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이면공작(裏面工作)
최근 무림은 한 가지 사건으로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운남성(雲南省) 보산(保山)에 알 수 없는 병이 창궐했는데, 병의 유형이 이전에 만독곡(萬毒谷)에서 일으킨 독병(毒病)과 유사했던 것이다.
이에 무림맹에서 점창파(點蒼派)에게 일의 조사를 맡겼었는데, 조사를 위해 파견된 무사들이 모두 사라지는 일까지 발생하였다.
이 사태에 분개한 점창파가 문제가 된 마을에 재차 무사들을 파견했을 땐 마을 사람 전체가 사라져 비어 있었다.
그저 곳곳에 거무튀튀한 핏물이 발견되고 검게 그을린 옷자락들이 발견될 뿐이었다.
사는 이가 쉰 명이 안 되는 작은 마을이었지만 이 일은 세간에 크게 알려졌고, 많은 인사가 만독곡이 다시 활동을 시작한 게 아닌지 걱정하기 시작했다.
만독곡은 이십여 년 전 운남성 일대를 피바다로 만든 악독한 행보를 보인 적이 있어 혹 과거의 비사(悲事) 재현되는 게 아닌지, 무림은 물론 황궁에서까지 이번 일에 큰 경계를 하고 있었다.
황궁에서도 사찰관을 직접 파견했지만, 흔적이라고는 핏물과 옷가지들밖에 없는지라 조사는 지지부진했고, 무림맹에서도 인원을 파견했지만 소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 괴기한 사건은 무림에 퍼지며 불안감을 흐르게 만들었다.
* * *
무림맹(武林盟) 맹주실.
“일이 너무 커진 것 아닌가요?”
미홍은 등을 보이며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맹주 우금에게 우려를 표했다. 그가 등을 보이긴 했지만, 그녀는 능히 맹주의 표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자기 뜻대로 되고 있다고 생각한 채 웃고 있겠지.’
미홍의 예상대로, 우금은 등을 보인 채 웃고 있었다.
“후후, 일이 커질수록 나에게는 좋은 일이 아닌가?”
돌아선 우금은 크게 웃기 시작했다.
‘미친놈…… 자기 자리 지키자고 한 마을을 팔아넘기고는 저렇게 죄책감마저 없다니…… 너무 괴물을 만들어 버린 것이 아닌가…….’
미홍은 웃고 있는 우금의 모습에 진저리쳤다. 오대세가에서 맹주를 축출하려 하자 사파의 독고진을 자극해 사마련을 무너뜨렸고, 그것도 모자라 만독곡과 거래해 한 마을을 그들의 실험장으로 팔아넘겼다.
이 모든 것을 정파의 수장이라는 무림맹주가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해 벌인 것이었다.
“그래도 일이 너무 커진 듯한데요. 황궁에서까지 이 일을 신경 쓰고 있잖아요.”
미홍도 이번 사태에 황궁이 적극적으로 개입하려는 기미가 보여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지만, 정확한 정보가 아직은 들어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워낙 예전에 만독곡이 운남성 일대에서 큰 혈겁을 벌인지라, 황궁에서도 이번 일을 심각하게 여기고 있다는 방증이었다.
“그건 좀 의외긴 한데…… 황궁에서 왜 이 일을 캐고 있는 것이지?”
“저도 황궁에서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하여 알아보고는 있어요.”
“외곽인 운남성의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일에 황궁이 이렇게 빨리 움직이는 건 정말 의외로군.”
확실히 황궁의 이번 행보가 너무나 빠르고 적극적이긴 하다. 더구나 무림의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사찰관까지 파견하다니, 이는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무래도 예전에 만독곡이 벌인 혈겁의 영향이 아니겠어요. 그때 무림인들만 희생된 것이 아니라 민간인들도 많이 죽었던 사건이라, 황궁에 아마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이 높은 자리에 있는 게 아닌가 싶네요.”
“흠…… 자세히 알아보도록 해. 왠지 꺼림칙한 기분이 가시지 않는군. 기분 좋은 일인데 괜히 찝찝하니까.”
“이제 어쩌실 거죠?”
“어떻게 할 거냐고?”
우금은 미홍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되물었다.
“만독곡의 일도 그렇고, 사왕련의 문제도 그렇고. 일단 오대세가나 구파일방 모두 더는 맹주님의 거취 문제를 꺼내기 힘들 듯한데, 벌일 일들을 해결하셔야죠.”
“아, 그 이야기였나?”
우금이 능글맞게 답하자 미홍은 화가 머리끝까지 났으나, 그래 봐야 자신이 손해기에 화를 속으로 삭였다.
“일은 이미 내 손을 떠났으니 알아서들 처리해야지. 내가 해결할 수도 없는 문제잖아.”
“그게 무슨…….”
미홍은 우금의 말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보였고 우금은 여전히 능글맞은 웃음을 짓고 있었다.
“만독곡이야 마을 하나에서 그칠 거잖아? 그렇게 약속했으니, 우리는 그저 그들의 행동을 조사하는 척만 하고 덮으면 된다. 문제는 사왕련인데, 거긴 이제 내가 제어할 수 없는 곳이니 향후 상황을 지켜봐야지.”
“사왕련의 행보가 심상치 않아요. 저들은 우리의 예상보다 빠르게 사파를 장악하고 있고, 이제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전 사마련처럼 사파 전체를 장악할 거예요. 그렇게 되면 그들의 칼끝은 정파를 향할 거라고요. 그냥 느긋하게 있을 일은 아닐 텐데요.”
미홍은 이미 사파에 대한 정보가 여러 곳에서 들어오고 있는지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고 있었다. 사마련이 사왕련으로 바뀌면서 이에 반발하던 크고 작은 문파들이 벌써 절반 이상 다시 사왕련의 휘하로 들어가 있었다. 예상보다 빠른 행보였다.
사왕련이 사파를 통합하고 난 뒤엔 정사대전이 벌어질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데 사파의 결집에 비해 현재 정파는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다.
무림맹은 현 무림맹주인 우금의 개인 세력으로 전락해 있었고, 우금과 구파일방 및 오대세가 간에 갈등으로 인해 결집력도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현 상황에서 사파가 싸움을 걸어온다면, 정파는 당해 내지 못하리란 것이 미홍의 판단이었다.
“설마 독고진이 그렇게 무모하게 나오겠나? 후계자로서 오래 있다가 지존의 자리에 앉았으니, 그 자리를 만끽하도록 조금은 두자고. 내가 나중에 그를 만나 보면 되니까.”
현실 감각 없는 소리나 하고 있는 맹주의 모습에 미홍은 어이가 없었다.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 있군……. 자신이 벌인 일이 얼마나 큰 일이 되어 정파 무림의 위기를 자초했는지 모르고 있어…….’
미홍은 우금이 사왕련에 대해 크게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놀랐다.
‘이자도 슬슬 이용 가치가 사라져 가는군.’
미홍은 우금에 대한 처분을 슬슬 고려해야 할 상황이라고 판단했고, 자신이 소속한 곳에 이를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나저나 저번에 데려온 아이, 참 좋더군.”
우금은 음흉한 웃음을 보이며 손을 들어 여자의 가슴을 만지는 듯한 모습을 보이며 말했다. 그 모습에 미홍은 속으로 우금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무림맹의 맹주라는 사람이 일은 벌여 놓고 고작 한다는 소리가 여자에 관한 것이니 더욱 그랬다.
“마음에 드셨다니 다행이군요. 제가 새로 온 아이 중에 가장 신경 써서 준비한 아이랍니다.”
“오늘도 한 명 골라서 보내도록 해. 그 아이처럼 풍만한 아이였음 좋겠군.”
우금은 낮부터 음심이 동하는지, 한껏 부푼 자신의 가랑이를 보이며 웃었다. 한심한 모습이었지만 미홍은 내색하지 않은 채 미소를 보였다.
“그럴게요. 더 시킬 일 없다면 전 돌아가 볼게요.”
미홍은 더는 우금과 있다가는 자신이 미쳐 버릴 거 같아 자리를 뜨려 했다.
“황궁에서 정보가 들어오면 바로 알려 주도록 해. 왠지 황궁 쪽은 신경 쓰이니까 말이야.”
“네. 알겠어요.”
미홍은 그 말을 끝으로 몸을 돌렸다. 그녀가 나가자 우금은 구부정하던 자세를 펴고 눈빛을 달리했다. 음심으로 탁했던 눈빛이 아닌, 불타듯 형형한 눈빛이었다.
“청룡(靑龍)아, 있으면 나오너라.”
목소리까지 달라진 우금의 말이 끝나자 그의 앞에 백의를 입은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의 얼굴 오른쪽 눈 아래 작은 용문(龍紋)이 있었다. 눈 아래 용문은 무림맹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청룡단의 인물들을 상징하는 문양이었다.
“오는 것을 눈치챈 자는 없겠지?”
“네. 물론입니다.”
우금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청룡을 바라보자, 사내가 재빨리 서찰 하나를 품에서 꺼내어 건네었다.
“무림맹 내에 ‘그들’의 사람을 파악한 것입니다.”
청룡의 말에 우금은 받아 든 서찰을 펴 보았다. 그의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서찰의 가장 위에는 주작단주 미홍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생각보다 많군. 그들이 나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은 진즉에 알았지만, 이리도 많은 수가 무림맹을 장악하고 있을 줄이야…….”
서찰에 적힌 이름들을 확인하던 우금은 생각보다 많이 적힌 이름과 자신의 사람이라고 여겼던 자들의 이름을 확인하고는 조금은 분노하고 있었다.
“주군, 아직은 그들을 쳐 내기에는 힘이 부족하지 않을지요. 그들의 움직임을 더 살피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흥분한 우금과 다르게 청룡은 차분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의 이야기에 우금은 조금 진정한 채 서찰을 구겼고 이내 불타올랐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쪽에 ‘그들’이 얼마나 침투했는지는 아직 파악하지 못했나?”
“충. 거기까지는 시간이 좀 더 걸릴 듯합니다. 워낙 방대한 건이기도 하고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에서 정보를 알아내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렇겠지. 그렇다고 마냥 시간을 끌 수도 없는 일이다. 내가 이렇게 망나니같이 행동하며 그들의 의심을 피해 가고 있지만, 이것으로 시간을 길게 벌 수는 없을 거야.”
“충.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협력을 얻어야 그들을 몰아낼 수 있다. 하지만 그곳에도 저들의 인물들이 있을 것이니 사람을 잘 골라야 한다.”
“충. 알고 있습니다. 모두 알아내는 것은 포기하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권력자들을 조사한 뒤, ‘그들’과 관련 없는 사람들로 골라 자리를 마련하겠습니다.”
“그래. 조금 더 힘써 주도록 해라.”
“충! 조심하십시오, 주군.”
청룡은 말을 마치고는 나타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기척도 없이 사라졌다. 우금은 한숨을 크게 쉬었다.
“감히 네놈들이 날 이용하고 있었단 말이지……. 내가 그냥 당할 것이라 생각했다면 큰 오산이다.”
우금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나직하게 읊조렸다. 그는 미홍과 그 뒤의 세력들이 자신을 무림맹주의 자리에 앉히고는 뭔가 다른 것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고, 비밀리에 청룡을 시켜 계속 조사해 오고 있었다.
워낙 비밀스러운 조직이라 확실한 실체를 잡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기연 얻은 것부터 시작하여 모든 일을 ‘그들’이 꾸몄다는 사실을 눈치채게 되었고, 지금 무림맹주가 된 자신의 모습조차 ‘그들’이 원했던 모습이란 것을 알고는 크게 분노했다.
지금까지 이룬 모든 것이 ‘그들’의 뜻대로였단 사실이 그에게는 큰 굴욕이 되었다. 그래서 비밀리에 그들의 뒤를 캐고 있었고, 자기 생각보다 그들의 영향력이 크다는 것도 알아내었다.
“미홍 년을 당장에라도 쳐 죽이고 싶지만…… 그들의 모든 것을 알아낼 때까지는 움직여서는 안 되느니……. 언젠가 반드시 죽지 않을 만큼 두들겨 준 다음 사창가에 내던져 주마.”
상상만 해도 즐거운지 미친 사람처럼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미홍이 이미 그를 제거할 마음을 먹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자신이 칼자루를 쥐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