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개방을 가다(2)
따라오는 자들을 따돌린 검성과 은한은 개방과 약속한 천진 외곽의 폐가로 향했다.
약속 장소에 가까워지자 젊은 거지가 그들을 마중 나왔고 은한과 이야기를 나누더니 앞장서 안내하기 시작했다.
“만나기로 한 곳이 여기인 건가?”
검성이 사방을 둘러보자 주위엔 폐가밖에 보이지 않았다.
폐가촌 구석구석엔 거지들이 검성과 은한이 지나가는 것을 살피고 있었고, 신기한 눈빛과 경계의 눈빛이 섞여 있었다.
“약속한 자들을 데려왔습니다.”
안내하던 젊은 거지는 제법 큰 폐가 앞에 서 있던 거지들에게 말했다. 그들은 검성과 은한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입을 열었다.
“방주님이 기다리고 있으니 들어가 보시게.”
막아섰던 거지의 허락이 떨어지자 젊은 거지는 검성과 은한을 폐가 안으로 안내했다.
“안에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제 안내는 여기까지입니다.”
“감사했습니다.”
젊은 거지의 말에 은한이 깍듯이 예를 표했다. 그들이 물러나자 은한은 앞장서 폐가 안으로 들어갔고 검성도 그녀를 따랐다.
폐가 안으로 들어가자 벽들이 무너져 구멍 사이사이로 빛이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래서 안은 불이 켜져 있지 않음에도 제법 밝았다.
눈앞에 꽤 많은 인원수의 거지들이 검성과 은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장 상석이라고 할 수 있는 자리에는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들을 쳐다보고 있는 중년인이 있었다.
중년인이 손을 들어 수신호를 하자 폐가 안에 있던 인원들이 다 나갔고, 상석의 중년 거지와 그의 옆에 어린 거지 한 명만이 남았다. 그것을 확인하고는 은한이 한 발짝 앞으로 나가 예를 취했다.
“방주님,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은한의 말에 인사를 받은 개방의 방주 소천개는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어서 오게, 은한! 이거 처음에 들어올 때는 몰라볼 뻔했군. 왜 남장을 하는 것이지?”
소천개의 말에 은한은 멋쩍게 웃었다.
“저 사람과 같이 다니려고 하니 여장보다는 남장이 좋을 듯하여 이렇게 다니고 있습니다.”
은한의 말에 소천개는 검성을 힐끔 보았고, 다시 사람 좋은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거 화미랑(華美郞)이라 불리는 사내를 이렇게 보는군. 영광이야.”
소천개가 검성을 보며 말하자 은한은 검성을 잡아끌고는 앞으로 밀었다. 이에 검성도 예를 취했다.
“임진후라고 합니다. 개방의 방주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어색한 공대였으나, 소천개는 개의치 않고 검성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방주, 사람의 얼굴을 그렇게 보면 실례예요.”
“그러냐?”
소천개 옆의 어린 거지가 그를 지적했다. 일개 거지가 방주를 지적하는 일이 남들이 보기에는 놀라운 일이었지만 소천개는 웃으며 답했다.
“화미랑의 소문이 워낙 대단하여 궁금했는데, 직접 보니 정말 눈을 뗄 수가 없군. 안 그러냐? 홍아(鴻兒)!”
소천개는 검성과 홍아라고 부른 어린 거지를 번갈아 보며 말했고, 홍아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아름답긴 하네요. 거지답지 않게 아름다운 것을 좋아하는 방주님 취향에 딱 맞아 그렇게 좋아할 만도 하네요.”
홍아라는 거지 아이의 말에 은한은 살짝 미소를 보였고 소천개는 조금 뿔이 난 듯한 표정으로 홍아를 보았다.
“처음 보는 사람도 있는데 날 너무 무시하고 말을 막 하는 거 아니냐? 나름 개방의 방주이니, 대우는 해 줘야지.”
“손님들 앞에 두고 잡담은 그만하시고, 손님맞이나 하세요.”
홍아의 말에 소천개는 머리를 긁적이며 검성과 은한을 보았다.
은한은 홍아의 태도와 말에 그리 놀라지 않았지만 검성은 신기한 듯 둘을 보고 있었다. 개방의 방주가 어린 거지에게 당하는 모습이 꽤 신선했다.
“그나저나 비천에서 우리에게 궁금한 일이 무엇이지? 무엇을 물으려는 것이기에 검성의 제자와 동행을 한 것일까?”
소천개는 살짝 장난스럽던 표정이 사라진 채 은한을 보며 물었다. 그가 주위 사람을 물린 이유도 은한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동안 비천과 개방은 서로 많은 정보를 교류해 왔고, 개방의 방주만이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비천의 입장을 개방에서 십분 배려해 주었기에 그런 거래가 가능했다. 개방도 비천이 그동안 무림에 도움을 주었던 일을 알았기에 많은 배려를 하고 있었다.
소천개의 물음에 은한은 검성을 보다가 자신이 먼저 나서 입을 떼었다.
“몇 가지 정보를 개방에서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찾아왔습니다.”
“무슨 정보기에 직접 찾아온 것인가. 그동안처럼 서신으로 하지 않고.”
소천개는 자신이 방주가 되고 여러 차례 비천과 정보를 교환하거나 도움을 준 적이 있었기에 은한과도 친분이 있었다.
거래 대부분은 서신으로 했는데, 이렇게 찾아온 은한이 조금은 의아했다. 그것도 외부인이라고 할 수 있는 검성의 제자까지 데려왔으니 더욱 이상할 수밖에 없었다.
“정보를 얻고자 하는 사람이 임 소협이라 같이 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은한의 말에 소천개는 다시 한번 검성을 찬찬히 살폈다. 그의 눈빛은 아까와 같은 장난기 있던 표정과 눈빛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알고 싶은 게 무엇이지? 궁금하군. ‘비천’까지 동원되어 검성의 제자가 찾는 게 무엇일지 말이야.”
비천과 개방의 관계는 본디 남에게 함부로 알릴 게 아니었다. 세인이 알게 된다면 개방이 위험에 처할 수도 있는 일. 다만 그 검성의 후인이기에 특례로 허한 것이다.
그렇기에 방주는 눈앞의 임윤후라는 청년을 시험하기로 마음먹었다. 만약 그가 정말 검성의 의지를 이었다면 돕겠지만, 그 수준이 미치지 못한다면…….
생각을 마친 방주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이거 미려어화(美麗於花)[꽃보다 아름답다.]라는 소문이 사실이긴 하군. 나름 소문이 조금 부풀려진 것으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내가 여자였으면 쳐다보는 것도 힘들었겠어.”
소천개는 답을 듣기 위해 검성을 보았다가 다시 한번 감탄하며 이야기했다. 이미 검성에 대한 소문은 무림의 화제였고 그의 무공과 미려한 외모 덕에 스승인 검성의 재림이라고 칭하는 이들이 많았다.
오절인 검성도 워낙 미려한 외모와 압도적인 무위로 여성들의 관심을 받아 왔고, 남자들의 선망 대상이자 질투의 대상이었다.
“왜 왔는지 묻더니, 왜 질문이 그리로 가요. 손님들 모셔 놓고 정신 좀 차리세요.”
아니나 다를까 홍아가 소천개에게 핀잔을 주었다. 소천개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웃었다.
“왜 그러냐? 너도 화미랑이 온다 하여 궁금해해 놓고는…….”
“그건…….”
홍아의 얼굴이 소천개의 말에 붉어졌고 둘이 티격태격하는 모습에 은한도 미소를 보였다. 다소 딱딱할 수 있는 분위기가 둘로 인해 조금은 밝아지고 있었다.
“근데 저 아이, 여자아이였네요?”
은한은 처음 홍아를 보았을 때 남자아이인 줄 알았는데 조금 전 대화를 통해 여자임을 알았다. 검성은 처음부터 알았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무엇이 궁금해서 온 것인지?”
소천개는 나름 근엄한 표정을 보이며 물었다. 그 모습을 은한과 홍아가 재미있어했으나, 검성은 진지한 모습이었다.
“오절의 근황에 대한 정보를 얻고자 합니다.”
오절. 순간 소천개의 눈빛이 순간 굳었으나, 이내 쾌활하게 대답했다.
“오절? 오절의 근황이라…… 그거라면 비천에서 우리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지 않나?”
검성의 물음에 소천개는 은한을 보며 이야기했다. 설명을 바라는 눈빛이었다.
“권왕의 행보는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지만, 도후와 신투는 저희가 알지 못합니다. 이미 십 년 전에 흔적을 놓쳤습니다.”
“그들은 죽었다고 보는 게 맞지 않나?”
소천개는 살짝 은한과 검성을 번갈아 보며 이야기했다. 그의 행동에서 검성은 그가 자신을 떠보고 있음을 알았다.
“사부님께서 친우들을 만나고 싶어 하셔서 제가 찾고 있습니다. 사부님께선 이미 권왕과 만나셨고, 이어 신투와 도후를 찾고 있습니다.”
“아, 그래서 일월문을 찾았던 건가? 이미 검성께서 권왕을 만났던 거군?”
소천개는 검성이 일월문에서 권왕을 만났을 거라고 짐작했다. 개방도 권왕의 행적을 파악하고 있었기에 바로 알아들은 것이었다.
“이거…… 검성이 정말 살아 계신 건가?”
검성의 제자, 임윤후의 말이 사실이라면 검성이 살아 있다는 말이 되니 조금은 놀라고 있었다.
개방의 방주 역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자가 검성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개방도 오절이 사라진 이후 검성에 대한 정보가 거의 전혀 없었기에 당연히 죽은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검성의 제자인 이윤후가 나타나고 이어 자신의 눈앞에 임진후까지 나타나면서 검성의 생존을 의심하게 되었는데, 제자라고 생각한 임진후에게 직접 이야기를 듣고 나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떻게 생각해?”
소천개는 홍아를 바라보고는 물었다.
“검성이 살아 있으니 제자가 둘이나 나타났겠죠. 하지만 갑자기 오절을 찾는 것은 석연치 않아요. 오절이 갑자기 사라지고…… 그들이 사라진 후 어떤 짓을 해 오고 있는지는 방주도 아시잖아요.”
홍아의 말에 소천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소천개도 개방의 방주로서 오절에 관한 정보는 계속 듣고 있었고, 그들이 음지에서 해 온 일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검성이 그들을 찾는 게, 제자가 말하는 것처럼 친우를 찾는 것 같지는 않다는 소리지?”
“네. 아무리 그들이 음지에 숨어들어 있다고 해도 비천까지 동원해서 찾는 것은…… 아무리 봐도 과해요.”
홍아는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검성과 은한을 바라보며 말했고, 소천개도 눈빛이 바뀌며 그들을 보았다.
“그럼, 왜 찾고 있다고 생각해?”
“그건 이제 알아봐야죠.”
홍아의 답에 만족스러운 듯 소천개는 웃음을 보였고 그와 동시에 홍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홍아는 그런 소천개의 행동을 귀찮아하면서도 손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걸까요?”
은한은 소천개와 홍아가 이야기를 길게 하자 은한은 검성에게 다가가 물었다.
“홍아라는 저 아이에 대해 아는 것이 없나?”
검성은 처음 홍아를 보았을 때 그저 방주의 시종 정도로 여겼지만 계속 볼수록 그건 아니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대화를 차단하고 있어 들리지는 않았지만 지금도 소천개가 홍아에게 의견을 묻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개방만큼 큰 세력의 수장이 열 살이 채 안 되어 보이는 어린 여자아이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모습은 특이했다.
“사실 저도 저 아이는 처음 봐요. 마지막으로 소천개를 보았을 때가 삼 년 전인데, 그때는 저 아이가 없었어요.”
은한도 계속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홍아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저 아이가 이번 거래에 큰 변수가 될 거 같은 예감이 드는걸…….”
검성은 홍아가 계속 신경 쓰였고, 은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소천개의 태도만 봐도 홍아에게 많은 것을 의지하고 있음이 보였다.
“우리가 저 아이의 정보가 없이 이곳에 온 게 큰 실수일지도 모르겠어.”
검성은 자신을 관찰하는 듯한 홍아의 눈빛이 절대 어린아이의 그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이제껏 살아오며 무림에서 많은 사람을 만나 왔던 그의 직감이 홍아의 존재를 더는 어린아이로 보기 힘들다고 말하고 있었다.
“흐음.”
소천개의 헛기침이 네 사람 사이의 적막을 깼다. 모두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천이 그러하듯, 우리 개방에서도 신투와 도후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진 못하네.”
소천개의 말에 검성과 은한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비천에서도 알겠지만, 검성과 약선을 제외하면 오절이 무림의 이면에서 다른 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고 있을 거야.”
“…….”
“그래서 난 검성이 그들을 찾는 이유가 단순히 친우를 찾기 위한 말이라는 임 소협의 말을 믿지 않아. 분명히 그런 단순한 이유가 아닌……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어떠한가?”
갑자기 소천개가 핵심을 짚고 들어오자 은한은 놀란 표정을 보였다가 이내 표정을 감추었다.
쉽게 흘러가지 않을 거라던 검성의 짐작이 맞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