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월하남녀(月下男女)
월하(月下)의 두 남녀.
서로를 말없이 쳐다보고는 말이 없었다.
“정말 당신인가요? 진하(珍夏)……?”
얼굴을 면사로 가린 여인은 자기 앞에 선 사내를 보고는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물었다.
“가영(佳瑛)…….”
진하라 불렸던 사내는 여인의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여인의 이름을 작게 읊조렸다. 면사를 쓴 가영이라 불린 여인은 도후(刀后) 유가영이었고, 진하라 불린 사내는 검성(劍聖) 나진하였다.
도후를 바라보는 검성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었고 도후 역시 젊어진 검성을 바라보는 눈빛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당신, 정말로 모든 것을 알았군요……?”
도후는 목소리가 작게 떨리며 검성을 보며 물었고, 검성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끄덕임에 도후의 안색이 살짝 파랗게 질렸다. 얼굴을 가린 면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언젠가는…… 그대가 알 것이라…… 아니, 내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소?”
검성의 음성은 차가웠고, 그런 검성의 말이 도후에게는 가시처럼 가슴에 박히는 듯 아팠다.
“말을 한다면…… 당신의 곁에서 당신을 지켜볼 수조차 없을 것이기에…… 말할 수가 없었어요. 어린 시절의 실수…… 아니, 내 가장 큰 잘못으로 인해 당신을 보지 못하는 것이 무서웠어요.”
도후의 면사 안의 두 눈이 촉촉하게 젖어 왔고 금세 굵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검성은 그런 도후의 눈물에 눈을 질끈 감았다.
검성과 도후. 그들이 이렇게 만나게 된 것은 무림에 퍼진 소문 때문이었다.
<검성의 연인이었던 임소려는 다른 오절들에 의해 살해당했다.>
<임소려의 가문은 신장의 무기 홍라염도(紅羅炎刀), 신월검(新月劍), 진천궁(震天弓)을 가지고 있었는데, 오절들이 그것을 탐해 임소려를 죽였다. 홍라염도가 도후의 상징이고 신월검이 신투의 상징이 된 것이 그것을 증명한다.>
<오절 중 신투와 권왕 그리고 도후는 무림에서 사라진 후 음지에서 무림을 장악해 왔는데, 각 세력의 이름은 십인회(十人會), 벽령(碧鈴) 그리고 일월문(日月門)이었다. 그들은 각 세력을 키워 무림을 좌지우지하려 했다.>
<무림맹주였던 비천신검 우금도 오절의 삼 인이 그들의 꼭두각시로 삼고자 세운 인물이다. 그들은 우금을 내세워 무림맹과 무림을 흔들어 왔다.>
이 같은 소문이 무림에 퍼지면서 정파 무림은 크게 동요했다. 정파의 절대자로서 모든 이들의 존경을 받던 오절의 삼 인이 우금과 한패라는 소문이 순식간에 퍼졌다.
거기에 그들이 검성의 정혼자를 죽이고 그녀의 가문에 있던 신장의 무기까지 빼앗아 갔다는 소문까지 돌자 일은 더욱 커졌다.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없는 소문들이었지만 사람들은 믿기 시작했고, 특히 도후와 신투의 상징이었던 홍라염도와 신월검이 임소려의 가문의 것이라는 것을 예전 임소려 가문의 시종이 나타나 증언하면서 모두 소문을 믿게 되었다.
소문이 돌자 도후는 마음이 급해져 검성이 묵고 있었던 객잔으로 만나자는 연락을 했고, 이렇게 두 사람이 만나게 된 것이었다.
“소문이 사실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소.”
“…….”
검성의 말에 도후는 눈물을 닦아 내며 그를 보았다.
“난 애령에게서 시한부 진단을 듣고 생을 포기한 채 죽음을 맞이하려 했소. 그 과정에서 난 신기한 경험을 하였지. 유체이탈을 하였고 스스로 기억 속에 묻혀 과거를 볼 수가 있었어. 거기에서 모든 것을 보았지. 가영 그대가 소려를 베는 것을…… 그리고 나의 친우인 줄 알았던 그들이 그대와 모의를 하는 것도 말이야…….”
검성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도후를 보았다. 그녀는 그의 눈빛을 바라보지 못한 채 고개를 떨군 채 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검성의 눈빛을 갈구했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그의 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그랬었군요…… 당신은 또다시 우리 모두를 앞질러 그런 경지를 다다를 수가 있었군요…… 그래서 젊어진 것이고요.”
도후는 힘겹게 고개를 들어 검성을 보며 말했다. 예전 자신이 사랑했던 그 시절의 검성의 모습을 보는 것이 지금은 힘겨웠다. 그녀의 눈에서는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래서…… 제자의 행세를 하고 우리를 찾아 나선 것이군요…… 제가 처음인가요?”
“아니. 탁헌을 먼저 만났지.”
“그를 죽였나요?”
도후는 검성이 권왕을 먼저 만나고 왔다 하자 조금은 놀라며 물었다. 도후는 자신이 처음일 것으로 생각했었다. 모두 같이 모의를 했다고는 하나 임소려를 죽인 것은 자신이었기에.
“그래…… 그는 이미 죽었어.”
“그렇군요…… 당신이라면 그를 벌할 수 있어요. 그리고 나도 그대가 죽이겠다면 목을 내어 드려야겠죠.”
도후는 담담하게 말을 내뱉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검성에게 말하고 싶었던 부분이라, 차라리 이렇게 된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까지도 들었다. 그녀는 절대 스스로 검성에게 말하지 못했을 것이기에, 이렇게 밝혀져서 그의 손에 죽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하고 있었다.
“내 목이 필요한가요?”
도후는 체념한 듯 검성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이번에는 검성이 눈을 피했다. 자신을 보는 도후의 눈이 너무나도 슬펐기에 바라보기 힘들었다.
“내가 원하면 그냥 죽겠다는 말이요?”
“물론이에요. 당신과 겨룬다 한들, 분명 난 그대의 상대가 되지 않을 거예요.”
도후는 이미 자신은 검성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몸으로 느끼고 있었다. 검성의 말을 들어 봤을 때 이미 반로환동에다 신선의 경지에 오른 것을 알 수가 있었기에 자신의 상대가 아니라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복수는 이런 것이 아니오…….”
검성은 도후의 행동에 더욱 마음이 아려 왔다. 이미 도후를 만나기 전부터 그녀라면 이렇게 나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녀를 만나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소려…….’
검성은 자신의 약혼자이자 가장 아름다운 그때 죽어야만 했던 임소려를 떠올리며 검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지만, 죽여 주길 바라며 자신을 바라보는 도후를 보며 이내 검을 잡은 손의 힘이 풀려 버렸다.
“나는…… 그대를 죽일 수 없을 것 같소.”
검성은 두 눈을 감은 채 나직하게 읊조렸다. 이미 검성도 약선과 이야기할 때 느끼고 있었다. 도후도 자신도 서로 검을 겨누지 못할 것이라는 걸
파박―
“스승님.”
백의를 곱게 입은 유형지가 나타나 도후의 앞에 섰다. 그녀는 도후의 상징이었던 홍라염도를 손에 들고 있었다.
“네가 왜 이곳에 있느냐?”
유형지가 나타나자 도후는 놀라 물었다. 이미 검성은 그녀의 존재를 느끼고 있었지만, 도후는 검성을 만나고 심기가 흐트러져 유형지가 근처에 있는 것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유형지도 최대한 나서지 않으려 했고 그저 지켜보기만 하려 했으나,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도후가 죽으려 하자 결국 나선 것이었다.
“여기서 돌아가시는 것을 제자가 볼 순 없죠.”
유형지는 억지웃음을 지어 보였고, 홍라염도를 잡은 손을 들어 검성에게 겨누었다.
“사부님을 해하려면 저부터 상대해야 할 겁니다.”
유형지는 도를 겨누는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미 숨어서 이야기는 모두 들었다. 자신의 앞의 사내가 검성 본인이라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미 옛이야기는 도후가 이미 오래전에 자신에게 다 해 주었기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너 따위가 나설 자리가 아니다.”
“윽…….”
투둑―
검성의 눈빛에 유형지는 자신의 전신을 얽매이는 듯한 느낌과 함께 홍라염도를 땅에 떨구었고, 그녀는 그대로 무릎 꿇고 말았다.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는 건 알았지만, 단지 눈빛만으로 전의를 상실하게 하자 검성의 힘에 경외심까지 들었다.
“도후를 데리고 떠나도록 해라.”
“네?”
검성은 등을 돌린 채 말했고, 그의 말에 믿기지 않는 듯 유형지는 되물었다.
“지금 도후를 처단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소문을 퍼뜨린 자는 아마 나와 오절이 반목하길 원하고 소문을 퍼뜨렸을 터……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그의 뜻대로 해 줄 수는 없지.”
검성의 말에 유형지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정파의 상황인데, 오절이 연관된 소문은 정파 간의 불신을 가지게 했다.
오절의 제자들이 나타나면서 정파는 그들에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는데, 소문으로 인해 오절은 오히려 믿을 수 없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가영…… 그대는 마지막에 찾아가겠소.”
검성은 등을 돌린 채 말을 하고는 한참을 가만히 머물러 있다가 이내 몸을 날려 두 여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검성이 사라지자 유형지는 흐느껴 우는 도후를 위로했고, 검성의 배려에 감사하면서도 다음번 일을 걱정해야 했다.
* * *
검성은 도후와 유형지가 있는 곳을 떠나 멀지 않은 곳에 멈추어 섰다.
그가 멈추자 그 앞에 중년 사내가 나타났다.
“결국, 도후를 죽이지 못하셨군요.”
나타난 이는 비천의 천통자였다. 검성도 그가 자신을 따르고 있음을 알고 멈추어 선 것이었다.
“소문의 진원지는 알아보았나?”
검성의 차가운 눈빛과 말투에 천통자는 장난스러운 표정을 감추어야 했다. 검성의 기분이 좋지 않음을 알고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말자고 생각했다.
“네. 검성께서는 저희를 의심하셨겠지만…….”
천통자는 말을 하며 검성을 살짝 바라보았다. 임소려의 죽음과 오절의 비밀들이 무림에 알려지자 검성은 가장 먼저 비천을 의심했다. 천통자도 그것을 알기에 이야기를 꺼낸 것이었다.
“저희는 아닙니다. 혹시나 본회에서 저희 모르게 일을 진행한 것인가 하고 본회에 확인까지 해 보았지만, 절대 아니라 합니다. 저희가 굳이 그 사실을 무림에 알려 무림의 혼란을 가중할 이유도 없고요.”
천통자는 검성에게 해명하듯 말했다. 검성도 비천을 의심하긴 했지만, 비천은 무림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움직이는 조직이었기에, 천통자의 말처럼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무림을 더욱 흔들 수 있는 이런 소문을 퍼뜨리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 누구인가?”
“저희도 계속 알아보고 있습니다. 무림맹이 이제 우금의 손에서 벗어나 안정을 해야 하는 시기에 이런 소문이 돌아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천통자는 답답한 듯 한숨을 쉬며 이야기했다. 무림맹은 현재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협력하에 우금의 세력을 쳐 내고 새로운 조직으로 탈바꿈하고 있었다. 사왕련이 사파를 통합하기 전에 정파도 무림맹을 필두로 모일 필요가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협력에 정파 무림은 이를 반겼으나, 은거했던 오절들이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 무림을 위협했다는 소문으로 인해 불안감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거기에 우금을 맹주 자리에 앉힌 것이 오절의 삼 인이라는 것이 드러나면서 더욱 무림인들은 오절에 대해 반감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도 소문을 퍼뜨린 자들이 노린 바겠지…….”
검성은 표정이 굳어지며 말했다. 무림의 위기는 검성이 생각하던 이상으로 코앞에 닥쳐 있었다.
사파를 규합한 사왕련에다 우금과 손잡은 사패 어딘가. 무림은 분명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사패의 동향을 알아보는 것이 빠르지 않은가?”
“사패 중 어디가 우금과 손을 잡은 것인지는 대충 짐작을 하고 있습니다.”
“어디인가?”
“불마사(佛魔寺)와 만독곡(萬毒谷) 두 곳입니다.”
“사패의 둘이나 우금과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검성은 천통자의 말에 놀라며 물었다. 사패 중 한 곳이 관련이 있다고 해도 놀랄 판에 두 세력이나 무림을 노리고 있다니.
“그것보다 검성이 아셔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무엇인가?”
검성은 천통자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말해 오자 궁금한 듯 물었다.
“검성의 정혼자였던 임소려의 가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