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홍아(鴻兒)
“우리가 핵심을 찌른 거 같지?”
소천개는 홍아를 보며 이야기했고 홍아는 검성을 한 번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검성은 소천개의 말에 반응이 없었지만, 은한은 확실히 놀라는 것을 보여 주었다. 오절의 세 명이 변한 것은 비천만이 아는 사실이 아니었다.
개방도 그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번 무림맹과 구파일방 그리고 오대세가에서 대대적으로 펼쳐졌던 내부 첩자 숙청 건에 관해서도, 개방은 이미 그 일에 오절이 개입되어 있음을 먼저 파악하고 처리해 둔 상태였다.
개방은 이미 신투와 권왕 그리고 도후가 각각의 세력을 비밀리에 움직이는 세력이 정파 무림에 호의적이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하여, 그런 그들을 검성이 찾는다는 것이 절대 그냥 친우들을 찾는 것일 리가 없다는 게 홍아의 생각이었다.
“임 소협의 정확한 의도를 들어 본 뒤 알려 줄지 말지 판단해요.”
홍아는 소천개에게 말하고는 그의 등 뒤에 숨어 몰래몰래 검성을 훔쳐보기 시작했다. 이미 소천개의 질문에 허를 찔린 그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실책이에요. 개방도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다면 검성이 그들을 찾는 것을 당연히 이상하게 여길 게 당연했는데…….”
“괜찮다. 어차피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일이니까.”
검성은 당황하는 은한을 안정시켰다. 홍아와 소천개가 저들끼리만 의견을 나눈다며 기막을 펼치긴 했으나, 무공의 절정에 다다른 검성은 이미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하여 검성은 한 발짝 앞으로 나서 소천개 뒤에 숨어 있는 홍아를 보았다.
“예상하신 대로 사부님이 그들을 찾는 것은 친우를 그냥 만나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가?”
소천개는 검성의 말에 자신의 등 뒤에 달라붙어 있는 홍아를 보았으나, 홍아는 그의 머리를 앞으로 밀었다.
“방주, 날 보면 어떻게 해요. 아까부터 화미랑이 저를 주시하고 있는 것이 심상치 않아요. 이미 눈치를 챈 거 같단 말이에요.”
홍아는 검성이 자신을 계속 의심의 눈빛으로 주시하고 있음을 눈치챘다. 화미랑이란 별호에 얼굴을 보고 싶어 나서긴 하였으나, 본래 자신은 세간에 알려져선 안 될 존재였기에 방주 등 뒤에 고개를 숨겼다.
“홍아, 검성의 제자이고 비천의 일원인데 너의 존재를 안들 그리 위협이 되진 않을 거다. 그러니까 너를 이들 앞에 내놓은 것이고 말이야.”
홍아의 걱정과 달리 소천개는 태평했다. 사실 홍아는 나이는 어렸지만 뛰어난 오성(悟性)을 지닌 천재였다. 엄청난 기억력과 암기력으로 개방의 모든 정보를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었다.
이름 모를 기녀의 아이로 태어나 버려졌지만, 소천개가 직접 거두어 개방에 데려왔다.
어린 홍아가 보통의 아이와 다름을 알았을 때, 그는 개방의 모든 정보를 홍아가 총괄하도록 가르쳤다. 그의 생각대로 홍아는 각지에서 들어오는 정보와 기존에 알고 있던 개방의 모든 정보까지 외워 기억했다.
따로 정보를 찾고 기록할 필요 없이 홍아의 존재 하나로 모든 것이 해결 가능해졌다. 어린 그녀의 정체를 아는 이가 개방의 장로 중 극소수에 불과할 만큼 홍아의 존재는 극비에 가까웠다.
개방의 모든 정보를 알고 세상의 정보를 기억하는 그녀의 존재가 드러난다면 많은 이들이 홍아를 노릴 것이기에 소천개도 홍아를 시종으로서 데리고 있는 척하고 있었다.
다만, 검성의 제자가 은한과 함께 왔다기에, 홍아의 존재를 내보인 것이다.
“그렇게나 저들을 믿는다는 건가요?”
“너는 믿지 않는 것이냐?”
“그거야…… 확실히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아요.”
홍아는 검성의 제자를 힐끔 보고는 말했다. 소천개도 홍아와 이야기를 멈추고 눈앞의 청년을 보았고,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듣고자 하는 이야기만 해 준다면 임 소협이 원하는 정보를 드리리다.”
“듣고자 하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소천개의 말에 검성이 물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비천까지 임 소협과 다니면서 왜 오절의 정보가 필요한지 말이요.”
“그건 말씀드리기가 힘듭니다.”
“그럼, 나도 정보를 줄 수가 없을 거 같군.”
소천개는 검성이 순순히 답해 주지 않을 것을 예상했었기에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은한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다가 소천개가 강경하게 나오자 조금은 당황하고 있었다. 개방이 혹시라도 협조를 해 주지 않는다면 비천회주가 준 서찰을 소천개에게 전할 생각이었지만, 그것은 마지막에 할 일이었다.
‘도대체 회주는 무엇을 확인하려 이것을 마지막의 수로 쓰라고 했을까? 마치 개방이 이렇게 나올 것을 예상이나 하신 것처럼…….’
은한은 품 안의 서찰을 만지작만지작하며 검성의 말을 기다렸다. 비천회주가 서찰을 전하면서 검성의 행동을 끝까지 지켜본 뒤 마지막에 내놓으라고 했기 때문이다.
“혹시 이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검성은 정천검(正天劍)을 앞으로 내밀며 소천개에게 물었다.
“그건 임 소협의 검이 아닌가? 왜 그것을 나에게 묻지?”
소천개는 그 행동에 의아함을 느끼며 되물었고, 홍아도 검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보았다.
“이것은 정천검이라고 합니다. 사부님의 애검이죠. 예전 개방의 방주였던 취선개(醉仙丐)께서 사부님에게 약조한 것이 있는데, 혹시 모르십니까?”
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소천개는 홍아를 보았다. 취선개라면 자신의 사부인 전대 방주보다 윗대의 인물이었다. 개방의 모든 정보를 가진 홍아가 모른다면 아무도 모를 일 같았다.
“아…… 방주, 취선개 어르신의 기록에서 본 기억이 있어요.”
홍아가 뭔가 기억난 듯 말하자, 소천개는 물론 은한도 검성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궁금했기에 홍아의 말에 집중했다.
“무엇을?”
“취선개 어르신은 검성에게 큰 도움을 받은 적이 있었고, 그 일로 인해 나중에 검성이 개방에 도움을 청한다면 이유를 불문하고 한 번은 도와주겠다고 약조를 했다는 기록을…….”
“아, 그래서 임 소협이 검성의 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천검을 보여 준 것이군.”
소천개는 검성이 정천검을 들이민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이거…… 이렇게 되면 우리가 졌는걸? 그렇지?”
소천개는 조금은 허탈한 웃음을 보이며 홍아에게 물었다. 그로서도 검성과 비천이 도대체 무슨 일로 다른 오절을 찾는지 듣고 싶었지만, 취선개의 약조를 들이민 이상 이제 묻지 않고 검성에게 협조해야 할 상황이 되었다.
자신의 애검이자 신물이라고 할 수 있는 정천검을 내밀며 소천개에게 개방 큰어른이 남긴 약조를 지키라 청한 것.
개방에게는 도움받을 일이 나중에 더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최대한 아끼고 싶었으나, 사실대로 소천개에게 이야기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홍아, 저들이 듣고 싶어 하는 걸 아는 대로 이야기해 줘.”
소천개는 등 뒤에 숨어 있는 홍아를 앞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괜찮을까요? 제가 앞에 나서도…….”
“괜찮아. 나도 나름 사람 보는 눈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야.”
“그래도…….”
홍아는 그래도 안심이 안 되는지 머뭇거렸다. 워낙 어릴 때부터 그녀의 재능으로 인해 이곳저곳에서 이용을 당했던지라 더욱 걱정이 많았다. 어릴 적 소천개에게 거두어졌지만 개방에서 자라며 그녀의 재능을 먼저 알아낸 것은 소천개가 아니었다.
한 거지가 홍아의 재능을 알고는 도박에 그녀를 이용했었고, 그녀는 도박판에 끌려다니며 어릴 적 고생을 해야 했다.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지고 소천개가 자신이 거둔 홍아를 직접 데리고 다녔다.
그래서인지 홍아는 사람의 앞에서 자신의 재능을 보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걱정하지 마. 비천의 사람이고, 검성의 제자라면 믿을 수가 있으니 말이야.”
소천개가 홍아를 달래자 홍아는 마음을 먹은 듯 검성의 앞에 서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요?”
어린 홍아의 당돌해 보이기까지 한 말에 검성은 허리를 낮추어 무릎을 굽혀 소녀와 눈을 맞추었다.
“신투와 도후의 행방. 그리고 그들 세력의 정확한 정보까지…….”
검성의 물음에 홍아는 뒤돌아보았으나, 소천개는 답해 주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신투의 행방은 저희도 알지 못해요. 신투는 아예 모습을 감춘 지 오래고, 그의 세력은 벽령(碧鈴)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워낙 비밀스러운 조직이고 변절한 오절의 조직 중 가장 체계적이고 비밀스러운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요.”
설명이 시작되자 모두 홍아의 말에 집중했다. 소천개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개방이 가진 모든 정보를 알고 있는 게 아니었고, 그 모든 정보를 취합하고 머릿속에 저장하고 있는 것은 홍아였다.
“도후는 변절한 삼인 중 가장 소극적으로 움직였고, 딱히 무림에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았어요. 우리가 파악한 게 전부라면요.”
“…….”
차례차례 변절자들의 이야기가 나오자 검성의 기세가 날카로워졌다.
“도후의 세력은 십인회(十人會). 처음 그들을 파악하기로는 그저 도후의 추종자 모임 같았는데, 현재는 세가 좀 커지면서 말만 십인회일 뿐이에요. 결국 주축이 되는 것은 십 인일 터인데, 각각이 무림에서 꽤 이름 있는 인물로 이루어져 있을 거라는 추측은 하고 있지만, 정확하게 파악된 바는 없어요.”
“벽령과 십인회라…….”
검성은 권왕과 다르게 비밀 조직을 구성해 온 두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 더욱 힘들 것이라 여겼다.
“도후의 행방은 알고 있는 건가요?”
검성의 말에 홍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위치를 알진 못하지만, 알지도 모르는 자를 알고 있어요.”
“알지도 모르는 자?”
홍아의 알쏭달쏭한 말에 검성은 되물었다.
“얼마 전 대대적으로 무림맹과 구파일방, 여타 정파 문파들에서 오절의 첩자들을 축출한 일이 벌어졌어요. 대부분 그 세력의 배후를 알지 못하고 한 일이지만, 저희는 세 곳의 세력 모두 파악하고 있었죠.”
“최근 벌어진 내부 첩자 축출 건의 배후가 오절이었군요.”
뒤에서 듣고만 있던 은한이 말했다. 이 사건은 무림맹주가 공개적으로 선언하면서 더더욱 유명해진 일이었다.
“십인회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던 인물이 현재 무림맹에 잡혀 있어요.”
홍아의 말에 검성과 은한은 물론 소천개도 관심을 가졌다. 상처가 많은 홍아가 남 앞에서 이리 당당하다니, 소천개는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게 누구죠?”
은한은 홍아가 뜸을 들이자 물었다. 어린 홍아에게 존대를 하는 것은 조금 이상하게 보였지만, 이미 홍아가 개방에서 중요한 인물이라는 것을 인식했기에 검성도 그렇고 은한도 홍아의 존재 자체를 인정해 주고 있었다.
“주작단주(朱雀團主) 미홍. 홍예루의 주인인 ‘설란’이라는 신분도 가지고 있는 여인이죠. 사실 그녀는 십인회에 소속되어 있고, 십인회의 명에 따라 무림맹주를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었어요.”
“……그녀를 만나면 도후를 만날 방법을 알 수도 있다는 말이군.”
검성의 말에 홍아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 어린 그녀였지만 검성과 마주 보며 이야기하는 것은 꽤 힘든 일이었다.
이미 무림에 화미랑이라 불릴 정도로 미남이었기에 홍아도 최대한 검성과 눈을 안 마주치기 위해 노력하며 말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려면 쉽지 않을 거예요.”
“이유는?”
“무림맹주 우금이 그녀를 특별 취급하여 가두어 놓고 있어 만나기조차 쉽지 않을 거예요.”
개방에서도 미홍이 무림맹에 잡힌 것을 파악하고 그녀에게서 정보를 얻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무림맹주가 워낙 견고하게 그녀를 지키고 있어 접근조차 못 하고 있었다.
홍아의 말에 검성은 은한을 바라보았다. 비천이라면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는 눈빛이었다.
은한도 고민에 빠져 있었다. 무림맹을 무작정 찾아가 그녀를 찾아 나설 수도 없었고, 괜히 잘못 일이 벌어진다면 큰 문제가 될 수도 있었다.
생각에 잠긴 은한이 방법을 모색하던 와중.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홍아가 말을 이었다.
“무림맹을 찾아갈 거라면 좋은 방법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