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화― 검성재림(劍聖再臨)(4)
“이제 정말 어떻게 하실 건가요?”
약선의 물음에 검성은 그녀를 보았다.
“향후 예정을 말하는 것이오?”
“네. 정말 그들에게 복수할 생각인가요?”
약선은 검성이 걱정되었기에 어렵사리 말을 꺼내었다. 아무리 선인의 경지에 오른 검성이라고 하지만 상대는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다. 그것도 각각의 세력을 가진 절대자들이었다.
“당신이 소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잘 알지만…… 이미 오래전의 일이니…….”
약선은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닫아야 했다. 검성의 표정이 무섭게 변하며 기세 또한 달라졌기 때문이었다.
“애령, 당신이 어떤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잘 알고 있소. 하지만 그들을 용서하라고는 하지 마시오. 소려를 죽이고 나를 위하는 척 그 오랜 시간 같이 내 옆에서 웃던 자들을 용서하라는 것은 힘든 일이오.”
검성의 말에 약선은 더는 그를 만류하지 못했다. 그녀로서는 검성이 모든 것을 잊고 자신의 곁에 머물러 주었으면 했지만 그것은 이루지 못할 꿈과 같았다.
‘소려가 살아 돌아오지 않는 이상, 당신을 말릴 수는 없겠지요…….’
이미 자신은 그 앞에서 죄인이었다. 검성이 어떤 결정을 하든지 자신이 무어라 말할 자격은 없다 여겨졌다.
약선은 등을 돌린 검성의 모습에 서글퍼졌지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기기로 마음먹었다.
“윤후야, 이리 오너라.”
검성의 말에 천통자와 이야기 나누고 있던 이윤후가 곁으로 다가갔다.
“손을 다오.”
“네, 사부님.”
검성은 그의 손을 잡아 맥을 짚어 보았다.
“으음…… 생각보다 내공이 많이 쌓여 있구나.”
검성은 이윤후가 내공이 부족한 점이 마음에 걸렸었는데 자신의 예상보다 많은 내공이 쌓여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조금 놀라 물었다.
“아마 약선께서 주신 단약의 효능일 겁니다. 그리고 상월의 효과도요.”
이윤후는 자신이 들고 있던 상월을 들어 보였고, 그 모습에 검성은 미소를 보였다. 검성이 이윤후에게 장가철장으로 먼저 가도록 안배한 이유도 빙정으로 만들어진 상월이 내공 증진에 탁월한 효능이 있기 때문이었다.
“애령이 너에게 단약을 주었느냐? 어쩐지 많은 내공을 축적했다고 했더니…… 큰 도움을 얻었구나.”
“뭘요. 당신의 제자인데 제가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는걸요. 아주 천고의 영약은 아니지만 내가 준 단약을 다 복용하면 당신의 비뢰검결(飛雷劍訣)을 부담 없이 펼칠 정도는 될 거예요.”
검성이 자신의 공을 칭찬하자 기분 좋은지 약선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가득해졌다.
“그래도 아직은 내공이 부족하긴 하구나. 만상오행공(萬象五行功)은 어떠했느냐?”
“아, 안 그래도 말씀드리려 했는데 만상오행공의 상생법의 효과가 상당했습니다.”
검성이 깨어나면 가장 먼저 이야기하고 의견을 듣고 싶었던 것이 바로 만오행공의 상생법이었다.
“여행 도중에 유인경이라는 여인이 칼에 찔려 치료하는 과정에서 만상오행공의 상생법을 응용하여 사용했었는데, 몸에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몸에 변화가 있었다?”
“사실 상생법을 이용하면 몸의 활성화로 상처가 낫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해서 썼던 것이었는데, 효과가 상상 이상이었습니다. 몸이 빨리 나은 것은 물론 여인의 말에 의하면 온몸에 기운이 샘솟는 것 같은 느낌이라고 했습니다.”
“그래? 신기한 경우구나…… 혹시 그녀만 조금 특별한 경우가 아니었느냐?”
“아닙니다. 백아가 다쳐서 왔을 때 같은 방법으로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백아도 꽤 많이 달라진 거 같습니다.”
백아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윤후가 하자 뒤뚱거리며 그들의 곁으로 다가갔다.
꾸륵―
덩치 큰 백아가 두 사람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자 검성은 백아의 몸에 손을 가져갔고 여기저기 살피기 시작했다.
백아를 살피던 검성의 안색이 조금은 달라졌다.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약선과 천통자도 이윤후의 이야기에 흥미가 있었기에 그들의 대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정말이구나. 백아의 체내에도 너의 기운이 느껴지는구나.”
백아를 살피던 검성은 이윤후가 치료를 위해 불어넣었던 금기(金氣)를 느끼고는 이윤후의 말이 맞다는 것을 알았다. 백아는 수기를 바탕으로 한 기운이 가득했지만 이윤후가 치료하는 과정에서 금기를 불어넣었고 백아의 체내에는 수기와 금기가 조화롭게 어우러지고 있었다.
“원래는 치료법이라기보다는 공격을 위한 오행상생과 오행상극이었는데, 상생법에 그런 응용이 가능할 줄은 몰랐구나.”
검성은 자신이 만든 무공이 그런 효과가 있음에 놀랐고, 듣고 있던 약선과 천통자도 마찬가지로 놀라고 있었다. 이윤후의 말처럼 오행상생법으로 상대의 기운을 북돋아 주는 효과가 있다면 엄청난 일이었다.
“차력(借力)은 써 보았느냐?”
“아니요. 함부로 써선 안 된다 하였기에 감추었습니다.”
자칫 마공으로 보일 수도 있는 차력. 조준혁과의 싸움에서도 쓰지 않은 이유는 검성의 명예를 위해서였다.
“네 실력을 향상할 방법이 떠올랐는데 해 보겠느냐?”
“방법이 있습니까?”
검성의 말에 이윤후는 그를 보며 물었으나 검성은 등을 돌려 약선에게 향했다.
“애령, 무공을 수련할 만한 장소가 있겠소?”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으셨는데, 벌써 몸을 움직이려 하시니 걱정이 되요, 진하.”
“첩자가 이미 죽었으니 금방 새로운 자가 올 터인데, 쉬고 있을 시간이 없소.”
검성은 이미 치워 버린 죽은 사내의 시신이 있던 곳을 가리키며 말했고 그의 말에 약선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예전에 제가 무공을 배웠던 수련 동굴이 있는데 그곳으로 가는 게 어떤가요?”
“멀지 않은 곳이요?”
[저 아래 폭포가 있는 곳에 있어요.]
약선이 대답을 전음으로 해 오자 검성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아마도 천통자 때문일 거라 여겼다.
“그럼, 내일부터 그곳을 좀 이용해도 되겠소?”
“물론이죠. 제가 미리 준비해 둘게요. 저도 사용하지 않은 지 오래인 곳이라 확인도 해 봐야겠어요.”
“부탁하오.”
검성은 그동안 이윤후를 제자로 삼으며 해 주고 싶었으나 해 줄 수 없었던 것들을 이번에 제대로 알려 줄 생각에 얼굴에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윤후 역시 검성에게 무공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지라 이번 기회가 너무 소중했다. 조준혁과 겨루며 한계를 맞닥뜨렸던 기분을 다시는 느끼고 싶지 않았기에 검성의 가르침이 간절하기까지 했다.
“수련은 내일부터 할 테니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해라. 예전엔 너를 직접 가르칠 수 없어 조금은 여유 있게 해 주었지만 내일부터는 제대로 할 테니 말이다.”
“바라던 바입니다. 검성의 제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제대로 무공을 배우고 싶습니다.”
검성은 이윤후의 답이 대견한지 미소를 보였다.
“자네는 나와 이야기를 좀 더 나누도록 하지.”
검성은 한편에서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천통자에게 말했고 자신을 부르자 이내 정신을 차리고 검성의 말에 답했다.
“어차피 이야기 나누실 거면 제가 초상화부터 그릴 수 있도록 해 주시죠.”
검성은 천통자의 말에 조금은 놀랐으나, 이미 해 주겠다고 한 부탁인지라 고개를 끄덕였다.
하나 검성인 자신에게 하는 부탁이 초상화라니, 이 사내도 참 특이한 인물이었다. 필시 범인(凡人)은 아닐 터, 차후에 조사해 볼 필요가 있었다.
“좋다. 어디가 좋겠냐?”
“그림을 그리려면 준비가 좀 필요합니다. 필요한 것들도 좀 사 와야 하고요. 저녁에 하시죠. 산 아랫마을을 좀 들렸다 올 테니까요.”
“그렇게 하지. 윤후야 너도 같이 마을에 가서 술도 한 병 받아 오너라.”
검성은 천통자가 마을에 간다 하자 술 생각이 절로 났기에 이윤후를 시켰다.
“네. 그럼 같이 다녀오겠습니다. 다른 것은 필요 없으십니까?”
“그럼, 검도 한 자루 사 오너라. 좋은 검일 필요 없으니 너무 고르지 않아도 좋다.”
“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천통자는 얼른 마을에 내려가 검성을 그리기 위한 도구가 사 오고 싶은지 이윤후에게 보채었고 이야기가 끝나자 발걸음을 서두르기 시작했다.
꾸륵―
이윤후는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백아를 불렀고, 그 모습이 신기한지 천통자는 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북해설응은 사람을 따르지 않아 빙궁에서도 대대로 내려오는 설응 이외에는 길들이지 못한다고 들었는데 정말 특별해 보이는군요.”
“백아도 순수 야생의 설응은 아니니까 그렇겠지. 저 녀석의 아비가 되는 설응도 사람들을 잘 따랐었다.”
천통자의 말에 답하던 검성은 이전 생각이 나는지 잠시 눈을 감았다. 설응을 데리고 친우들과 함께 강호를 유람했던 그때가 그리웠으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과거 일이었다.
“그럼, 저희는 다녀오겠습니다.”
이내, 둘은 백아를 타고 하늘로 날아올랐고, 검성이 눈을 떴을 때는 모두 보이지 않았다.
* * *
모두가 사라지고 혼자 남은 검성은 다시 이전의 기억에 빠져들었다. 다시는 떠올리기 싫지만 수천 번은 확인했을 그 기억을.
처음 자신의 의식에 빠져들었을 때 검성은 어떻게 된 일인지 감을 잡지 못해 어리둥절했으나, 익숙한 집에서 들리던 울음소리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서 생생히 살아 있는 아버지를 보았을 때, 자신이 과거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태어나 우렁차게 우는 아이는 자신이었다. 그 이후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 처음 사냥을 아버지에게 배웠던 기억, 그리고 아버지가 식인 곰에 의해 죽는 순간까지.
보기 싫었던 기억까지 더듬어 가며 과거의 상황이 모두 지나가기 시작했고, 기억들이 익숙해져 갈 무렵 소려의 죽음에 관련된 일도 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기대와 불안감이 공존하기 시작했다.
‘소려…….’
보고 싶었지만 보기 싫기도 했던, 소려가 죽는 장면을 마주한 순간, 그는 분노와 원망의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의 죽음에 자신이 가장 믿었던 친우들이 연관되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 모든 것을 부정하고만 싶었다.
하지만 그 기억의 편린들이 반복되었을 때, 그는 애써 외면해 왔던 모든 것을 인정해야 했다.
소려를 죽인 것은 도후 유가영이었고 그녀와 함께 움직인 것은 권왕과 신투였다. 검성은 분노하여 그들을 당장에라도 찢어 죽이고 싶었지만, 분노를 풀 길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들의 소식은 분명 비보(悲報)였으니까.
그렇기에 검성은 더욱 좌절하며 의식 속에 갇혀 지내고 있었다. 천통자가 와서 그들이 살아 있음을 알려 주기 전까지.
“기다려라…… 초벽…… 탁헌…… 유가영…… 내가 곧 너희를 찾아가겠다.”
생각에 빠졌던 검성은 눈을 뜨며 나직하게 읊조렸고 그의 안광이 폭발하듯 번쩍였다.
스아아―
검성의 주위에서 맹렬하게 기운이 폭사되었으나, 이내 그는 자신의 몸에서 발산된 기운들을 갈무리하였다.
때가 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