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은정연(殷定延)
“이제 다 울었느냐?”
검성은 자신의 품에 안긴 채 서럽게 울던 은한이 울음을 멈추자 그녀의 등을 토닥이며 물었고, 은한도 그제야 검성에게서 떨어진 채 눈물을 훔쳐 내었다.
“제가 못 볼 꼴을 보였네요…… 너무 답답해서 이렇게라도 말하고 싶었나 봐요…….”
은한이 조금은 기가 죽은 듯이 이야기하자 검성은 미소를 지었다.
“그럴 때가 있는 법이지.”
검성은 은한의 마음을 이해했기에 외모와 어울리지 않는 인자한 미소를 보이며 그녀를 위로했다.
그녀로서도 죽은 사람이 되어 비천에 자리 잡은 이상 모용연에게 나타날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 연심이 사라지지 않고 간직한 채 이제껏 살아왔을 테니, 지금 그녀의 반응은 검성으로서는 이해할 수가 있었다.
“모용가의 아이에게 모든 것을 밝힐 수는 없냐?”
검성의 물음에 은한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희는 세상에 밝혀지면 안 될 사람이에요. 그 사람 앞에 나설 수는 없어요…….”
비천의 특수성 때문에 정체를 밝힐 수 없다는 은한의 말을 이해한 검성은 조용히 위로해 주었다.
“……그 아이도 너를 기억하고 있던 거 같은데, 너를 보고 익숙해하지 않았느냐?”
“저를 기억할까요?”
은한은 검성의 말에 살짝 솔깃하여 물었다.
“네가 남장을 하고 있고, 너를 죽었다 생각할 터이니 알아보지 못하는 게 당연한 거 아니겠냐? 아까 모용가의 아이가 너를 보고는 만난 적 있지 않냐고 물었던 것도 너를 기억하고 있으니 물었던 것이겠지.”
“그럴까요……?”
은한은 검성의 말에 조금은 기분이 풀린 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차피 드러내지도 못할 거, 그 정도 말에 기쁜 것이냐?”
검성은 은한이 자신의 말에 위로받으며 표정이 풀린 것에 조금은 재미있다는 듯 물었다.
“모르겠어요. 그냥 어르신의 말에 위로가 되네요…… 그 사람만은 저를 기억해 주었으면 하는 욕심이 있어요…….”
은한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검성의 물음에 답했다. 이기적인 마음이고 드러낼 수도 없는 자신이었지만, 모용연이 자신을 기억해 주었으면 했다.
비천에 들어가 수련을 받고 비천인으로서 인정을 받은 후, 그녀는 늘 모용세가를 살펴왔고 모용연의 소식을 들어왔었다.
그가 무림인으로 명성을 떨쳐 갈수록 그의 앞에 나타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고 그래서도 안 되었다.
“그럼, 이리해 보는 건 어떠하느냐.”
“어떻게요?”
검성은 은한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해 주었고, 은한은 그 말을 듣고 놀라 안 그래도 큰 눈이 더욱 커지며 검성을 보았다.
“미련이 남는 것보다야 한 번 그렇게 해 보는 것이 어떠냐? 물론 정체는 밝히지 말고 말이야.”
“음…….”
검성의 제안에 은한은 고민되는 듯 생각에 빠졌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볼게요.”
“그래. 그럼 준비를 해야지.”
“지금요?”
검성이 벌떡 일어나자 은한은 놀라 물었다.
“너, 옷은 있느냐?”
“아니요…… 지금 이 옷 말고 여벌이 하나 있긴 하지만…….”
“그러니까 준비해야지. 점소이를 통해 지금 옷을 구할 수 있는지 아니면 내일 일찍 구할 수 있는지 알아봐야지. 아마 녀석들도 내일이면 출발할 테니까 말이야.”
검성은 말을 하고는 방을 나서 점소이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은한은 괜한 일을 하려는 것이 아닌가 걱정되긴 했지만, 검성의 제안이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일 수도 있었기에 후회를 남기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밤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 * *
아침이 밝아 오고, 밤새워 분주하게 움직였던 검성은 식사를 위해 혼자 내려와 있었다.
“오늘은 왜 혼자십니까? 일행은요?”
식사를 위해 내려온 모용연은 검성이 혼자 앉아 있자 물었다.
“그 사람은 일이 생겨 먼저 돌아갔습니다. 괜찮으면 식사를 같이하시죠.”
“그럴까요?”
검성이 권하자 모용연은 일행인 두 사람의 허락을 구하고는 혼자 검성의 맞은편에 앉았고, 모용세가의 남녀는 다른 자리로 가서 앉았다.
“이거, 어제는 제대로 이야기도 못 나누었는데 이렇게 자리를 권해 주니 기쁘네요.”
모용연은 넉살 좋은 웃음을 보이며 이야기했다. 그리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지만 서글서글한 인상에 성격이 좋아 보여 여자들에게 인기가 있을 만하다고 검성은 생각했다.
“모용세가는 서안에 셋만 가는 것입니까?”
“아니요. 저희는 천무지회 참가 신청 때문에 먼저 출발하는 것이고, 아마 뒤에 더 오실 겁니다. 워낙 오랜만에 열리는 무제이고 상품이 신장의 무기인 덕에 이번 천무지회에 많은 문파의 사람들이 참가도 하고 구경도 온다고 하더군요.”
“소문을 듣자 하니 천무지회 말고도 무림맹과 구파일방 그리고 오대세가 간의 회합도 있을 예정이라던데요.”
검성의 말에 모용연은 조금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말들이 있긴 하죠. 저도 상세한 내용은 모르겠습니다. 저도 세가에서 들은 바는 없고, 출발하고 나서야 들었던 이야기니까요.”
모용연도 회합의 이야기는 사람들을 통해 듣긴 했지만 자세한 사정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고 짐작만 했지 확신은 못 하고 있었다.
“임 소협께서는 이제 서안으로 혼자 가시는 겁니까? 그렇다면 저희랑 같이 가는 것이 어떻습니까?”
모용연은 검성과 친분을 쌓고 싶었기에 그런 제안을 했고, 그의 답을 기다렸다.
“아니요. 전 다른 일행과 만나서 가기로 했습니다.”
“다른 일행이요? 어제 그분 말고 또 일행이 있었습니까?”
“네. 아, 저기 오네요.”
검성은 계단을 올라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말했고, 모용연도 궁금하여 뒤돌아 계단 쪽을 보았다.
“아…….”
돌아본 모용연은 순간 탄성을 질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백의를 곱게 입은 여인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인은 나타나자마자 아침 식사를 위해 이 층에 앉아 있던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침어낙안(沈漁落雁) 폐월수화(閉月羞花).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을 까먹어 가라앉고, 기러기가 날갯짓하는 것을 잊고 땅에 떨어지며.
달이 부끄러워 구름 사이로 숨고, 꽃도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
나타난 여인은 은한이었다. 남장을 벗어 버린 채 여인으로 꾸며 나타난 것이었다.
하얀 피부에 큰 눈망울은 사람들의 눈을 사로잡았고, 붉은 입술과 흰 치아는 그녀의 이목구비를 더욱 빛이 나게 했다.
여인으로서 꾸민 은한을 보고는 검성도 놀랐고, 모용연은 아예 넋이 나가 있었다.
“늦었군요?”
“조금 일이 생겨서요. 이미 식사는 시키신 건가요?”
검성이 그녀를 반기자 은한은 능숙하게 반응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모용연이 자신에게 눈을 떼지 못하자 은한은 조금 만족했다. 꾸미는 것에 능숙하지 못했던 그녀는 점소이들이 구해 준 옷에 주방에서 일하는 여인네들의 도움을 받아 겨우 꾸밀 수가 있었다.
“이분은 누구인가요?”
은한은 시치미를 떼며 모용연을 가리키며 검성에게 물었다.
“아…… 저는 모용세가의 모용연이라고 합니다.”
은한의 물음에 모용연은 정신을 차리고 스스로 소개를 했다. 모용연은 이제껏 많은 여인을 만나 보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눈앞에 있는 은한이 자신이 본 여인 중에 가장 아름답고 기품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저는 은정연(殷定延)이라고 해요. 사문은 따로 없어요.”
은한은 본명을 이야기했다. 어차피 그녀의 성인 은씨는 비천에 가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성씨였고, 그전에는 성을 어머니의 성을 썼기에 말해 주어도 상관이 없었다.
“아…… 은정연…….”
모용연은 마치 기억에 새기려는 듯 이름을 되뇌자, 은정연은 미소를 보였다.
“왜, 제 이름이 이상한가요?”
“아니요…… 그게 아니라 사실 처음 봤을 때 누군가와 닮았다 생각을 했는데…… 이름까지 듣고 보니 제가 알던 이와 이름도 같고 생김새도 조금은 닮은 듯하네요…….”
모용연은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사실 그의 이야기가 상대가 듣기에 따라서 기분 나쁠 수 있다고 생각해 조심스러웠다. 자신의 말에 은정연이 표정이 굳어지자 모용연은 괜히 이야기했나 후회를 했다.
“제가 누구를 닮았나요?”
“아, 그게…… 제가 어렸을 적 알던 사람과 닮은 듯하여…… 그 아이가 성인이 되었다면 은 소저와 같지 않았을까 잠깐 생각을 했었습니다.”
모용연의 말에 은정연은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가 살살 올라가는 것을 참아 내야 했다. 모용연이 자신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서 표정이 주체가 안 되고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검성은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두 분이 어떤 관계이신지?”
모용연은 검성과 은정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물었다. 자신이 보기엔 선남선녀라 잘 어울리긴 했지만 은정연에게 첫눈에 호감이 생긴 그로서는 아무 사이가 아니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모용연의 질문에 둘은 서로를 바라보았고, 검성은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냥 동행하기로 한 사람일 뿐입니다. 안 지도 얼마 되지 않았고, 그저 이름만 아는 정도라고 할까요?”
“그런가요?”
모용연은 검성의 대답에 기쁜 듯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은 소저는 사문이 없다 하셨는데, 혹시 무림인이 아니십니까?”
모용연은 은정연이 무기를 들고 있지 않았고 무공을 익힌 것 같지 않아 물었다.
“대대로 무가는 아니었지만 가문의 무공은 익히고 있어요. 임 소협과의 동행도 무림의 경험을 위해 집안에서 임 소협에게 부탁한 일이고요. 다행히 임 소협이 허락을 해 주셔서 동행하게 되었지요.”
“그렇군요. 집안이 어디시기에 무림행을 사내와…….”
모용연은 자신도 모르게 질문이 많아졌다. 스스로도 질문이 너무 많다는 생각을 하고 끊었지만, 이미 검성이나 은정연 둘 다 자신을 보고 웃고 있었다.
“가문은 밝힐 수가 없어요. 그냥 이름 없는 무가인 것만 기억해 주세요. 저도 모용 공자를 기억하도록 할게요.”
은정연은 말을 하며 배시시 웃었고 그녀가 웃자 모용연도 자신도 모르게 따라 웃었다. 여인에게 딱히 관심이 없었던 그였기에 처음 보는 여인에게 이렇게 끌리는 것에 스스로 놀라고 있었다.
‘정말 예전의 그 아이와 닮았어…… 그 아이가 살아 있었다면 은 소저와 같지 않았을까?’
모용연이 은정연에게 끌리는 것은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 덕도 있었지만, 예전 자신의 정혼자였던 여인과 닮은 익숙함이 더 큰 이유였다.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모르는 모용연이었지만, 익숙함만은 느끼고 있었다.
모용연과 은정연이 알 수 없는 서로의 호감을 눈빛으로 교환하고 있자 검성은 민망함이 들었으나, 다행히 점소이가 시킨 음식을 들고 와 그 어색함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다.
“난 이미 음식을 시켰는데, 두 사람도 식사할 거 시키시지요.”
검성의 말에 모용연은 은정연과 서로 이야기하더니 식사를 주문했고, 이내 금세 친해져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 덕에 검성은 흐뭇하게 웃으며 점소이가 마련한 아침 식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예쁜 얼굴이라 생각은 했지만 저렇게 예쁠 줄은 생각도 못 했군.’
검성은 은정연의 외모에 조금은 놀라 살짝 한 번 바라보았다. 그런데 볼수록 자신이 알던 누군가와 닮은 것 같았다.
시선을 느낀 은정연이 그를 보자, 검성은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 * *
셋은 식사를 마치고 서안으로 각자 향했다.
이에 모용연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은정연 역시 그와 함께 동행하고픈 마음이었으나, 계속 같이 다닐 수는 없었기에 모용연의 동행 요청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다음에…… 꼭 다시 만날 인연이 있었으면 합니다, 은 소저.”
짧은 재회를 끝으로, 두 남녀는 낙양을 떠나 서로 다른 길을 걸으며 서안으로 향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