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위여조로(危如朝露)(1)
무림맹(武林盟) 대회의장(大會議場).
천무지회의 첫날 일정이 마무리되고, 무림맹의 대회의장에 정파의 수뇌부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한 명, 한 명 차기 시작한 대회의장은 어느새 사람들로 가득했다.
모인 인물들은 서로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는데, 화제는 단연 천무지회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맹주님 들어오십니다.”
무림맹의 무사가 회의장 안에 외치고는 문이 열렸고 무림맹주 우금이 가장 늦게 회의장에 나타났다.
그가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기는 이도 있었지만, 대부분 사람은 우금의 등장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인물들은 특히 누구 하나 우금을 반기는 자가 없었다.
“앉으시죠.”
우금은 가장 상석의 자리에 앉으며 자신을 반겨 준 이들에게 말했고. 그의 말에 모두 착석을 하였다.
“제가 천무지회에 대한 보고를 받느라 조금 늦어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우금은 자리에 일어서 모두에게 사죄의 뜻을 전하고는 다시 앉았다. 비록 무림맹의 수장이었으나 무림맹은 정파 무림을 대표하던 그런 곳이 아니게 된 지 오래였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특히 무림맹을 그저 우금의 개인 세력으로 치부하고 있었다.
“그간 정파 무림이 너무 평화에 물들어 서로 간의 협력을 하지 않은바, 사파의 위협이 코앞에 다가온 지금 협력의 필요성을 느껴 이렇게 모여 달라고 요청을 드렸습니다. 많은 문파에서 참석해 주셔서 다행입니다.”
우금의 말에 표정이 좋지 않은 인물들도 있었으나, 현재 상황이 상황인지라 그의 말에 시비를 걸지 않고 참고 있었다.
“모두 아시겠지만 사파의 사왕련의 세가 불어나는 속도가 예상보다 빠릅니다.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앞으로 한 달 안에 사왕련은 사파를 통합하고 그 칼끝을 우리에게 겨누게 될 것입니다.”
우금은 말을 하며 모두를 바라보았고, 그의 말에 다들 웅성거리며 동요하고 있었다. 이미 자체적으로 사파의 동향을 파악한 곳들은 우금의 말에 놀라지 않았지만, 사왕련의 빠른 세 불림에 놀란 문파 대표들이 대부분이었다.
독고진이 사파의 주인이 되면서, 사파가 와해될 것이라 판단하는 이들도 많았다.
사마련이 사파 전체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은 흑월도존 유상휘의 능력이었기에, 그가 사라진 지금 사파는 예전과 같이 흩어질 것으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사파는 이름만 사왕련으로 바뀌었을 뿐, 다시 힘을 뭉치고 있었고 유상휘 아래의 사파보다 더 위험했다.
사왕련주인 독고진은 정파에 원한을 가진 자로, 사파가 그의 발아래 통합된다면 정파에게 그 칼끝이 겨누어질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렇기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우금의 부름에 이렇게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사파가 그렇게 잘 뭉치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우금의 말을 듣고 있던 한 사람이 말하자, 모두 그를 쳐다보았다. 그는 화산의 매화검수(梅花劍秀)의 수장인 구관호(具瓘浩)였다.
“화산이 현재 정세에 너무 어두운 것이 아닌가?”
“말이 너무 심하십니다.”
구관호는 상대가 화산 전체를 논하자 화를 내며 말한 이를 노려보았다. 그의 말에 핀잔을 준 이는 개방의 괴걸(怪傑)이라 불리는 무영개(無影丐)였다.
개방의 장로의 신분이었기에 구관호도 함부로 대하지 못한 채 불만을 표시했다.
개방과 화산은 사이가 좋지 못해 늘 시비가 붙어 왔다. 개방에서 유일하게 정보를 팔지 않는 곳이 화산이었기에 화산은 특히 정보에 취약했다. 그렇기에 구관호가 사왕련의 상황을 모르는 것이 이상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고 무영개도 핀잔을 준 것이었다.
“말이 심하긴, 현재 무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이 회의에 참석한 꼴이 우스워서 가만히 두고 볼 수가 없구나. 쯔쯧―”
무영개가 혀를 차며 구관호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자 그의 얼굴은 붉게 물들어 갔다. 단숨에 검을 뽑을 듯한 기세였지만, 지켜보는 모든 이들은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을 알았다.
화산의 매화검수 수장이라고 하나 개방의 장로인 무영개의 상대가 되지 않음을 구관호 스스로도 알았기에 화를 삭인 채 자리에 앉아야 했다.
“모두 협력을 하자고 모인 자리이니만큼 다툼은 삼가셨으면 합니다.”
구관호와 무영개의 소소한 다툼이 끝나자, 우금은 모두를 다시 둘러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사파가 힘을 합치기 전에 정파도 그간 은원을 잊고 힘을 모아야 할 때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분들이라면 이 자리에 오지 않았겠지요?”
우금의 말에 불만의 표정을 보이는 이들은 많았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무림맹과 정파의 관계 단절은 우금이 의도한 것이기에 그의 말에 다들 한마디 하고 싶었지만, 힘을 모으자고 모인 자리에서 분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도 무림맹과 이렇게 힘을 합치는 논의조차 하고 싶지 않았지만, 상황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식으로 힘을 모으자는 이야기입니까? 현재 무림맹은 맹주의 사유화가 된 지 오래요. 그리고 중소방파들도 무림맹을 신뢰하지 않는 상태요. 무엇을 어떻게 하겠는 것이요?”
모용세가의 가주인 모용석이 우금을 향해 물었다. 다소 공격적인 말이었지만, 우금은 당황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 나갔다.
“무림맹의 사유화라는 말은 조금 지나치구려, 모용가주. 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등에 업고 무림맹의 질서를 어지럽힌 인사들을 배제했을 따름이오.”
“뭣이?!”
그 말에 곳곳에서 불만의 말이 터져 나왔으나, 우금은 개의치 않고 입을 뗐다.
“전대 맹주인 비월검공(飛月劍公)이 정파를 위해 오절과 함께 혼신을 다 바쳤으나,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무림맹 내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늘 다툼을 일으켰소. 그 탓에 오절께선 결국 강호에서 잠적하시고 말았지 않소이까.”
“그것은…….”
우금의 말에 불만을 토로하던 사람들이 변명하지 못한 채 조용해졌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가 무림맹주가 바뀌고 우금에게 휘둘릴 수밖에 없던 것이 그 이유였다.
오절로 인해 정파는 사파의 위협에서 벗어났다. 자신들의 힘이 아닌데 그 힘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사파를 억압하고 이권을 독식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파끼리 다툼이 이어졌다. 무림맹도 맹주인 비월검공 남궁학과 오대세가의 인물들과 구파일방 간의 알력이 존재했다. 서로 주도권을 잡으려는 다툼들은 무림맹을 좀먹게 했다.
그렇게 서로 다투고 있을 때, 흑월도존이 나타나 사파를 규합하였고, 그 칼끝이 정파에게 겨누어져 올 땐 이미 정파는 오합지졸이었다.
현 맹주인 우금의 기지로 인해 정파는 사파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 탓에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무림맹에서 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죄도 있었고 우금이 그들의 약점을 쥐고 있었기에 우금이 원하는 대로 모든 힘을 그에게 주어야 했고, 우금은 그 힘으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무림맹 내에서 지워 버렸다.
우금이 무림맹을 자신의 조직으로 사유화한 것도 맞으나, 그 계기를 준 것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였기에 길게 이야기해 봐야 자신들의 치부만 드러날 뿐이었다.
쿵―
털썩―
“으…… 이게 무슨……?”
갑자기 사람들이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하, 이거 효과가 너무 좋군. 무림의 고수들을 이렇게 쉽게 처리할 수가 있다니.”
우금은 하나둘 쓰러지는 사람들을 보며 크게 웃었고 간신히 정신을 부여잡고 있는 이들은 우금의 말에 모두 그의 짓임을 알았다. 하지만 그들도 결국 정신을 잃은 채 쓰러지고 있었다.
우금은 만족스러운 듯 쓰러진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인물들을 보았다.
“그들이 건네준 마혼향(魔混香)의 효과가 대단하군. 이렇게 이들을 일거에 잡을 수 있다니 말이야.”
회의장 안에는 눈에는 보이지 않고 냄새도 나지 않는 향이 가득 차 있었다. 이것을 마시게 되면 생명에 지장은 없으나 아무리 내공이 높아도 혼절하게 되는 효과가 있었다. 어차피 이들 모두를 여기에서 죽일 생각은 없었기에 우금은 마혼향을 택한 것이었다.
“이런 설마 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정말 몰랐군.”
“누구냐?”
모두가 쓰러져 있는 와중에 회의장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리자, 우금은 놀라 음성이 들리는 방향을 보았다. 그곳에는 검은 무복에 복면을 쓴 인물이 있었다.
“무림맹주가 제정신 박힌 인물이 아니란 것을 들어왔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타락했을 줄이야. 놀라워!”
복면인의 말에 우금은 놀라며 상대를 찬찬히 살폈다. 이곳 무림맹 대회의실은 입구의 문 외엔 다른 출입구가 전혀 없었다.
게다가 입구 주변으론 무림맹 정예들이 빼곡하게 지키고 있던 데다가 이 일을 위해 평소의 몇 배 인원을 배치까지 해 두었다.
그들을 뚫고 여기에 들어왔다는 것인즉, 눈앞의 상대는 보통 고수가 아니라는 뜻이었다.
“목소리는 꽤 젊어 보이는데 누구지? 내가 누군지 알고 이렇게 건방진 언사를 하는 것인가?”
우금이 노기 섞인 음성으로 일갈했으나, 복면인은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누구인지 알기에 내가 더욱 놀랐지. 난 사실 이번 회의가 위험할 수 있으니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설마 했거든…….”
복면인은 쓰러진 정파의 명숙들을 한번 훑어보고는 우금을 쏘아보았다.
“그저 이들을 지켜 달라는 부탁만 받았지만, 네놈의 의중이 궁금하군.”
복면 사이로 보이는 눈빛이 더욱 날카로워졌다. 그 눈빛에 백전노장인 우금이 주눅 들 정도였다.
복면인은 검성이었다. 개방의 방주 소천개로부터 무림맹주 우금의 의중이 의심스러우니 지켜봐 달라는 부탁을 받고 잠복 중이었는데, 과연 방주의 의심대로 일이 벌어진 것이다.
“누가 지켜봐 달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지?”
우금은 검성의 말에 놀라 물었다.
“그것이 궁금할 때가 아닐 텐데?”
“그렇지. 내가 일의 경중을 잊을 뻔했군.”
우금은 잔혹한 웃음을 지으며 상대를 바라보았다. 이자가 보통의 실력이 아님은 알았지만, 우금은 누구를 상대하던 실력에 자신이 있었다.
갑자기 나타나 놀라긴 했지만, 일단은 상대를 잡든 죽이든 둘 중 하나부터 해야 했다.
“검을 잊고 가져오지는 않았지만, 좀도둑 하나 처리하는데 검을 쓸 필요는 없겠지.”
파바밧―
우금은 말을 마치자마자 손가락을 튕기어 지풍(指風)을 쏘았다. 지풍은 순식간에 검성의 사혈들만 노려 쏘아져 갔다.
우금은 자신의 지풍이 상대의 몸을 꿰뚫을 것이라 확신했다.
하지만.
파방―
“어떻게…….”
우금이 쏜 지풍은 검성에게 닿기도 직전에 소멸했다.
“그런 어설픈 공격이 통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우습지 않나?”
검성의 말에 우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상대가 젊어 보이는 목소리였기에 어느 정도 얕보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한 수를 가볍게 파훼하는 모습에서 얕보는 안 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되었다.
“순순히 군다면 금제만 가한 채 데려갈 테니 나를 따르도록 해라.”
“뭣이?! 내가 누구인지 알고 그딴 소리를…….”
검성의 광오한 말에 우금은 더욱 표정이 구겨졌다. 급하게 펼친 탄지공(彈指功)이었지만, 그렇게 쉽게 막아 낼 위력은 아니었다. 상대의 실력을 가늠하고자 펼친 공격이 아니라 죽이려고 펼친 공격이었는데 간단히 막힌 것이었다.
“다시 말하지. 그냥 따라나서는 게 어떠냐?”
검성은 다시 우금을 바라보며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