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성, 돌아오다-84화 (84/251)

84화― 령주(鈴主) 신투(神偸)

북평(北平).

현재 북평은 엄청난 규모의 건축 자재와 인력들이 몰리고 있었는데, 이유는 건문제(建文帝)를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영락제(永樂帝)가 남경(南京)에서 천도하기 위해 북평에 새로운 궁의 건설을 명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건설 기간 동안 궁은 어느 정도 모양을 갖춰 가고 있었다. 영락제의 이런 천도에 불만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의 명을 거절할 수 있는 이는 없었기에 천도 작업은 순탄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 * *

북평의 한 저택.

아무리 궁이 건설되는 북평이라지만, 외곽은 일반 평민들의 지역이었다. 한데 이런 외곽 중에서도 외진 곳에 큰 저택이 하나 있었다.

워낙 외진 곳이라 큰 저택이 어울리지 않는 동네였기에 더욱 눈에 띄는 곳이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 저택을 귀신궁(鬼神宮)이라고도 불렀는데, 이유는 도무지 저택에 사는 인물들을 본 사람들이 없어서였다.

저택이 들어선 것은 북평에 황제의 명으로 궁의 공사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는데, 그 이후 저택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주위 사람들도 알지 못했고 본 사람도 없었다.

밤늦은 시각 어두컴컴한 저택 안의 한 곳에만 불이 들어왔다. 저택 안으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들어온 이가 그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벽풍(碧風)입니다.”

“들어오너라.”

방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사내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곳에는 근엄하게 생긴 노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었다. 나이가 꽤 있어 보였으나 정정했고, 긴 수염에 날카로운 눈빛을 가진 노인이었다.

“벽풍, 령주님을 뵙습니다.”

방에 들어선 사내는 노인을 향해 무릎을 꿇은 채 예를 갖추었으나, 령주라고 불린 노인은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손을 들어 사내를 일어나게 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여기까지 찾아온 것 보니까 말이다.”

노인은 책을 내려놓으며 벽풍을 보았고, 그 눈빛에 벽풍은 움찔하며 고개를 숙였다.

“일상적인 보고와…… 조금은 신경 쓰실 보고가 하나 있습니다.”

벽풍은 노인의 기세에 주눅이 들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신경 쓰일 보고?”

노인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며 되묻자, 벽풍은 노인의 기세에 몸을 떨었다.

“일상 보고를 먼저 해 보아라. 건축되고 있는 성에 관한 것이냐?”

“네. 건축은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남경 사람들과 조율하여 저희 쪽에서 이전보다 많은 이득을 취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기분 좋은 보고구나.”

노인은 벽풍의 보고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령주라 불린 노인은 검성이 그리 찾고 있는 벽령의 령주인 신투(神偸) 초벽이었다. 그는 무림에서 사라진 채 이곳 북평의 귀신궁에 머물고 있었다.

“현 황제는 정말이지 다루기가 쉽구나. 이전 황제는 마지막 왕사(王師)였던 자가 꼬장꼬장하여 다루기 힘들었는데 말이지.”

“방효유(方孝孺)를 이야기하시는 겁니까?”

“그래. 대단한 기개를 보여 준 자였지.”

신투는 그를 회상하는지 말하고는 생각에 잠깐 빠져 말이 없었고, 벽풍은 조용히 기다렸다.

방효유는 전대 황제인 건문제의 왕사이자 대학자 송림의 문하로서 지식인들의 존경과 함께 왕의 총애도 받았는데, 한림시강학사의 자리에 위치하며 건문제를 보필하였다.

방효유는 건문제에게 각지에 엄청난 군사를 이끄는 전대 황제의 아들들의 존재를 제거해야 한다고 건의를 했고, 그것을 먼저 알아챈 연왕 주체(朱棣)가 먼저 움직일 계기를 만들어 주고 말았다.

황제 곁의 간신들을 제거한다는 명목으로 연왕이 군사를 움직이니, 이것이 정난의 변이었다. 명태조인 홍무제(洪武帝)는 자신의 손자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개국 공신들을 제거했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손자인 건문제를 더 위험하게 만들었다.

황제를 지켜 줄 사람이 없었기에 연왕은 손쉽게 변에 성공할 수가 있었고, 건문제를 몰아내고 연왕은 새로운 황제로서 취임하게 되었다.

하지만 방효유는 영락제를 인정하지 않고 상복을 입은 채 통곡하면서 입궐했다.

영락제는 크게 노하여 방효유를 죽이려 했지만, 대학자였던 그를 죽이면 천하의 학문이 끊긴다는 주위의 간청에 살려 두었고, 방효유에게 즉위조서를 쓰게 한다.

하지만 방효유는 붓을 내던졌다. 억지로 붓을 쥐게 하여 글을 쓰게 하자 방효유는 단 네 자를 쓴다.

<연적찬위(燕敵簒位)― 연나라 도적이 왕위를 찬탈하다.>

그것을 본 영락제는 단칼에 그의 입과 귀를 찢었고 그의 일족을 멸하였다.

신투는 영락제가 연왕 시절부터 그를 지원해 왔기에, 그가 황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도 도왔고 그것은 큰 영화로 돌아왔다.

영락제는 자신의 기반이 있는 북평으로 천도를 결정하고 성을 짓겠다 했고, 그 공사를 신투가 전반적으로 돌보며 이문을 챙기고 있었다.

하지만 신투 역시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았다. 방효유는 그도 존경하는 학자였다. 하여 마지막까지 설득하였으나, 그는 결국 끝까지 기개를 지켰다.

변질되지 않는 그 모습이, 신투의 눈에 선명했다.

“……신경 쓰이는 보고는 무엇이냐?”

신투의 물음에 벽풍은 그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열었다.

“약선을 살피던 자의 행방이 묘연합니다.”

“행방이 묘연하다? 그게 무슨 소리지?”

신투의 미간이 다시 한번 찌푸려졌다. 약선의 감시는 그의 지시였기에 나름 신경을 많이 쓰는 부분이었다.

이는 약선의 행동을 감시하기 위함이기도 하였으나, 오랜 시간 그녀를 연모한 신투가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알고 싶어 함이 더욱 컸다.

“말 그대로 갑자기 소식이 끊기고 사라졌습니다. 이상하게 여겨 다시 사람을 보냈지만 흔적을 찾지 못했고, 약선도 딱히 다른 모습은 없었습니다.”

“그래? 약선이 눈치를 채고…… 아니야…… 그녀가 혹시라도 눈치를 챘다고 한들 죽이지는 않았을 거야.”

“네.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다른 가능성을 두고 찾아보고 있습니다.”

“그래. 약선에겐 계속 사람을 붙여 놓도록 해. 그녀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최대한 멀리서 그녀의 이동만 파악하도록 해.”

“네. 그리고 다른 보고가 또 있습니다.”

“또 무슨 일이 있나?”

“무림맹주가 다른 뜻을 품은 듯합니다.”

벽풍의 말에 신투의 눈빛이 바뀌었고 흉험한 기세가 일었다.

“무림맹과 구파일방을 비롯한 여러 문파에 잠입시켜 두었던 첩자들이 모두 발각되어 죽거나 퇴출당했습니다. 그 모든 것이 무림맹주가 벌인 짓으로 파악되었습니다.”

“기르던 개가 이제 주인에게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건가?”

신투는 조금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보였다. 무림맹을 장악하기 위해 사람을 고르던 차에 ‘그들이’우금을 선택한 것은 신투의 추천이었다.

야망은 있으나 무림맹의 말단이던 그를 신투는 눈여겨보았고, 기연을 가장해 그에게 무공과 영약을 전했다.

과연 우금은 자신들의 바람대로 무림맹을 장악하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결속을 약화했다.

“무림맹주가 아마도 모든 것을 알아챈 듯합니다. 무림맹 내의 저희 정보는 물론 구파일방과 여타 문파들의 첩자들까지 파악한 것은 정말 의외였습니다. 워낙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저희가 대처도 못 한 채 수를 많이 잃었습니다.”

“우금 녀석이 어떤 생각으로 일을 벌이는 것인지 파악해 보았나? 사마련도 그 녀석이 독단으로 개입한 것이라 하지 않았나?”

신투는 조금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우금을 무림맹주에 자리에 앉힌 뒤 정파 간의 사이를 틀어 놓고 그 사이에서 많은 이득을 본 신투였지만, 흑월도존 체제의 사마련이 무너진 것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부분이었다.

사마련이 무너지면서 정사 간의 균형이 무너지고, 평화는 이제 바람 앞의 촛불이 되었다. 언제 정사대전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문제는 이것이 우금이 벌인 일이라는 게 문제였다.

“녀석의 행동으로 보면 사마련이 무너지고 독고진이 권력을 잡은 것도 의도한 것일 수가 있겠군. 설마 그 녀석…… 사파와 손을 잡은 것인가?”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사파는 이제 거의 한 달 사이에 사왕련 아래 집결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정사대전을 피할 수 없을 터입니다.”

“흐음…… 무림을 통일할 시기를 앞당겨야 할지도 모르겠구나.”

신투가 살짝 고민에 빠지자 벽풍은 또다시 그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또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응? 또 뭐지?”

신투는 짜증이 일었다. 안 그래도 기르던 개가 가출했다는 이야길 듣은 참이었는데, 이리 망설이며 보고를 미루는 양을 보니 앞선 이야기보다 더더욱 비보일 게 분명했다.

“검성의 제자가 나타났습니다. 도후의 제자로 보이는 여인도 나타났고요.”

“검성의 제자? 그가 살아 있다는 건가?”

신투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물었다.

“검성의 제자라 칭하는 자가 두 명 나타났습니다.”

“둘이나 나타났다고? 오십 년을 넘게 나타나지 않아 죽었다 여긴 그의 제자가 왜 갑자기…….”

신투는 벽풍의 보고에 정신이 혼망했다. 자신의 하는 계획에 직접적으로 차질이 생길 수도 있는 민감한 사안이었다.

“약선이 그를 그렇게 애타게 찾더니…… 설마 그녀가 찾은 것인가? 도후의 제자는 또 무엇이지? 그녀에게 제자가 있었던가? 그녀도 몸을 감춘 지가 십 년이 넘었는데, 그동안 제자를 두었던 것인가?”

“사실 도후의 제자는 소문만 무성하고 정작 본 사람은 없는 듯합니다. 검성의 제자까지 나타나면서 오절의 제자들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무림이 시끄럽습니다.”

“……재미있는 상황이군.”

신투는 다시 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신투가 생각에 빠질 때면 늘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젖히고는 꽤 긴 시간 말이 없었기에 벽풍은 그가 생각 마치기를 기다렸다.

현재 무림의 상황이 꽤나 급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간 길게 상황을 보며 평원의 건축 중인 성이 완공될 때까지 기다리려 하였으나, 우금과 오절의 제자들이 마음에 걸렸다.

그들이 변수로 작용한 이상, 평원에서 얻을 막대한 자금력으로 정사를 동시에 아우르며 무림일통하겠다는 기존 계획을 철회해야 했다.

사파의 사왕련과 무림맹의 우금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고, 그들의 손길이 닿지 않는 사패도 늘 위협적인 존재였다. 거기에 검성의 제자가 나타났다는 것은 벽령으로서도 큰 부담이었다.

꽤 긴 시간 침묵이 흐르던 중, 생각을 정리한 신투가 눈을 뜨며 벽풍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에게 집합령을 내리도록 해라. 이곳으로 집결시켜 모두의 이야기를 들어 본 뒤 판단하겠다.”

“네. 바로 소집 명령을 내리겠습니다.”

벽풍은 신투의 명에 드디어 자신들이 움직일 때가 다가왔음을 느끼고는 조금씩 흥분하기 시작했다.

“검성의 제자에 대해 알아본 사실이 있느냐?”

“네. 한 명은 이윤후라는 자로, 북해설응의 주인입니다. 들리는 이야기로는 무공이 그리 뛰어나지는 않은 듯합니다. 상대가 은설풍이긴 했지만 반격 한 번 제대로 못 하고 패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나타난 임진후라는 자는 일월문의 소문주인 천풍 공자를 단 일 합에 제압했습니다. 그리고 일월문주 양원과 대결까지 벌어지나 했는데 그냥 물러난 후 현재는 서안으로 가는 듯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습니다.”

“둘의 무공 수준이 다른가 보군. 일월문이라면 권왕의 제자의 문파가 아닌가? 재미있군. 그들을 한 번 만나 보고 싶은데 자리를 마련해 보도록 해.”

“네. 그것도 준비하겠습니다.”

벽풍은 신투의 명이 끝이 난 듯하자 방을 나섰고 신투는 다시 눈을 감고는 생각에 빠진 채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나진하…… 그 녀석이 살아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인가? 재미있군. 하하!”

신투는 갑자기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방을 나선 벽풍에게도 그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령주님도 이제 움직일 이유가 생기셔서 활기를 찾으신 듯하군.”

벽풍은 검성의 존재가 신투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에 신투가 저렇게 웃는 이유도 알고 있었다. 친우이자 연적이었고, 그가 넘어서야 할 존재였기에 다시 나타난 것에 저리 기뻐하는 것이리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