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천통자의 새로운 임무
“태행지로 능최거 약비군심 시탄도.(太行之路 能催車 若比君心 是坦途.)”
태행산 길은 험해 수레를 부수어 놓지만, 그대 마음에 비하면 이는 평탄한 길이라네.
당대의 유명한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태행로(太行路)의 한 구절로, 사람으로 인한 마음고생이 태행산의 험한 산길보다 더 힘들다는 뜻이었다.
태행산은 산서와 하북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산이 높고 산세가 급격하여 까마득한 절벽도 존재하는 험산이었다.
그런 태행산에 한 사내가 백거이의 태행로를 여유롭게 읊어 대며 유유자적(悠悠自適) 거닐고 있었다.
“매번 오는 산이지만 적응이 원체 안 되는군…… “
중년의 염소수염을 기른 사내는 천통자(天通子)였다. 화산에서 검성과 헤어진 후 어느새 태행산에 와 있었다.
“으음…….”
천통자는 움직이던 발을 멈추고 앞을 보았다. 자욱하게 낀 안개로 인해 시야가 불분명했다. 낮인데도 불구하고 자욱한 안개가 주위를 뒤덮고 있었으나, 천통자는 개의치 않고 멈추었던 발걸음을 다시 옮겨 안개 사이로 들어갔다.
자욱한 안개로 시야는 어두웠지만 천통자는 무언가를 중얼거리며 눈을 감은 채 거리낌 없이 걸어 나갔다.
“좌(左) 삼 보(三步)…… 앞으로 십 보(十步) 그리고 다시 좌로 오 보(五步)…….”
이내 감았던 눈을 뜬 천통자 앞에 안개가 사라진 주변 경치와 함께 두 명의 건장한 사내들이 보였다.
“오랜만이군.”
천통자가 사내들을 알아보고는 반가운 인사를 건네자, 두 사내도 천통자를 향해 예를 취했다.
“어서 오십시오. 안 그래도 회주께서 바로 모셔 오라고 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사내들이 천통자를 향해 깍듯이 예를 취했으나, 천통자는 그들의 그런 환대가 익숙한 듯 너털웃음을 보였다.
“이거, 쉴 틈을 안 주시는 건가? 회주께서 찾으신다면 바로 가야겠지. 안내해 주게.”
천통자의 말에 두 사내는 바로 발을 움직였고 발을 재촉하여 빠르게 어디론가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안개를 뚫고 들어온 이곳에는 마치 마을처럼 군락이 형성되어 있었다. 자욱했던 안개는 이 군락을 숨기기 위한 절진이었다.
두 사람은 가장 큰 저택의 안으로 천통자를 안내했다. 곳곳에 지키는 무사들이 있었지만 무사통과되었다.
이내 저택의 한 방문 앞에 멈추었고 기척을 내었다.
“천통자가 도착했습니다.”
“안으로 들이도록 해라.”
사내의 말에 안에서 허락이 떨어지자 천통자는 혼자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에는 향긋한 향기가 천통자의 코끝을 자극했다.
천통자는 큰 책상 앞에 여인을 보고 무릎을 꿇었다.
“회주를 뵙습니다.”
“일어나세요.”
이 여인이 바로 비천회의 회주였다.
그녀가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리자 천통자는 고개를 들고 일어났다.
비천회주는 중년의 미부(美婦)였고, 누가 봐도 아름다움을 느낄 만한 고혹적인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무림에서 너무 즐기시는 거 아닌가요?”
비천회주는 천통자를 보며 웃으며 이야기했고, 천통자는 멋쩍은 표정을 보이며 입을 열었다.
“즐긴다고 말할 게 있나요?”
“은위단(隱衛團)을 써서 도찰원(都察院)의 첨도어사를 한 명 처리하셨더군요.”
“아…… 그건…….”
천통자는 비천회주의 말에 난감한 표정을 보였다. 화산의 아랫마을에서 자신을 구타했던 관인을 혼내 주려 은살을 시켜 첨도어사의 비리가 모두 폭로되도록 만들었는데, 보고도 하지 않은 그 일을 회주가 먼저 꺼내니 찔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제가 보고를 하지도 않고 은살에게 부탁하여 그런 짓을…….”
“아니에요. 상황은 이미 알고 있으니. 그런 일을 천통자가 했다 한들 내가 뭐라고 할 부분은 아니죠. 하지만 현재 황궁의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관인들과 부딪치는 일은 최대한 삼가도록 해요.”
비천회주는 나긋나긋한 음성으로 혼을 내자 천통자는 조금 주눅이 들었다.
“천통자 덕에 우리가 검성의 정보를 가장 먼저 파악했으니, 칭찬을 해 주고 싶어 불렀어요.”
회주의 말에 천통자는 표정이 살짝 풀렸다. 그녀의 말처럼 비천은 검성의 생존을 확인하고 위치까지 파악하는 상황이었기에 비천의 일이 훨씬 수월해지고 있었다.
그 모든 공이 천통자에게 있었다. 그것을 비천회주가 칭찬하자 천통자는 혼이 난 것을 조금은 만회한 듯싶었다.
“그래도 검성의 생존을 확인한 이상 사파의 도발은 어느 정도 억제가 되지 않겠습니까?”
천통자는 조심스레 비천회주에게 말을 건네었다. 현재 비천의 모든 관심사와 인력은 사왕련의 사파 통일이 언제 이루어지느냐에 맞춰져 있었다.
사왕련이 사파 통일을 빨리 이룰수록 정파에게 그 칼날이 겨누어지게 될 것이기에 비천은 특별히 신경 쓰고 있었다.
“정사가 큰 싸움을 하더라도 검성은 아마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을 거 같아요.”
“네? 설마요…… 그래도 오절의 검성이신데…… 다른 오절이라면 몰라도…….”
천통자는 비천회주의 말에 깜짝 놀라 물었다. 사실 그도 검성이 나타나면서 사왕련의 힘을 억제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비천회주의 말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정연(定延)의 말로는, 검성은 정사대전이 일어나든 말든 그에 관한 관심이 전혀 없다고 해요. 저도 아마 그가 관심이 없을 것이라 짐작했지만…… 막상 듣고 나니 놀라긴 했어요.”
비천회주가 말하는 ‘정연’은 은한의 본명이었다. 그녀는 처음부터 남장에 더해 이름도 가명을 쓰고 있었다. 원래는 은정연으로 현 비천회주의 딸이었다.
“그럼 큰일이 아닙니까? 검성이 나서 주어야 무림에 뜻이 없던 약선까지 나설 거고, 그렇게 되어야 서문세가까지 이 일에 합류할 것이라 예상했는데…… 검성이 이 일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정파로서는 큰 위기입니다.”
천통자는 조금은 심각한 표정이 되어 이야기했다. 비천에서도 반로환동의 경지에 달한 검성이 정사대전을 막고 사왕련을 처리해 주리라 기대했었는데, 검성이 방관만 한다면 정파의 큰 위기라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파가 화합되지 않은 상태라 더욱 그랬다. 하나 된 사파의 힘을 이미 흑월도존을 통해 보았기에 천통자로서는 더욱 걱정이었다.
평화에 취해 있던 정파는 오절의 시대 때부터 억압되고 피해를 받아 온 사파의 분노를 받아 내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대로 정사대전이 벌어진다면 큰 위기가 오겠지요.”
“물론입니다. 저희가 파악한 바로는, 정파는 절대 사파를 이기지 못합니다. 거기에 정사대전이 벌어지면 무림을 호시탐탐(虎視耽耽) 노리고 있는 사패의 세력들도 움직일 게 분명합니다. 그렇게 되면…… 무림은 큰 혼란에 빠질 것입니다.”
천통자는 세인들아 예상하는 것 이상으로 현 상황이 암울하다고 여겼다. 무림인들은 그저 당장의 정사대전을 걱정했지만, 모든 세력을 살피고 있는 천통자는 이미 무림의 분위기를 파악한 사패가 준동을 준비하고 있으리라 확신했다.
최근 운남성 한 마을에서 독을 실험한 만독문이나, 서장에서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불마사가 특히 심상치 않았다.
“이번에 천무지회를 핑계로 정파의 수뇌부가 모인다고 들었는데, 그 일이 잘되어야겠군요.”
천통자는 태행산으로 오던 중에 천무지회의 소식을 들었고, 그 내막을 이미 파악했기에, 정파에서 이제 정신을 차리고 힘을 합치려 한다 생각했다.
“천통자도 그리 생각만 하시는 겁니까?”
“네? 그게 무슨…….”
비천회주의 말에 천통자는 놀라 물었다.
“무림맹주인 우금이 갑자기 정파를 화합하려는 것이 의심스럽지는 않나요?”
“아……!”
비천회주의 말에 천통자는 뒤통수를 맞은 듯한 충격을 받았다.
현재 상황에 너무 간과하고 있었던 부분이었다. 우금이 변절한 오절에게 조종당한 것은 맞으나, 그것은 우금의 욕망이 오절의 뜻과 맞았기 때문이었다.
우금은 지금껏 무림의 위협을 일으켜 왔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정파를 이용한 자였다.
그가 무림맹에서 오절의 첩자를 몰아낸 것이 되레 위험하게 작용할 수 있었다. 이제 우금을 통제할 세력이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보로 볼 때, 무림맹주 우금은 정파 무림을 난세로 이끌 게 분명했다.
“설마…… 무림맹주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천무지회를 열었다고 의심하시는 겁니까?”
천통자가 최악의 상황을 예상하며 비천회주에게 물었으나, 그녀는 답하지 않은 채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시 빠졌다.
‘흑월도존이 병상에 든 것도 무림맹주의 짓이라는 증거가 있고…… 그것이 현재 사왕련으로 가는 실마리가 된 것…… 설마 무림맹주는 사파와 내통하고 있을 수도…… “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자, 그의 생각이 점점 최악의 상황으로만 이어졌다. 문제는 최악의 가능성이 꽤 확률 높다는 점이었다.
천통자는 비천회주의 말을 기다렸고, 꽤 긴 시간이 흘러 비천회주가 눈을 뜨고는 입을 열었다.
“저도 생각하기 싫은 부분이긴 하지만, 무림맹주의 움직임이 꽤 의심스러운 게 사실이에요.”
“의심스러운 움직임이 있었습니까?”
“천통자도 아는지 모르겠지만, 최근 운남성 외곽의 작은 마을 하나가 알 수 없는 병으로 인해 몰살한 일이 있었어요.”
“아…… 들었습니다. 알아보기 위해 파견된 곤륜파의 무사들도 실종되었다고 하지요.”
그 일로 인해 황궁까지 나섰기에 천통자도 들은 바가 있었다. 예전 만독문의 혈겁 때와 상황이 비슷하여 꽤 큰 소문이 났던 일이었다.
“그 일도 무림맹주가 관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어요. 정확하게는 벽령과 십인회가 무림맹주를 통해 벌인 것인지는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무림맹주 본인이 생각하고 벌인 일이라면, 이건 꽤 큰 문제입니다.”
“무림맹주가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사패를 이용한 것은 꽤 있었던 일 아닙니까?”
천통자는 우금이 자주 사패를 끌어들여 온 일을 알고 있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 맹주의 자격을 문제 삼으려 할 때마다 사패를 이용해 면피한 일이 꽤 있었기에, 천통자는 이번에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했다.
“그 사건이 있던 시기에 무림맹주를 퇴임시키려는 움직임이 오대세가에서 있었지요. 그것을 무마하기 위한 움직임이었단 생각은 들지만, 느낌이 좋지 않아요. 상황도 의심스럽고요. 무엇보다 독고진을 자극하여 사마련을 무너뜨린 점이 가장 이해할 수 없어요.”
“그건…… 그렇지요.”
천통자는 물론, 비천의 사람 모두는 왜 무림맹주가 유상휘에게 독을 써 무력화시켰는지에 대한 동기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게다가 유상휘의 대제자인 독고진까지 부추겨 반란을 일으키고, 정사대전의 상황까지 만든 점은 정말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부분이었다.
사마련 유상휘의 체제가 길어져야 우금 자신도 무림맹주로서 권력을 휘두르기 좋았을 텐데, 그것을 무너뜨리며 정파를 위기에 빠뜨린 것 자체가 난제였다.
단순히 자신의 맹주 자리가 위협받았기 때문이라 받아들이기에는, 그 파급력이 너무나 거대했다.
독고진이 사왕련을 만들면서 빠르게 사파를 통합하고 있었고, 그 위협은 맹주 자신의 목으로 오기 직전이었다.
“어제도 회의를 통해 이야기했던 부분이지만, 무림맹주에 대한 감시를 확실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그럼, 저를 부르신 이유가…… 혹시……?”
“네. 천통자도 서안으로 가서 천무지회를 살펴보도록 하세요. 은위단을 일부 내어 줄 테니 이용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천무지회가 궁금했던 참인데, 나쁘지 않은 지시군요.”
천통자는 너털웃음을 지어 보였고, 그 모습에 비천회주도 살짝 미소를 보였다.
“이번 일은 무림의 명운이 걸린 일지도 몰라요. 정말로 무림맹주가 다른 생각을 품고 있는 것이라면 무림은 큰 위기이니 신경 써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럼 바로 준비하여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천통자는 비천회주의 말에 책임감을 느끼고는 진중한 표정으로 답했다.
“긴 여행으로 피곤하실 텐데, 제가 천통자를 너무 막 대하는 게 아닌지 모르겠군요.”
“괜찮습니다. 회주의 얼굴을 뵈니 나름 기운이 나는군요.”
비천회주의 말에 천통자는 농담하며 넘겼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자기 임무의 중요성을 알았기에 나름 기쁘기도 했다.
마음이 급해진 천통자는 비천회주에게 작별을 고하곤 바로 나와서 은위단을 이끌고 서안으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