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도후(刀后)
왕옥산(王屋山).
산서성 양성현 서남쪽의 있는 산이다. 이곳에 이른 아침부터 한 여인이 오르고 있었는데, 편한 등반로를 두고 험한 길을 걷고 있었다.
면사로 얼굴을 가린 채 산을 오르는 그녀의 정체는 바로 십인회의 대모였다.
그녀는 혼자서 말없이 빠른 발걸음으로 왕옥산을 오르기 시작했고, 점점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산의 중턱쯤 올랐을 때, 그녀의 시야에 작은 모옥(茅屋)이 눈에 들어왔다.
모옥에서는 아침 식사를 준비 중인지 가까이 갈수록 음식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그 내음이 그리웠던 여인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모옥으로 향했다.
“오랜만에 오니 반갑구나…….”
여인은 주위의 경치나 음식 냄새 그리고 여전히 작은 모옥이었지만, 이곳에서 수련하며 생활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나기 시작했다.
그녀는 발걸음을 멈춘 채 주위를 둘러보기에 바빠 자기 등 뒤에 누군가 나타났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빨리도 왔구나?”
여인은 자신의 등 뒤에서 들리는 음성에 놀라 뒤돌아보았고, 그곳에는 그리운 자신의 사부가 서 있었다. 여자치고는 제법 큰 키에 머리는 백발이었지만, 외모로는 사십 대의 미부로 보였다.
그녀의 이름은 오절(五絶) 중 도후(刀后)라 불렸던 유가영. 현 회주인 자신의 스승이었고, 십인회의 창설인이었다.
“스승님은 더 젊어지시는 것 같네요.”
“이제 아부하는 것도 제법 하는구나? 목석과도 같던 녀석이…….”
도후는 자신 제자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화풍곡의 출신이었던 그녀는 화풍곡에 매인 몸으로서 자유롭지 못했고, 오랜 시간 검성에게 빠져 있던 탓에 생전 제자를 키울 생각도 하지 못했었다.
마지막으로 검성에게 패하고, 그녀는 다른 오절들과 마찬가지로 그를 이기기 위해 무공 수련에 열중했다. 하지만, 그녀가 수련을 마치고 나왔을 때는 검성은 사라지고 없었다.
극심한 공허함에 시달리던 그녀는 신투와 권왕이 검성의 의자제세(義者濟世)의 뜻을 자신들이 이어 가자며 신비지문인 비천회(秘天會)와 유사한 단체를 결성하자고 제의했고, 도후는 검성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녀로서는 검성에게 질투와 원망과 미안한 감정 모두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가 생전에 그렇게 외치던 ‘의로운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을 이루려 신투와 권왕과 함께했지만, 그 뜻은 변질하여 갔다.
결국 오절은 서로를 견제하며 각자의 세력으로 갈라졌고, 도후는 이미 벌인 일들을 조직을 통해 수습해야 했다.
도후는 이후 제자를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화풍곡의 무공은 여인들만이 쓸 수 있는 무공이었기에 근골과 오성이 뛰어난 아이를 찾아다녔다.
대리국(大理國)에서 한 아이와 만날 수 있었고, 그 아이가 바로 자신의 앞에 있었다.
“맛있는 냄새가 나던데, 제 몫도 있겠죠?”
“유형지(劉馨枝). 제법 넉살도 좋아졌구나?”
도후는 자신에게 살갑게 다가오는 제자를 조금은 낯설어하며 말을 건네었다.
자신의 제자는 여자치고는 무뚝뚝했다. 무공을 전수할 때는 한어(漢語)를 몰라 한참을 고생하기도 했었다.
“오랜만에 보는데 제자가 이렇게 살갑게 굴기도 해야죠. 사부님이 억지로 자리를 맡기고 내보내셔서…… 제가 얼마나 이곳에 돌아오고 싶었는지요.”
유형지는 도후에게 안기며 어리광을 부렸고, 그런 제자의 모습에 기분이 나쁘지 않은지 도후는 등을 토닥여 주었다.
“들어가자.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자.”
도후도 오랜만에 보는 제자가 반가웠고 그녀의 어리광이 싫지 않아 그녀의 손을 잡아끌어 모옥 안으로 향했다. 모옥에는 이미 도후가 유형지가 올 것을 알고 미리 식사 준비를 마쳐 놓았다.
“앉아라.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하자꾸나.”
“네. 저 안 그래도 빈속이라 무지 배고파요.”
제자의 칭얼거림이 어색한 도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기죽을 그릇에 담아 그녀에게 건네었고, 자신의 것도 퍼서 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스승님의 요리는 맛이 있네요. 누가 도후가 요리를 잘할 것이라 생각할까요?”
제자의 말에 도후는 살짝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에 유형지는 얼른 고개를 숙인 채 먹기에 집중했다.
“뭔가 할 말이 있어 찾아온 것이 아니냐?”
식사를 어느 정도 마친 뒤, 도후는 유형지를 바라보며 물었고, 그녀도 도후의 물음에 먹던 것을 멈춘 채 그녀를 보았다.
“스승님의 우려대로 우금이 돌발 행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유형지의 말에 도후는 다시 쓴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원래 욕심이 많고 속을 알 수 없던 녀석이었지. 너무 많은 것을 그 녀석에게 주었기에 끝까지 감당할 수 있기를 바랐는데…….”
도후는 우금을 이용해 무림맹을 장악하는 일에 반대했었으나, 신투가 결정하고 추진했던 일이라 결국 그의 뜻대로 모두 이루어졌다.
처음엔 자신들이 바라던 대로 되었으나, 조직의 뜻은 변질하였고, 그 과정 속에서 우금의 폭주를 제어할 수가 없었다.
그나마 도후는 십인회의 힘으로 최대한 그를 제어할 수 있도록 미홍을 붙여 감시를 해 왔으나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미홍이 무림맹주에게 구금(拘禁)되었습니다.”
“뭐라고?”
도후가 유형지의 말에 놀라 물었고, 그녀는 침착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우금 그자가 무림맹은 물론 구파일방 내에 있던 저희와 권왕, 신투의 첩자들까지 파악해 그것을 공유하고 모두를 내쫓거나 죽였습니다. 미홍 역시 그의 손에 사로잡혔습니다. 제법 우리가 모르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제자의 말에 도후는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유형지가 자신을 찾아 여기까지 온다고 연락이 왔을 때부터 보통 일이 아닐 줄은 예상했지만, 상황이 예상보다 더 안 좋았다.
“우금을 내쳐야 하는 것을 너무 미루었나 보구나. 일을 예상하지 못했느냐?”
“네. 그냥 욕심만 많을 뿐, 현재 자리에 만족하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내심을 감춘 채 우리에 대해 눈치채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제자의 실수입니다.”
도후의 지적에 유형지는 고개를 숙이며 이야기했다. 우금의 지나친 행동에 대해 십인회에서도 늘 지적이 나왔던 부분이었지만, 그를 끌어내리면 무림에 큰 혼란이 일어날 터라 차일피일 미루어 왔는데, 결국 일이 터진 것이었다.
“너희가 모를 정도로 우금이 움직였다는 것이 정말 수상하구나…… 그가 도대체 어디까지 예상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이지?”
“그것을 짐작할 수가 없는 점이 문제입니다. 무림맹엔 이제 저희 사람들이 없어서 그곳의 정보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미홍이 구금된 것도 큰 문제입니다. 일단 그녀를 구해야 하기에 스승님의 허락을 구하고자 왔습니다.”
유형지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자신을 바라보자 도후는 그녀를 마주 보았다.
“무엇의 허락이 필요한 것이냐?”
유형지의 내심이 궁금했던 도후는 그녀에게 물었다.
“제가 직접 움직이려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네가 왜?”
유형지의 말에 도후는 놀라 물었다. 유형지는 십인회의 대모로, 자신의 역할을 대리하는 중요한 위치였다.
그런 그녀가 직접 움직인다는 소리에 도후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십 년 전, 도후는 십인회에서 완전히 물러나면서 어린 제자 유형지를 회주 자리에 앉혔다. 당시 열네 살의 나이였던 유형지는 스승의 뜻을 이어받아 무림의 이면에서 정보를 모으며 십인회를 이끌어 왔다.
그것은 도후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는 십인회 일원들의 지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들은 도후의 제자인 유형지를 자신의 주군으로 모시고, 성심을 다해 보필했다.
그렇기에 항상 지시를 내려 왔던 유형지가 무림에 나가 직접 미홍을 구하겠다는 뜻이 도후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홍을 구하는 것은 십인회의 가신들에게 맡겨도 충분할 텐데.”
도후의 말에 유형지는 천천히 입을 떼었다. 어차피 자신이 무림에 나가겠다고 이야기하기 위해 이곳을 찾아올 때부터 도후가 반대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미홍은 십인회의 가신들과는 다른 위치입니다. 그건 스승님이 더 잘 아시지 않나요?”
“그거야 그렇지…….”
도후는 유형지의 말에 할 말을 잃었다. 미홍은 십인회의 가신들과는 조금 달랐다. 십인회는 애초에 도후를 추종하던 자들이 스스로 결성한 친위대였다면, 미홍은 도후가 직접 선택하고 믿는 아이였다.
도후가 그녀를 제자로 삼지는 않았지만, 어릴 때부터 데리고 다녔다.
다만 십인회의 가신들은 늘 미홍의 존재를 탐탁지 않아 했다. 신분을 알 수 없는 미홍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늘 경계하고 있었다.
게다가 유형지도 미홍을 신임하고 있었기에 십인회의 가신들은 그녀에 대해 더욱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십인회 가신들은 그간 우리가 정파에 심어 둔 첩자들이 모두 축출당한 이번 사건을 두고 미홍을 탓하고 있어요. 미홍이 일을 제대로 했다면 우금의 뜻을 빨리 눈치챘을 거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죠.”
“흐음…… 하긴 그들은 미홍을 늘 못마땅하게 여겼으니…… 이번에 그녀에게 책임을 물으려 한다는 거구나.”
도후도 십인회 가신들의 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번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그렇다곤 해도 유형지가 직접 나서게 하는 것은 내키지 않았다.
“제가 나가고 싶은 또 하나의 이유도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도후는 제자를 보며 이채를 띠었다. 본디 제자는 말이 많지 않았다. 십인회의 대모 자리를 물려주었을 때도, 제자는 위엄을 보이기 위해서인지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한데 이렇게 스스로 나서다니, 분명 무언가 더 있을 터였다.
유형지가 조금 뜸을 들이고는 입을 뗐다.
“검성의 제자가 나타났습니다. 그가 서안으로 향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있어 저도 미홍을 구할 겸 서안으로 가 그를 한번 만나 보려고 해요.”
“그의 제자가……? 정말이냐?”
도후는 예상치 못한 유형지의 말에 놀라 물었다.
“네. 안 그래도 사실 이것을 전하려고 스승님을 찾은 것이에요.”
유형지는 면사 사이로 미소를 보이며 웃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도 느껴졌다.
“스승님도 같이 서안으로 가시는 게 어때요?”
유형지의 말에 도후는 그녀를 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냐?”
“보고 싶으시잖아요? 검성의 제자…… 묻고 싶은 것도 있으실 테고요.”
유형지의 말에 도후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유형지도 도후가 얼마나 검성을 연모하였는지 그리고 무슨 일을 했었는지도 알고 있었다.
그녀도 여자이고 도후의 제자라 그런지 도후에게 감정을 이입하여 생각하였기에, 아직도 그를 잊지 못하고 그에 대한 잘못을 자책하는 자신의 스승이 불쌍했다.
“그것을 권하기 위해 여기까지 온 것이냐?”
도후는 이제야 유형지가 자신에게 서안행을 권하기 위해 찾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자신의 제자가 어떤 마음으로 자신에게 이것을 권하는지도 짐작이 되었다.
“네. 그냥 제자의 부탁이라고 생각하고 같이 가 주세요. 저도 무림을 제대로 돌아본 적이 없으니 스승님께서 동행해 주시면 의지가 될 듯하고요.”
유형지도 사실 무림에 혼자 나서는 것에 조금은 두려움이 있었다. 무공을 배우고 거의 무림을 제대로 다닐 기회가 없었던 그녀였기에 검성 제자의 소문을 듣고 도후에게 동행을 권하러 온 것이었다.
유형지의 제안에 도후는 바로 대답을 못한 채 생각에 빠져야 했다. 이미 무림을 등진 채 야인처럼 살아온 그녀로서는 다시 무림에 나서는 것이 조심스러웠다. 권왕이나 신투가 자신의 무림 출두를 알 게 된다면 그것도 문제였다.
“일단 하루만 고민해 보자. 그 정도 시간은 줄 수 있겠지?”
도후는 오랜 고민 끝에 말했고 유형지는 도후의 대답에 미소를 지었다.
“물론이죠.”
유형지가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에게 안겨 오자 도후는 그녀를 다시 따뜻하게 안아 주었다.
유형지가 아무리 십인회의 대모라 한들, 스승 앞에서는 아직 어린 제자의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