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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 돌아오다-82화 (82/251)

82화― 은한의 사정

모용연은 자신과 일행인 모용세가의 인원들과 서안으로 가던 중이었다.

북경에 들러 객잔에 숙소를 잡고 식사를 하던 차에 화미랑과 은한을 발견하고 다가온 것이었다.

보자마자 눈앞의 청년이 화미랑임을 확신한 모용연은 호승심이 일었다.

이미 모용세가의 절기들을 전수하며 무림에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모용연이었다. 하여 자신의 또래 중에는 적수를 찾을 수 없으리라 여겼다.

하지만 최근 천풍 공자 감오가 화미랑에게 단 일 합에 패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자신도 감오를 이길 수야 있겠다만, 일 합에 이길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화미랑의 실력이 과연 진실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나와 겨루고 싶은 것이오?”

검성도 모용연이 굳이 접근하여 천무지회에 참가에 관한 이유를 듣고 나자 흥미롭다는 듯 표정을 보이며 물었다. 검성도 호승심이 강한 편이었으나 현 무림에 그를 상대할 만한 인물은 없었다. 오절로서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권왕조차 지금은 차이가 급격하게 벌어져 있었고, 검성은 실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하는 처지지만 무인으로서 제대로 겨루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에 신투나 도후에게 조금은 기대를 하고 있었다.

무인으로서 강자와 싸워 보고 싶은 마음을 알았기에 모용연의 솔직한 이야기가 검성은 기분 나쁘지 않았다.

“네. 한번 겨루어 보고 싶군요. 이번 천무지회에 참가하신다고 하니, 그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모용연은 발갛게 볼을 상기시키며 말했고, 그런 그의 태도에 은한은 더는 시비를 걸지 않고 조용히 있었다.

‘여전하네…… 천상 무인인 것은…….’

은한은 모용연을 잘 알고 있었다.

그의 성격도 알고 있었고, 지금 얼마나 진심인지도 알았기에 더는 시비를 걸지 않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저도 겨루어 보고 싶긴 하군요. 모용세가의 무공은 유명하니 기대가 되오.”

검성의 말에 모용연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서안으로 가는 즐거움이 늘어난 것 같군요. 제가 조금은 무례했는데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용연은 그 말에 기쁘게 자리에서 일어나 검성과 은한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갔다.

“아는 사이인 거 같던데?”

모용연이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자 검성은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며 말했고, 은한도 젓가락을 들다가 멈칫하며 검성을 보았다.

“아셨어요?”

“모를 리가 없지. 그렇게 티를 내어 놓고는 말이야.”

검성은 살짝 미소를 보이며 물었다.

“그렇게 해도 저 사람은 저를 못 알아보았잖아요.”

은한은 조금 침울해하며 말했다.

은한의 그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에 검성은 더욱 두 사람의 사이가 궁금해졌다. 그사이에 점소이가 술을 가지고 왔고, 검성은 기쁘게 술은 받아 들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어? 술을 먹겠다고?”

검성은 은한과 같이 다니며 늘 혼자만 마셔 왔기에, 술을 달라는 그녀의 말에 놀라 물었다.

“아까워서 그러는 거예요?”

“아니…… 그럴 리가 있나. 어차피 네가 사 주는 술인데.”

검성은 점소이가 잔을 두 개를 가져왔기에 바로 은한에게 주고 술을 들었다.

코끝으로 느껴지는 술의 향기에 군침을 삼켰다. 얼른 자신도 마시기 위해 은한에게 한 잔 채워 주고는 자신의 잔을 채웠다.

“향기가 정말 좋은걸.”

술잔에 담긴 술의 향기에 검성은 감탄했다. 은은하게 퍼지는 매화 향에 미소를 지었다.

“나름 유명한 술이니까요. 안 그래도 다들 백매주는 향기에 취하고 술에 두 번 취한다고 말하더라고요.”

은한은 받아 든 술잔의 향기에 취한 듯 이미 얼굴에 홍조가 피어올랐다.

“그럼, 얼른 마셔야지.”

검성은 향을 다시 한번 음미하고는 잔을 들이켰고, 은한도 빨개진 볼을 한 번 만지고는 잔을 들어 술잔에 입을 가져다 대었다.

“이햐, 이거 정말 맛이 좋은걸. 입 안에서 향이 퍼지는 듯한 것이 새로운 기분인걸.”

검성은 백매주의 맛에 감탄하며 은한을 보았다. 그녀는 한 잔에 이미 취한 듯 볼이 아까 전보다 더욱 빨개진 채 술병에 손을 가져가고 있었다.

검성은 잽싸게 술병을 사수했고 그녀는 검성을 살짝 노려보았다.

“한 잔 더 주세요~”

술 한 잔에 취해 혀가 살짝 꼬인 은한의 모습에 귀여웠지만, 더는 마시게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과 백매주를 자신만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교차하여 술병을 사수했다.

“술은 그만 마시고 이야기나 해 보아라.”

“무슨…… 이야기요?”

눈까지 살짝 풀린 은한의 모습에 검성은 혀를 찼다.

“무슨 술도 못 먹는 녀석이 술을 입에 댄 것이냐? 저쪽의 모용가의 아이와 네 관계 말이다.”

검성은 자리에 돌아간 모용연을 가리키며 물었고, 은한은 모용연에 눈길을 주고는 다시 술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저따위 남자는 저는 몰라요~”

짝―

“아…… 치사하게 술 주기 싫은 거예요?”

술을 잡으러 가던 손이 검성에게 저지당하자, 은한은 입술을 살짝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그러는 거 보니 여자인 거 같기는 하구나.”

검성은 은한이 약간은 애교를 비슷하게 피우자 그녀가 여인 같아 보였다. 그 말에 은한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말이 없었다. 검성은 자신의 비운 술잔을 채우고는 은한의 잔도 다시 채워 주었다.

“이야기해 보아라. 저 녀석과 어떤 사이기에 네가 이렇게 흐트러지는 게냐.”

검성은 은한이 안 보이던 모습까지 보이자 더 궁금하여 물었다.

“저 눈치 없는 사람과…… 제가 어떤 사이냐면요…….”

은한은 모용연을 힐끔 쳐다보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고 검성은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제 정혼자…… 랍니다…….”

“응? 정혼자? 그런데 왜 못 알아보는 거야?”

검성은 둘이 꽤 친한 사이일 것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정혼자라는 말은 좀 의외였다.

“어릴 적에 집안끼리…… 정혼했지만 그것은 사라진 약속이니까요…… 저 사람에게 전…… 죽은 사람이에요…….”

은한은 말을 하다 울음을 터뜨렸고 검성은 급히 당황하였다. 은한이 웅크린 채 대성통곡을 하자 객잔의 많은 사람이 쳐다보았고, 검성은 그녀를 달래느라 고생해야 했다.

결국 이야기를 다 듣지 못한 채 울다 지쳐 잠든 은한을 방에 데려다준 검성은 그제야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한숨 돌린 채 쉴 수가 있었다.

* * *

“아직 깨어 계시는가요?”

“들어와라.”

자시(子時)가 지난 시각, 술 한 잔에 취해 뻗었던 은한이 깨어나 검성의 방을 찾았다. 자기가 했던 말들이 기억나 죽을 듯이 부끄러웠지만, 검성의 방에 불이 안 꺼진 것을 확인하고 인기척을 내었다.

은한은 민망한 듯 얼굴을 푹 숙인 채 방으로 들어왔고 검성은 그 모습에 피식 웃음을 보였다.

“먹지도 못할 술은 왜 마신 것이냐?”

“그게…… 너무 화가 나서…….”

“앉아서 아까 못 들은 이야기나 들어 보자.”

검성은 은한에게 자리를 권했다. 그녀도 어차피 다 말할 생각으로 검성을 찾았기에 자리에 앉고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모용가의 아이가 네 정혼자라고 했는데 정말이냐?”

검성의 물음에 은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이 이 부분을 다시 묻는 이유를 은한은 잘 알고 있었다. 비천처럼 신비지문의 일원이 모용세가와 정혼을 했다는 것에 의문을 가진 것이었다.

“저와 어머니는 원래 비천(秘天)의 사람이 아니었어요. 원래는 요동성(遼東省)의 제법 큰 무가의 사람이었죠.”

“요동성이라고 하면 모용세가와 접점이 있을 만하구나. 그런데 왜 지금은 비천에 있는 게냐.”

“원래 제 어머니는 이동하던 중에 괴한들의 습격을 받았고, 그것을 한 사내가 구해 주었어요. 어머니는 그 사내에게 반하였고, 둘은 사랑에 빠졌죠. 그 사내가 제 아버지예요. 하지만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정체를 알려 주지 않은 채 몇 달에 한 번 정도 만나러 왔고, 둘의 그런 만남 속에 제가 생겨났죠.”

“집안에서 난리가 났겠군.”

검성은 대충 이야기를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은한의 아버지는 아마 비천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러니 정체를 밝히지 못했을 터.

게다가 신분도 밝히지 않은 남자와 연정만 쌓은 게 아니라 임신까지 해 버렸으니, 여자의 집안이 발칵 뒤집혀졌으리라.

“네. 원래 어머니는 모용세가에 정혼이 되어 있는 몸이었어요. 하지만 임신을 하게 되자 집안이 발칵 뒤집혔고, 어머니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추궁당하게 되었죠. 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에 대해 이름만 알 뿐, 어디 사는 사람인지 신분은 무엇인지 아무것도 몰랐기에 말할 수가 없었어요.”

“난감한 상황이었겠구나.”

“네. 그래도 제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리 매몰찬 분들이 아니셨지요. 누구의 씨인지도 모를 아이를 밴 어머니를 감싸주었어요. 문제는 모용세가와의 정혼이었는데 그것도 다행히 모용세가에서 사정을 봐주어 잘 무마되었지요.”

명문대파 여식이 혼전임신 했다는 것은 곧 여인의 목숨이 위협당할 만큼 중대한 사안이었다. 한데 예상과 달리 굴곡 없이 무난하게 해결된 모양이었다.

“하여간 잘 무마된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란 사람은 어머니와의 마지막 만남 이후 나타나지도 않았고, 어머니는 혼자서 절 낳아야 했죠. 그렇게 전 열 살이 되기까지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자랐어요.”

말을 하던 은한의 표정이 조금은 차가워지고 있었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며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는지 중간중간 말을 멈추며 이야길 이어 나갔다.

“할아버지께서 무림에서 명성이 자자하시진 않았지만, 요동성에서는 나름 이름이 알려져 있었습니다. 저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랑과 어머니가 있었기에 잘 지낼 수가 있었지요. 밤마다 어머니는 홀로 눈물을 흘리셨지만…… 그 당시 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어요.”

“…….”

“할아버지의 가문과 모용세가는 친분이 두터워 교류가 잦았고, 저도 할아버지를 따라 모용세가에 자주 놀러 갔었어요. 그래서 그 사람과도 가깝게 지냈고…… 모용세가에서 저를 예쁘게 봐주어 예전에 깨졌던 정혼을 들어 그 사람과 저를 맺어 주려고 했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기에 네가 비천의 사람이 된 것이냐?”

은한이 괴로운 표정을 보이며 말을 멈추자 검성이 물었다. 은한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며 눈물을 한 방울을 흘렸고, 울음을 참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열두 살의 생일날 괴한들이 급습하여…… 할아버지의 문파가 처참하게 부서졌고, 저와…… 어머니는 할아버지의 가신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도망을 갈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멀리 도망가지 못하고…… 붙잡혔고, 죽겠다고 생각한 순간 누군가 저희를 구해 주었죠.”

은한은 흐르는 눈물을 닦아 내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저는 처음 본 순간부터 저희를 구해 준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 수가 있었어요. 아버지는 비천의 후계자였습니다. 그 당시 비천의 후계 싸움이 치열해 아버지의 상대가 어머니와 저의 존재를 알고는 아버지를 협박하기 위해 납치하려 했고, 아버지는 나중에 이런 일을 생길 것을 염려해 어머니와 저의 존재를 철저하게 숨기고 계셨던 거였죠. 어머니와는 편지를 몰래 주고받고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고요.”

“다행히 버림받은 것은 아니었구나.”

“하지만…… 그 일로 인해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저희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던 모두가 저희 때문에 죽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날로 저희는 죽은 사람이 된 채 아버지를 따라 비천으로 들어갔지요…….”

은한은 감정을 추스르며 말을 끊었다. 검성도 은한의 사정을 듣고 나니 모든 것을 이해할 수가 있었다.

은한은 모용연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바로 알아봤고, 그는 은한의 어릴 적만 알고 죽었다고 생각했으니 알아보지 못한 것이었다. 남장하고 있던 탓이기도 했고.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모두 해 주어도 상관없는 것이냐?”

다 듣고 나니 비천의 비밀과 은한의 출생비사였다. 단순한 남녀상열지사이리라 여겼건만, 생각보다 깊은 이야기였다.

“어차피 제 신분을 아신다고 달라질 거는 없으시잖아요? 저를 이용하실 것도 아니고요.”

“그건 그렇지.”

은한은 눈물의 흔적을 지워 내며 억지로 웃음을 지었다. 검성도 그런 그녀가 안쓰러운지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모용가의 아이에게 너라는 것을 밝히지 못해 힘들었겠구나.”

“네…… 흐흑…….”

검성이 다가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자, 은한은 참았던 눈물이 다시 터져 올라 검성의 품에 안긴 채 울기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좋아했던 모용연을 갑자기 보게 되어 놀랐지만, 자신을 밝힐 수가 없었다. 알아보지 못한다고 서운해했지만 정작 그를 떠난 것도 자신이었기에 그를 원망할 수도 없었다.

그런 감정들이 뒤섞이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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