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서문세가의 금지옥엽(金枝玉葉)(2)
‘난감하군…… 보통 여인들이 아닌 줄은 알았지만 서문세가의 여인들이었다니…… 거기에다 약선까지 나타났으니…….’
사마천은 약선의 출현에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자신이 거느린 화산의 검수들이 서문세가의 여인들을 희롱하면서 벌어진 일이라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처음부터 자신이 사과하게 만들고 일을 차단했어야 했는데 방관한 것이 일을 더 크게 만든 셈이었다.
사마천은 자신의 뒤에 선 화산의 검수들을 한 번 쳐다보고는 결심한 듯 한 발짝 앞으로 나와 약선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서문세가의 여인들과 약선을 번갈아 쳐다보고는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했다.
“모든 것이 제가 수하들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한 탓입니다. 수하들이 불민하여 실수를 범했고 제가 그것을 단속하지 못했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사마천이 고개를 숙이자 화산의 검수들이 당황했다. 이미 그들도 서문세가와 약선의 이름을 들었기에 사마천 뒤에 우르르 달려와 무릎을 꿇었다.
“저희의 잘못입니다. 저희가 실수를 하여 화산파의 이름에 먹칠을 했습니다.”
사마천과 화산파의 수하들이 모두 사죄의 뜻을 나타내자 약선은 곤란해하였다. 그래도 철혈검 사마천이라면 화산파의 차기 장문인으로 거론되는 자인데 이렇게 남들의 앞, 그것도 수하들의 앞에서 욕보이는 것은 문제가 있었다.
“일어나도록 해.”
약선이 명하자 사마천은 자신의 뒤에 제자들을 물러나게 했다. 약선은 서문세가의 여인들에게 자초지종을 듣고 있었고, 사마천은 조용히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괜히 서문세가와 이렇게 척을 지는 것은 화산파에 큰 누가 될 것이기에 여기서 털고 가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비하면 일개 자신의 명예는 사소한 일이었다.
“상황이 재미있어지는군.”
검성은 약선이 나타나면서 상황이 바뀌자 재미있다는 듯 미소를 보이며 지켜보았고 은정연도 사마천이 저렇게 굽히고 나오자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철혈검은 불의를 참지 못하고 강단 있는 인물로 알려져 있었는데 직접 보니 소문이 맞는군요.”
“그렇게 생각해?”
“그래도 차기 장문인으로 이야기까지 나오는 인물인데, 저렇게 잘못을 인정하고 빌기가 쉽지는 않잖아요. 저런 기개는 대단한 것이 아닌가요?”
은정연은 검성의 물음에 의아한 듯 답했다.
“아니지. 저들의 말을 듣자 하니 애초에 화산파 검수들이 서문세가의 여인들을 희롱한 것이지 않느냐. 사마천이 정말로 공명정대(公明正大)한 인물이었다면 약선이 나타나기 전. 아니, 애초에 싸움이 벌어지기도 전에 수하들을 말리고 사과를 했어야 맞다.”
“아…… 그런가요?”
은정연은 검성의 말을 듣다 보니 그런 거 같았다.
“저자의 속을 알 수가 없으나, 상황이 심각해지고 나서야 방관을 멈추고 중재하려 했고, 약선이 나타자나 무릎까지 꿇어 사태를 진정시키는구나. 그럼에도 세인들에게 공명정대하다는 평판을 받는 자이니, 보통 수완은 아닌 게 확실하구나.”
검성은 사마천이 보통이 아님을 짐작했다.
만일 약선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가 어떻게 했을지도 나름 궁금했다. 싸움을 멈추긴 했으나 그가 싸움을 멈춘 것이 정말로 사과를 하기 위해서였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저런 자라면 필시 살인멸구(殺人滅口)도 생각에 있었을 터.’
검성은 사마천이 싸움을 멈추고 상대를 방심하게 한 후 모두를 죽이려 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하고 있었다.
검성이 선인의 경지에 오르고서 은근히 느껴지는 사람들의 기운이 있었는데, 처음에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으나 현재는 확신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선인(善人)들은 몸 주위로 옅은 파란색 기운이 보였고, 악인(惡人)들은 어두운 자주색 기운이 보였다.
한데 사마천은 어두운 자주색의 기운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정파의 인물 중 이제껏 저렇게 진한 자주색을 드러내는 자는 검성으로서도 처음이었기에 더욱 그를 의심하고 있었다.
“사마천이라는 저자에 대한 정보를 요청할 수 있나?”
“철혈검이요?”
“그래. 가능하면 빨리 조사를 부탁하도록 해. 저자의 느낌이 아주 꺼림칙하군.”
“네. 그렇게 할게요.”
은정연은 살짝 궁금했으나 더는 묻기 어려운 분위기라 묻지 않고 주위에 숨은 비천의 수하들에게 전음으로 말을 전했다.
이야기 나누는 사이, 약선과 서문세가 그리고 화산파 사이의 일이 끝이 난 듯 화산파의 무사들이 먼저 떠났다.
그들이 사라지자 약선이 검성과 은정연이 있는 곳을 보았다.
“그만 나오지 그래요?”
약선의 외침에 검성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며 말을 몰아 그들의 앞으로 나섰고, 은정연도 그를 따랐다.
그들이 나타나자 서문세가의 여인들이 경계했으나 약선이 그들은 안심시켰다.
빼액―
검성이 말에서 내리자 하늘을 선회하고 있던 백아도 지상으로 내려왔다. 그 모습에 서문세가의 여인들이 놀랐다. 사실 백아가 하늘을 날고 있을 때 약선의 설응인 줄 알고 안심하고 있었는데 다른 설응임을 이제야 인식한 것이었다.
“이놈! 아직도 여인들만 쫓는 버릇을 못 고쳤구나.”
검성은 백아가 내려와 뒤뚱거리며 자신에게 다가오자 쓰다듬으며 한 소리를 했고, 백아는 알아들으면서도 딴청을 피우듯 약선과 서문세가의 여인들을 보았다. 그 모습에 뒤이어 따라온 은정연은 웃었다.
약선은 은정연을 빤히 보았다.
“누군가요?”
약선은 검성을 향해 은정연에 관해 물었다.
“아, 음…… 그러니까 뭐라고 소개를 해야 할까? 일단 동행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면 될까?”
약선의 질문에 검성은 당황했다. 은정연은 비천의 소속이라고 말해 줄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막상 둘러대자니 마땅한 것이 생각나지 않았다.
검성이 버벅대자 약선은 은정연을 다시 보았고, 그녀는 괜히 약선의 눈빛에 주눅이 들었다.
약선도 단번에 그녀가 여인인 것을 알아보았기에 검성과 동행하는 것이 못마땅했다.
“안 그래도 애령에게 가고 있었는데, 이렇게 중간에서 만나는 것도 나쁘지 않군.”
“서안으로 가고 있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저를 만나러 온 것인가요?”
“그래. 어차피 거쳐 가는 길이었고 윤후도 보고 가려고…….”
검성은 약선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주위의 서문세가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한 눈빛으로 보고 있음을 인지했다.
웬 젊은 사내가 자신들의 큰 어른이신 약선과 반말로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에 놀란 것이다.
“흐음…….”
검성은 곤란한 표정을 짓다가 자신을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는 소녀를 보았다.
작고 귀여운 소녀는 서문세가의 서문효인이었다. 서문효인은 검성을 보고는 신기한지 주위 여인들 손을 떠나 검성에게 다가왔다.
이에 여인들이 서문효인을 말리려 했지만 약선이 괜찮다는 듯 그녀들을 막아섰다.
“꼬마 아가씨, 몇 살인가요?”
검성이 자세를 낮추어 서문효인과 눈을 맞추며 묻자 서문효인은 큰 눈을 깜박이며 한참을 바라보더니 두 손을 뻗어 검성의 얼굴에 가져갔다. 그런 서문효인의 행동에 서문세가의 여인들이 놀라 말리려 했지만 다시 한번 약선에게 저지당했다.
“열 살이에요.”
손을 뻗던 서문효인은 검성의 얼굴 앞에 손가락 열 개를 펴며 자신의 나이를 당당하게 외쳤고,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검성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가 웃자 지켜보던 여인들 모두 탄성을 질렀고 약선마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예뻐요!”
서문효인이 검성의 웃음을 보고는 말하며 그에게 안겨 왔고 검성은 얼떨결에 서문효인을 안아 주었다. 검성은 서문효인을 떼어 내려 했지만 목을 감고 안겨 왔기에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거…… 이제 어린아이까지 유혹하는 건가요?”
은정연은 검성의 뒤에 있었기에 검성의 미소를 보지 못했지만 자신의 앞 여인들의 반응을 보고 어떠한 상황인지 예상했고, 어린 서문효인까지 검성에게 푹 빠진 듯한 모습을 보이자 혀를 차며 말했다.
“날 너무 파렴치한으로 보는 것 아니냐?”
검성은 떨어지지 않는 서문효인을 안고 일어섰다. 그 와중에도 소녀는 검성의 목을 감은 채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그건 그렇고…… 몸이 조금…….”
검성은 안겨 온 서문효인의 몸이 조금 이상함을 느꼈다.
약선이 그들에게 다가와 안겨 있는 서문효인의 이마를 짚어 보더니, 그녀의 작은 팔목을 잡고 맥을 잡았다.
“어디가 아픈 것이요? 몸이 너무 차가운데…….”
검성은 안겨 있는 서문효인의 몸이 온기가 없이 차가운 것을 느끼고는 약선에게 물었다.
“타고난 병증(病症) 때문에 그래요. 아이를 이리 주세요.”
약선은 서문효인을 검성에게서 건네받았다. 떨어지려 하지 않았지만 소녀의 힘으로는 버틸 수가 없었다.
“몸이 그래도 이전보다는 좋아졌구나?”
약선의 말에 그 뒤에 초초히 서 있던 서문세가의 여인들이 안심하는 모습을 보였다.
본디 약선에게서 약만 받아 서문효인에게 먹였으나, 최근 상태가 더더욱 안 좋아지는 듯하여 직접 찾아온 것이었다.
가주인 서문환은 아끼는 손녀가 처음 세가 밖으로 나가는 것을 걱정하여 직접 나서려 했지만 세가에서 만류해 어쩔 수 없이 여인들만을 내보냈다.
이에 서문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하나 약선에게서 직접 더 나아졌다는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된 것이다.
“일단 내 거처로 돌아가자. 효인이는 내가 데려갈 테니 너희는 따로 오도록 하여라.”
“네. 바로 따라가겠습니다.”
서문효인은 약선의 말에 기뻐서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약선이 세가에 올 때마다 설응을 보고 태워 달라 떼를 썼으나, 너무 어린 서문효인을 걱정한 서문환이 허락지 않아 타 보지 못했었기에 서문효인으로서는 기쁠 수밖에 없었다.
“할머니~ 정말로 설응 타고 가는 거예요?”
서문효인이 큰 눈을 깜박이며 묻자 약선은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래. 이제 효인이도 많이 컸으니 설응을 태워 주마. 나중에 말만 잘 듣는다면 설응도 효인이에게 주마.”
“정말요?”
“그래. 효인이가 안 아프게 되고 무공을 익히게 되면 말이다.”
서문효인이 그 말이 기쁜지 약선에게 포옥 안겼고, 약선은 작은 서문효인의 몸을 들쳐 안고는 설응에 올라탔다.
“당신도 얼른 오세요.”
약선이 다정하게 부르는 말에 검성은 주위 시선이 조금 신경 쓰였다. 게다가 서문세가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를 들키면 좋을 게 없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따라갈게요.”
검성은 존대했지만 이미 그전에 서로 말을 편하게 하는 것을 서문세가의 여인들이 보았기에 계속 검성을 수상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약선이 먼저 설응을 타고 거처로 돌아가자, 서문세가의 여인들도 이내 추스르고는 바로 출발했고, 검성과 은정연 그리고 백아만 남게 되었다.
“뭔가 일이 폭풍처럼 지나갔네요.”
은정연은 갑자기 모든 일이 확 지나간 느낌에 그렇게 말했고 검성도 그녀의 말에 동감했다.
“아무래도 나 먼저 가야겠구나. 너는 근처에서 말들을 지키고 있거라.”
“네, 네?”
검성의 말에 은정연이 의문을 표했으나, 이내 검성은 백아를 타고 홀로 조양봉으로 날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