“차향이 정말 특이하군요. 이건 어떤 차죠?”
“봉황단총(鳳凰單叢)이라는 차예요.”
“아, 들어 본 적은 있습니다. 광동성의 봉황산에서 나는 청차라고 듣기만 했는데, 이렇게 약선 어르신 덕에 맛을 보는군요.”
안명의 말에 약선은 살짝 미소 지었다. 그의 말이 약간은 인사치레의 말인 것을 알았지만, 귀한 차라고 알아주니 제법 반가웠다. 늘 식사하고 검성에게 좋은 차를 주기 위해 서문세가에 연락해 귀한 차들을 공수해 왔는데 검성은 그것도 모르고 묻지도 않고 마시기만 했었다.
안명은 딱히 자신의 방문 목적은 이야기하지 않고 여러 가지 다른 이야기를 하며 약선과 대화를 이어 갔는데, 검성은 그 내용이 따분한지 말없이 듣기만 했다. 남궁세가의 일이 궁금했던 검성으로서는 본론을 꺼내지 않고 다른 이야기만 하는 두 사람이 못마땅하기도 했다.
“흠…… 약선 어르신을 만나러 온 것은 따로 이야기하려고 찾은 것이 아닙니까?”
결국 검성이 참지 못하고 안명에게 물었다. 약선과 소소한 이야기를 하던 안명은 검성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살짝 당황했으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찾아온 목적을 말하려고 입을 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