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화― 거짓과 거짓이 교차하다
검성은 연무대로 다가오는 일월문주 양원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는 검성이 전날에 비를 뚫고 일월문에 몰래 잠입했을 때, 문도 중 가장 강하게 느껴졌던 자였다. 마치 권왕이라고 착각할 만큼.
“문, 문주님, 정말 괜찮으시겠습니까?”
“괜찮다. 이미 감오가 쓰러진 이상 여기서 물러난다면 일월문은 더 우스운 꼴이 될 것이다.”
이 총관은 문주인 양원이 나서려 하자 걱정이 되어 말리려 했지만, 양원의 뜻이 확고해 보여 말릴 수가 없었다. 그의 말처럼 단 일장에 일월문 소문주가 패한 일은 이제 전 무림에 퍼질 터, 일월문에게는 굉장한 타격으로 돌아올 게 분명했다. 피해의 최소화를 위해서라도 양원이 나서서 검성의 제자를 이겨 줄 필요가 있었다.
양원이 비무대 위에 오르자 함성 소리가 점점 커졌다. 일월문도들 역시 양원의 실전을 본 적이 별로 없었기에 큰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다.
양원이 환우십강(寰宇十强)에 들지는 못했으나, 애초에 환우십강 자체가 마교와의 전쟁 때 정해진 고루한 서열이었다. 하여 무림인들은 새로운 무림십강(武林十强)을 두고 의견이 분분했다.
그중에서도 상위 서열에 드는 것이 바로 패왕 양원이었다. 오절 중 최강자일지 모른다는 권왕의 후계자인 데다 그 자신이 드러낸 무공 수위 역시 대단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산서성 일대의 사파를 모조리 몰아낸 것도 일월문주 양원의 활약이었다. 많은 저항이 있었으나 패왕 양원은 그 일대의 사파를 모조리 산서 밖으로 몰아내 정파인 사이에서 존경과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더 닮았군…….’
연무대 위에 올라온 양원은 검성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성의 얼굴은 그가 기억하는 누군가와 지나치게 닮아 있었다. 아니, 그냥 똑같아 보였다.
“설마 네가 신분을 바꿔서 이렇게 행동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탁헌.”
“무슨, 설, 설마!”
검성의 말에 양원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제야 자신이 생각해 오던 것이 착각이 아님을 확신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죽었을 터였는데……!
“설, 설마 나진하…… 아니, 그는 분명 죽었을 터다!”
양원의 입에서 검성의 본명이 나오자 검성은 고소(苦笑)를 금치 못했다.
“너야말로 이런 문파를 세우고 신분까지 감추며 왜 네가 문주노릇을 하고 있는 것이지? 탁헌.”
검성의 입에서 나온 말은 놀라운 이야기였다. 탁헌은 권왕의 본명이었고 양원을 보고 권왕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었다.
양원은 주위 반응을 살폈고 말이 새어 나가지 않고 있음을 안심하고는 입을 떼었다. 검성이 처음부터 기막으로 말소리가 새어 나가는 것을 차단하고 있었기에 사람들이 보기에는 두 사람이 작은 말소리로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하, 이 사람이 살아 있는 것도 놀라운데 나의 본모습까지 파악하다니 놀랍군. 신투도 날 보고 내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
검성의 말에 당황하던 양원 아니 권왕 탁헌은 크게 웃으며 검성을 바라보았다. 그는 검성의 말처럼 패왕 양원이 아닌 권왕 탁헌이었다.
“탁헌,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대체 어째서 네가 신분까지 감추며 같잖은 문주 노릇을 하고 있는 게냐.”
만약 세간에 알려진다면 무림의 판도가 진동할 이야기였다. .
과거, 정파의 수호자를 자처했던 권왕과 검성이 다시 나타나 한자리에 모이다니. 경천동지할 사건이었다.
권왕은 검성의 기막을 느끼곤 안심하며 입을 떼었다. 어째서 자신 앞에 나타났는지 몰라도, 눈앞의 사내는 자신의 숙적이었다.
당황도 잠시. 곧 그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지금껏 살면서 가장 믿기지 않는 순간이었으나, 오절의 일원인 만큼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함을 되찾을 만한 연륜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하, 내 친우가 살아 있는 것도 놀라운데…… 나의 본모습까지 파악하다니, 놀랍군. 신투도 내 정체를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말이야.”
양원. 아니, 권왕 탁헌은 살소를 피우며 검성을 바라보았다. 상황을 확실히는 파악하지 못하였어도, 자신의 친우였던 검성은 지금 대결을 청해 온 상황.
“어쩌다 그리되었는지 물었네.”
“무엇이 말인가. 난해하군, 진하. 자네야말로 어째서 이곳에 왔는가, 그 외양은 무엇이고?”
하나 권왕은 검성의 물음에 물음으로 답했다. 자신의 속내를 숨기고, 상대의 심중부터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검성은 그런 권왕의 모습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 자리에서만큼은 참아야 했다. 눈앞의 권왕은 그저 시작이었다. 정인의 혈채를 받아 내기 위한, 복수의 시발점일 뿐이다.
주위를 둘러본 검성은 기세를 서서히 갈무리했다.
“이전에 겨루었던 그곳에서 만나지. 자네도 나와 겨루고 싶지 않은가?”
그 말에 권왕은 가슴속에서 무언가 끓어오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는 검성의 뒤를 평생 쫓아온 것이나 다름없이 살았다. 같은 오절로서 이름을 같이하고 있었지만, 늘 비교를 당하고 검성의 뒤에 서야 했다.
거기에 자신이 좋아하던 여인마저 검성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든 것을 빼앗긴 듯한 기분을 평생에 걸쳐 느끼며 그를 질투했었다.
그를 이기기 위해 지금껏 수없이 단련하고 연마해 왔다. 비록 과거엔 비무에서 졌었으나……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나와 진짜 겨루겠다는 것인가?”
검성이 어째서 이제야 자신을 찾았는지 여러 상념이 들었으나, 분명한 건 그가 호의로 오진 않았다는 점이었다.
하나 이는 곧 기회였다. 과거의 치욕을 벗어던질 수 있는 기회.
“자네나 나나 이 세월 동안 이루어 놓은 것을 시험해 보아야 하지 않겠나. 그걸 확인해 볼 상대가 서로라면 적당할 것이라 생각하는데, 어떠한가? 자네의 뜻은.”
일생 동안의 성취를 논하는 검성의 말엔 많은 의미가 담겨 있었다. 역시, 그가 찾아온 것은 분명…….
하지만 자신은 신념대로 살아왔다. 빼앗기지 않기 위해 빼앗았고, 죽지 않기 위해 죽였다. 그것은 죄가 아니었다.
강자존(强者存)! 그것만이 무림에 통하는 단 하나의 정의였다. 이제 자신이 검성을 꺾는다면, 모두가 자신을 우러러보게 될 것이었다. 이는 일생에 거쳐 바라 마지않았던 기회였다.
그렇기에, 권왕은 검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 자리는 여기서 파해야겠군.”
자신들이 겨루길 기대하고 있는 사람들의 원망을 들어야 하긴 하겠지만, 검성과 여기서 싸우는 것은 무리였다.
“이 총관.”
권왕의 외침에 검성은 기막을 거두었고, 그 부름에 아래에 있던 이 총관이 연무대 위로 올라왔다.
“일단 오늘은 여기서 끝을 낼 것이니, 다들 해산시키도록 하게.”
“네? 끝을 낸다 하시면?”
“대결은 끝이 났다네. 검성의 제자와의 대결은 차후에 이루어질 것이야.”
권왕. 그들이 양원으로 알고 있는 그의 명에 이 총관은 이상하다고 여기긴 했지만, 명이 떨어진 이상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이 총관이 대결의 끝을 알리며 더 이상 비무가 없다 이야기하자 다들 어리둥절했으나, 그의 통제 아래 모두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월문도들은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고 외부 손님들도 투덜거리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 * *
현월자는 연무대 위를 한참 바라보다 떠났고, 풍천개는 꽤 재미있다는 듯 웃고는 귀빈석을 내려갔다.
검성은 그런 풍천개의 뒤를 눈으로 좇으며, 등을 돌려 일월문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딜 갑자기 급하게 가는 건가요? 왜 대결은 끝이 난 거고요?”
아래서 지켜보던 은한도 사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감을 알아챘다. 검성의 심계대로 양원과 마주치게 되었는데, 갑자기 물러난다니. 이 무슨 일이란 말인가.
말이 되지 않는 상황에 은한이 앞서 걸어가는 검성에게 따라붙으며 입을 열었으나, 검성은 차갑게 대답할 뿐이었다.
“잔말 말고 따라오기나 해. 이유는 나중에 설명해 줄 테니까.”
검성이 뒤에서 조잘대는 은한이 귀찮은지 한마디 하고는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고, 은한은 더는 묻지 못한 채 그의 뒤를 따랐다.
“도대체 무슨 일로 저렇게 바쁘게 움직이는 건지…….”
은한은 뒤따르면서도 검성의 속도에 맞춰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워낙 빠르게 움직이는 검성이었기에 그녀의 경공으로도 뒤따르기가 쉽지 않았다.
“어라?”
앞서 달려 나간 그를 겨우 따라붙은 은한이 확인한 건 검성이 한 거지 노인을 붙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거지는 바로 조금 전 귀빈석에 앉아 있던 개방의 산서성 분타주 풍천개였다.
“뭐, 왜 이러십니까? 왜 저를 이렇게…….”
검성에게 붙잡혀 꼼짝도 못 하고 있던 풍천개는 저항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기만 할 따름이었다.
나름 한 무공 한다는 풍천개가 반격은커녕 검성에게 설설 기고 있자니, 은한의 눈에는 무척 이상해 보였다.
“네놈, 모든 것을 알았구나?”
검성이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주자 풍천개는 그대로 속절없이 눌려지며 무릎까지 꿇게 되었다.
“제가, 무엇을 알았다는…… 헉……!”
풍천개는 검성을 올려다보다 그의 눈빛과 마주치는 순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푸르게 불타는 광망이 자신을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체를 어떻게 알았다는 거죠?”
은한은 이제야 검성이 왜 그리 빨리 뛰쳐나와 풍천개의 뒤를 쫓은 건지 이해할 수 있었다.
풍천개는 어떤 이유에선가 검성의 정체를 눈치챘고, 그래서 검성이 그를 쫓아온 것이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새파랗게 젊은 외모를 보유한 검성에게 노고수인 풍천개가 시종일관 존대하며 설설 길 이유가 없었다.
“독순술(讀脣術)을 익히고 있는 거겠지?”
검성의 말에 풍천개는 차마 대답하지 못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귀빈석에서 검성과 권왕이 하는 대화가 들리지 않자 두 사람의 입술을 보며 대화를 읽었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읽어 낸 풍천개는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검성의 제자인 줄 알았던 임진후는 검성 본인이었고, 권왕의 제자라고 알려진 패왕 양원은 다름 아닌 진짜 권왕이었다.
풍천개는 자신이 잘못 읽은 것이 아닌지 몇 번이고 두 사람의 대화를 파고들었으나 결과는 바뀌지 않았다.
“어, 어르신. 저를 어떻게 하실 건 아니시지요……?”
풍천개는 자신이 너무 큰 비밀을 알아 버렸기에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내가 널 어떻게 할 거 같으냐?”
“아니, 설마 오절의 검성께서 저를 해치기야 하겠습니까? 헤, 헤헤.”
풍천개는 어색한 웃음을 보이며 답했다.
“나도 널 해치고 싶지는 않다만, 네가 알고 있는 사실이 아직 알려지면 안 되는 이야기인지라, 널 살려 두기 힘들 듯하구나.”
차분하고 진중한 음성으로 떨어지는 검성의 음성에 풍천개는 물론이고 은한까지도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다 검성의 위명을 알기에 살수까진 펼쳐지지 않으리라 예상하고 있었으나, 실제로 들린 검성의 목소리가 너무나 차갑고 진중하여 그냥 허투루 하는 말 같지 않았다.
“절대 이…… 사실을 말하지…… 않겠습니다. 살, 살려만 주십시오…….”
풍천개는 울 듯한 표정으로 그대로 바닥에 머리를 조아리며 엎드려 빌고 있었다.
“정말로 죽이실 생각은 아니시죠? 아무리 그래도 개방의 인물을 죽이면 일이 커질 겁니다.”
은한도 검성의 말이 가볍게 들리지 않았기에 물었다.
“저자를 살려 두면 모든 게 알려질 터. 이제 시작인 마당에 일을 그르치느니 싹을 제거하는 쪽이 좋지 않겠느냐?”
“절대, 절대 발설하지 않겠습니다……. 살려 주십시오.”
검성의 말에 풍천개는 부들부들 떨며 말했다. 검성이 자신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이 점점 현실로 다가오고 있었기에 진정할 수가 없었다.
지켜보던 은한까지도 검성의 행동에 신경을 곤두세운 채 상황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