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화― 남궁세가를 가다
남궁세가(南宮世家).
무림에서 제일가는 검가(劍家)로서, 오대세가의 대표 명가였다. 특히 비월검공(飛月劍公) 남궁학이 무림맹 전대 맹주였을 때 가장 왕성한 무림제일가로서 위세를 떨쳤지만, 비월검공 이후 이렇다 할 인재가 없어 남궁세가의 위세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런 명문정파 남궁세가에 한 젊은 손님이 찾아들었다. 평소 고요했던 정문의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소란이었다.
“정말로 검성의 제자분이 맞습니까?”
“맞소. 몇 번을 말하오.”
“하지만…….”
입구에서 자신을 검성의 제자라고 말하고 있는 이는 빙궁을 떠났던 검성 본인, 임진후였다. 진짜 신분을 밝힐 수 없었기에 검성의 제자라 밝혀 남궁세가의 가주를 만나려고 했지만, 문지기들이 이를 막았다.
“검성의 제자라고 하는 분은 얼마 전에 서안으로 떠난 안명 선생이 만났었다고 했는데, 우리 앞에 있는 그대가 진짜라고 어떻게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분명 문지기들의 말은 맞았다. 검성의 제자가 왔다 하여, 신원도 확인하지 않고 명문정파인 남궁세가의 가주를 바로 만날 순 없는 법이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자신이 굽히고 들어갈 수는 없는 법.
‘어디 한번…….’
임진후가 갈무리해 두었던 기세를 피워 올리려는 순간, 남궁세가의 정문이 열리더니 사십 대 정도로 보이는 건장한 사내가 나타났다.
그는 나오자마자 문을 막아서고 있던 문지기들과 이야기를 나누고는 곧장 임진후에게로 다가왔다.
척―
“남궁세가의 남궁염(南宮染)이라고 합니다. 검성의 제자분이라고 하시던데 맞습니까?”
남궁염은 가볍게 예를 취하며 자신을 소개하고는 임진후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맞소. 검성의 제자인 임진후라고 하오. 남궁세가의 가주를 만나러 왔소.”
“가주님은 무작정 찾아온다고 만나실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왜 가주님을 만나러 오셨는지요. 검성의 제자가?”
남궁염은 마치 조사하는 듯한 투로 말을 건넸다.
“그건 남궁가주를 만나면 이야기할 것이니, 만나게 해 주시오.”
임진후의 답에 남궁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의 처지에서도 갑자기 찾아와 검성의 제자라 스스로 말하는 자를 믿고 가주에게 데려갈 수는 없었다.
“먼저 용건을 말하지 않으면 가주를 만날 수 없습니다.”
남궁염은 참고 있었지만 보는 눈이 너무 많았기에 마지막 경고를 하고 있었다. 검성의 제자라는 말 때문에 참고 또 참고 있는 것이었다.
‘더는 억지를 부려도 소용이 없겠군.’
임진후도 남궁세가만큼 큰 곳에서 말로만 검성의 제자라고 밝히고 가주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그럼, 가주에게 말 한마디만 전해 주시오.”
“무엇입니까?”
“비월검공에게 맡긴 검성의 물건을 찾으러 왔다고 말이오.”
그 말에 남궁염은 짐짓 놀라 청년을 다시 보았다. 청년의 입에서 비월검공의 이름이 나오자 더는 말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정말로 앞에 있는 청년이 검성의 제자가 맞고 비월검공에게 맡긴 물건을 찾으러 온 것이라면, 남궁세가가 검성에게 큰 실례를 범하게 되는 것인지라 남궁염의 처지에서도 곤란해지기 시작했다.
“……일단 조금 기다려 주시지요. 가주님에게 말을 전하겠습니다.”
잠시 생각을 마친 남궁염이 손짓으로 명하자, 뒤따라온 시종이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검성의 또 다른 제자께서 서안으로 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검성의 제자가 두 분인 겁니까?”
남궁염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비월검공의 이름이 나온 이상, 이미 그는 자신의 앞에 있는 청년이 진짜 검성의 제자임을 어느 정도 확신하게 되었기에 방금 전 의심하며 무례히 굴었던 자신의 행동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소. 서안으로 가고 있는 이윤후는 제 사제(師弟)가 되오.”
“그렇군요. 검성께서 사라지시고 워낙 행보가 없다 보니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가 없어 저희가 무례하게 대했습니다. 용서해 주시길 바랍니다.”
설명을 듣자 남궁염이 바로 사과의 뜻을 보였다. 그만큼 검성의 칭호에는 무게가 있었던 까닭이다.
“아니오. 남궁 대협은 맡은 바 소임을 다했을 뿐이오.”
임진후의 말에 남궁염은 심각했던 표정이 살짝 풀렸다. 자칫 정파 무림의 큰어른인 검성과 불화가 생길지 몰라 긴장했던 탓이다.
그때, 남궁염의 지시로 남궁세가 안으로 들어갔던 무사가 다시 나와 가주의 답을 전했다.
“가주님께서 임 소협을 모셔 오라고 하는군요. 안으로 들어가시죠.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남궁염의 말에 임진후는 미소를 지었고, 그를 막아서고 있던 무사들은 안색이 핏빛이 되었다. 자신들은 당연히 임진후가 검성의 제자를 사칭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막 대했는데, 가주의 답을 들으니 후환이 두려웠던 탓이었다.
하지만 검성과 남궁염은 그들에게 따로 이야기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이에 긴장에 절어 있던 문지기들도 자세가 풀렸다.
“후아…… 정말 검성의 제자일 줄이야…….”
“우리 정말 큰 실수를 했어…… 창룡대주(蒼龍隊主)가 그에게 깍듯이 대할 때 정말 아찔했네.”
임진후를 직접 대면한 남궁염은 남궁가의 대표 무력대인 창룡대의 대주였다. 그런 높은 위치의 가인이 진중히 모실 만큼, 검성의 제자 신분은 무게가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실수가 넘어간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 * *
남궁세가의 안으로 들어간 임진후는 남궁염의 안내를 받아 남궁가주의 거처인 창룡원(蒼龍院)까지 아무 제지 없이 들어갔다.
“저분이 검성의 제자…….”
“쉿!”
곳곳에서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남궁염의 안내를 받는 임진후를 살피고 있었다.
모두의 관심은 검성의 제자라는 점이었지만, 여인들은 임진후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 그대로 멈춘 채 넋을 잃기도 했다.
그 모습에 남궁염은 혀를 찼다. 이 청년의 미모는 인정하나, 무인을 자처하는 가인들이 미모 따위에 홀리는 모습이 영 마뜩잖았던 것이다.
‘쯧쯧, 최근 제자들의 수련을 신경 쓰지 않은 탓이로다.’
창룡원에 들어서자 그들을 기다리는 젊은 사내가 있었다.
남궁염은 그 사내에게 바로 예를 취했다. 분위기로 보아 그보다 더 높은 직급인 듯하였다.
“가주님의 명을 받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손님을 안내하겠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젊은 사내는 남궁세가의 가주의 심복인 창연(蒼鳶)이었다.
“이 아이를 따라가면 가주님을 만나 뵐 수 있을 겁니다. 오늘 무례는 잊어 주시길 바랍니다.”
남궁염은 다시 한번 입구에서 있었던 일을 사과했다. 임진후는 사실 신경 쓰지 않고 있었기에 거론하지도 않았다.
“안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친 남궁염이 자리를 뜨자, 창연은 임진후를 안내하며 앞서가기 시작했다.
“가주님에게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검성의 제자께서 오셨다는 이야기에 기다리고 계십니다.”
잠시 짧은 복도를 지나, 문 앞에 멈추어선 창연은 기척을 내었고 입을 열었다.
“검성의 제자분을 데려왔습니다.”
“안으로 모시도록 해라.”
안에서 목소리가 들리자 창연은 문을 열며 임진후를 안내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임진후가 들자, 창연은 들어오지 않은 채 밖에서 문을 닫았다.
방 안엔 중년 사내가 서 있었다. 겉으로 보기에 조금은 수수한 인상으로, 어디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범부(凡夫)처럼 보였으나, 실상 눈빛이 강렬하여 한 번 보면 잊을 수 없을 듯한 인상이었다.
“남궁세가의 가주인 남궁인이라고 하오.”
자연스레 섞여 있는 내력을 보니, 과연 대 남궁세가의 가주다운 무공을 갖췄음을 능히 알 수 있었다.
“임진후입니다. 사부님의 심부름으로 찾아왔습니다.”
임진후의 말에 남궁 가주는 그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판가름하기 위한 시선이었다.
“검성께서 젊었을 적 엄청난 미남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들었는데, 임 소협도 그에 못지않군요. 여인들의 관심을 꽤 받겠습니다.”
“남궁 가주님처럼 남자답게 생긴 것이 더 여인들에게 인기가 있을 겁니다.”
무인답지 않게, 미모를 칭찬하는 인사말에 남궁인은 정말 기분이 좋은 듯 표정이 한결 풀렸다.
‘그냥 예의상 한 말에 저렇게 좋아하다니 재미있는 녀석이군.’
남궁인이 겉보기에 인상이 조금 사나워 보이기도 해서 딱딱할 줄 알았는데, 막상 몇 마디 나누어 본 것은 아니지만 자기 생각과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검성의 제자분이 이렇게 갑자기 두 명이나 나타나다니, 정파 무림에는 큰 경사군요. 안 그래도 무림맹으로 가고 있는 저희 남궁가의 사람들이 또 다른 제자분과도 인연을 맺었다고 하여 의미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또 다른 제자가 찾아올 줄이야.”
남궁인은 임진후를 계속 이리저리 살피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런, 제가 손님 대접을 너무 박하게 대하고 있었군요. 이쪽으로 앉으시죠.”
남궁인과 임진후는 서로 마주 보며 자리에 앉았다. 남궁인은 앉아서도 검성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남자에게 이런 시선을 받아 본 적도 정말 오랜만이군. 그러고 보니 비월검공 그자도 이 녀석과 같았었지…….’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남궁인의 모습에서 임진후는 남궁세가의 전대 가주이자 무림맹의 전대 맹주였던 비월검공 남궁학을 떠올렸다.
남궁학도 처음 만날 때 자신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었고, 이후로도 졸졸 따라다니며 귀찮게 했었다.
“사부님이 검공께 맡겨 두었던 물건을 찾으러 왔습니다.”
너무 넋 놓고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에 결국 임진후가 먼저 이야기를 꺼내자, 그제야 남궁인도 정신 차리며 입을 열었다.
“그 물건에 대해서는 검성께 들은 것입니까?”
남궁인 역시 무림의 거대 세가 수장이었으나, 검성의 제자라는 신분이 워낙 특별하다 보니 쉬이 말을 놓지 못했다. 특히 남궁인은 어려서부터 검성의 전설을 아비에게 들었기에 더욱 예를 갖추려 했다.
“네. 사부님이 예전에 마지막으로 검공 어르신을 만나셨을 때, 검공에게 자신의 검을 맡겼다고 하더군요. 그것을 찾으러 왔습니다.”
“흐음…… 그전에, 검성께서는 아직 정정(亭亭)하십니까?”
남궁인은 검성 제자의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보고받기에 이윤후는 약관이 갓 지난 청년이라 들었다. 그가 검성에게 배웠다면 검성이 아직 살아 있다는 뜻. 더구나 이렇게 두 번째 제자가 찾아왔다는 건 단순 기연을 통해 무공을 전수한 게 아니라 검성이 직접 가르친 것이라 봐야 했다.
“정정하진 않으시나, 아직 건강하신 편이십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무림이 어수선한데 큰 어른이신 검성께서 아직 계시다니 나름 안심이 되는군요.”
남궁인은 검성의 생존을 확인한 것이 나름 큰 성과라고 생각했다. 청년의 말처럼 정파의 절대자였던 오절 중에 최강자라고 평가받던 검성이 제자를 키워 낼 만큼 정정하다면, 사파와의 일전을 겁내지 않아도 된다고 막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