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검성재림(劍聖再臨)(2)
“애령, 잘 지냈소?”
검성은 멀리 떨어진 채 자신에게 다가오지 못하는 약선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네었다. 검성은 이미 그녀가 왜 그리 자신에게 다가서지 못하는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이 먼저 다가섰다.
“모든 것을 아셨다면서요…… 저를 원망하지 않으시는 건가요……?”
약선은 다시 눈물을 보이며 검성을 향해 말했다. 검성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미소를 보이며 그녀에게 다가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애령, 당신은 죄가 없소. 나중에 모든 것을 알았을 뿐이니 말이요.”
“다 알고도 그대를 속였어요…… 소려의 죽음에 제 사부님도 관련되어 있고요…….”
약선은 이내 눈물을 다시 터뜨리며 울었다. 그런 약선을 검성은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신의도 어쩔 수 없이 가영의 계획에 이용당했을 뿐. 신의 또한 그 일로 마음고생이 심했을 거요. 나쁜 것은 그들이지, 당신과 신의가 아니라…….”
말을 하던 검성의 눈빛이 달라지긴 했으나 이내 다시 약선을 따뜻하게 바라봐 주었다.
도후 유가영은 검성의 정인을 질투하였고, 끝내 살인을 도모하였다.
유가영의 부탁을 들어주어 검성을 잠시 불러내었던 신의는 나중에 자신이 유가영에게 이용당해 임소려의 죽음에 한몫했음을 알고 괴로워하였다.
신의는 약선의 스승으로 검성과도 가까운 사이였고 임소려와도 친한 관계였다. 신의는 나중에 모든 것을 알았지만 오절로서 명성을 쌓고 있던 모두의 사이를 틀어 놓을 수도 있는 일을 결국엔 함구한 채 은거해 버렸다.
갑자기 은거한 신의와 주변 정황을 보며 검성은 무언가 이질감을 느꼈으나, 애써 그 모든 것들을 무시해 왔다.
그럴 리가 없다고, 말이 되지 않는다고. 이미 정인을 잃었기에 주위 누군가를 잃는 것이 더 두려워졌다. 그렇기에 외면했다.
하지만 결국, 죽음의 순간에서야 외면해 왔던 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정인을 죽인 자가 누구인지, 누가 도후와 결탁했는지 직시한 순간, 후회의 정서는 곧 분노로 변했고, 분노의 정서는 곧 허무로 변했다.
모두가 죽고 없을 거라는 생각에 복수를 꿈꾸지 않은 채 자신의 의식 속에서, 임소려와의 기억에서 머물며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천통자를 만나 그들이 살아 있음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영원히 그렇게 머물렀을 가능성이 컸다.
“모든 것을 알았다면…… 설마 복수를 하려는 것인가요?”
약선은 눈물을 훔쳐 내며 검성을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얼굴이 붉었다. 어릴 적엔 너무 부끄러워 얼굴을 마주하지도 못했던 검성이었는데…… 이렇게 자신은 늙었으나 검성의 예전의 그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었다.
자신도 사십 대의 외모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예 이십 대 가장 아름답던 모습으로 돌아간 검성의 앞에서는 나이 든 여인일 뿐이었다.
“그들을 가만히 둘 수는 없지 않겠소. 그들은 나를 기만하고 긴 세월을 나를 위하는 척 내 옆에서 머물렀으니…… 그 일을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구려.”
말을 하던 검성의 안광이 번쩍였고 그가 순간 뿜어내는 기세에 멀리 서 있던 천통자와 이윤후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들이라니…… 무슨 소리죠? 가영 언니가 벌인 일이 아닌가요?”
약선은 그저 유가영이 질투심에 벌인 일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신의를 통해서도 유가영의 이야기까지밖에 못 들었기에 물었다.
“그건 나중에…… 이야기하지.”
검성은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약선을 뒤로한 채 이윤후를 향해 갔다.
“상월을 찾았구나.”
검성은 이윤후가 가지고 있는 백색의 검을 바라보고는 말했다.
“네. 사부님이 말씀하신 대로 장가철장에 가서 찾았습니다.”
“너라면 검의 주인이 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선택한 아이이니 당연한 거겠지.”
검성은 미소를 보였다. 이윤후와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아 보이는 외모라 듣고 있던 이윤후나 천통자는 살짝 적응되지 않았다. 젊은 얼굴로 나이 든 노인의 말투를 쓰고 있는 검성이 조금은 불편했다.
“사부님이 깨어나셔서 다행입니다.”
“무림이라는 곳은 재미있더냐?”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많은 인물을 만나 보았지만 아직은 무림이라는 곳을 모르겠습니다.”
“검을 들고 싸워 보았느냐?”
검성은 이윤후를 무림에 살도록 한 게 조금은 걱정도 되었기에 물었다.
“진지하게 싸운 것은 아니지만 겨루어 본 적은 있습니다. 부족하다는 것을 많이 느꼈고, 사부님에게 많이 배우지 못한 것이 아쉬웠습니다.”
이윤후는 조준혁과의 싸움을 계속 아쉬워하고 있었기에 자신의 부족함을 아직도 되뇌고 있었다.
“너를 급하게 무림에 보낸 것이 두고두고 아쉬웠는데 이렇게 다시 만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구나…….”
검성은 말을 하며 한 발짝 다가서 이윤후를 품에 안았다.
자신이 사념체로만 존재해 이윤후를 만지지도, 직접 안아 주지도 못했던 그때 기억이 떠올랐다.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젊은 사내 둘이 안고 있는 모습이 조금은 어색하기도 했다.
“사부님에게 묻고 싶은 것도 많고 배우고 싶은 것도 많습니다.”
“그래. 나도 너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이 많단다.”
천통자는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제 간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자신이 쑥스러워져 물러나 약선에게 다가갔다.
약선의 눈은 검성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어릴 적에는 보는 것조차 잘 못하던 그녀였지만 이제는 아예 시선을 고정한 채 천통자가 다가오는 것은 신경도 안 쓰고 있었다.
“흠, 너무 뚫어지라 보시는 거 아닙니까?”
“보고 싶은 것은 보고 살아야지. 어릴 적에는 부끄러워 보지 못했는데 그때는 왜 그랬나 후회스럽다.”
“갑자기 너무 확 바뀌신 거 아닙니까? 아까는 울고 계시더니 이젠 무슨 소녀라도 된 양 얼굴까지 붉히시고…….”
약선의 모습에 적응이 안 되는 듯 천통자가 말했으나 그가 말하는 동안에도 약선은 그를 보지도 않고 검성에게만 시선이 고정되어 있었다.
“하긴…… 검성이 송옥과 반안보다 잘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직접 보니 잘생기긴 했네요. 제가 고생한 보상으로 검성의 초상화나 그려서 가야겠습니다.”
천통자는 생각해 보니 검성의 초상화만 그려서 팔아도 꽤 돈이 될 거 같다는 생각을 했다. 약선이 저렇게 빠져 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확신했다.
“나도 한 장 그려서 다오.”
“네?”
“나도 한 장 달라는 얘기 못 들었느냐? 널 화산파에서 빼 온 보상은 해야지?”
약선의 말에 천통자는 황당한 표정을 보였다. 자신이 알던 약선과 전혀 달라진 모습에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아니, 제가 검성 데려오지 않았습니까? 그걸로 보상은 상쇄해 주셔야죠.”
“검성의 초상화가 널 갑부로 만들어 줄 텐데 어디 보상을 운운하나.”
“그거야…… 아마도 그럴 거 같기는 한데…….”
천통자는 웃으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약선마저 눈을 못 떼고 있는 검성이니 초상화로 그려서 판다면 꽤 돈이 될 거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약선을 소녀처럼 만들다니, 과연 검성이었다. 검성의 존재로 인해 무림이 어떻게 변해갈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이미 사마련이 무너지면서 정사파 간의 평화는 깨어졌다.
사왕련의 련주인 독고진은 흑월도존의 대제자였으나, 그의 유지를 잇지는 않는 인물. 사마련이란 이름을 지워 버린 건 분명 무림일통에 대한 의지의 천명일 것이다.
여기에 배후에서 무림을 움직이고 있는 세력들도 전쟁을 준비하고 있을 터.
과연 무림은 검성의 출현을 어찌 반응할지, 천통자는 궁금해졌다.
‘검성의 등장은 무림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 분명하다.’
천통자가 머리 복잡하게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검성이 약선과 천통자 곁으로 다가왔다.
“천통자라고 했나?”
검성이 자신을 향해 반말로 묻자 천통자는 왠지 모를 억울함이 가슴속에서 생겨났다.
‘한참 어린 얼굴로 반말을 들으니 기분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검성의 시선에 천통자는 얼른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십시오.”
“자네가 현 무림에 모르는 것이 없는 자라고 하던데, 맞는가?”
아마도 이윤후가 말했을 터였다. 하긴, 자신이 무림에서 가장 다식(多識)한 사람은 맞았다.
“네. 나름 무림에 대해 가장 빠른 소식통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지요. 왜 그러십니까?”
“나를 좀 도와주게나.”
“무엇을요?”
천통자는 검성의 뜬금없는 말에 궁금하여 물었다. 옆에 있던 약선도 검성이 왜 천통자에게 도와 달라고 하는지 궁금하여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어떤 것을 도와 달라고 하시는지?”
“내가 무림을 떠나 있었던 이후 무림의 모든 정보와 현재 상황을 알고 싶네.”
“그거라면…….”
검성의 말에 천통자는 약선의 눈치를 보았으나 약선은 고개를 끄덕여 그의 뜻대로 해 주라는 의사를 전했다.
그때.
빼액―
날카로운 백아의 울음소리가 산에 울려 퍼졌다. 평소와 다른 울음소리였다.
백아가 숲에서 솟구쳐 오르더니 이윤후와 모두가 모여 있는 곳으로 날아들었다.
쿵―
“커헉……!”
백아는 낮게 날며 자신이 낚아채고 있던 사내를 바닥에 떨구었고, 떨어뜨리는 동시에 하강하여 그를 발로 깔아뭉개며 도망을 가지 못하도록 잡았다.
그 모습에 천통자는 신기한 듯 눈을 떼지 못했다.
‘설응치고도 몸집이 꽤 큰데……?’
꾸륵―
백아가 무언가 이야기하듯 울자 이윤후는 백아의 아래 깔린 사내를 살폈다.
“저 설응이 뭐라고 하는 것인가? 자네에게 무언가 말하는 거 같은데?”
천통자는 이미 이윤후가 북해설응을 데리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기에 백아를 보고 놀라진 않았지만, 직접 바로 앞에서 보니 위압감이 상당하긴 했다. 하지만 그런 위협보다 궁금한 것이 먼저였다.
“이자가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고 하네요. 그것도 아주 꽤 멀리서요.”
이윤후의 말에 천통자와 약선은 백아의 발밑에 깔린 사내를 보았다. 두 사람 모두 사내의 정체를 짐작했지만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검성이 백아의 발아래 잡힌 사내를 향해 허리를 숙이고는 그의 머리를 잡아채어 들었다.
“누구의 지시를 받고 감시를 하는 것이냐?”
“크흑…… 난 그저 이 근처를 지나고 있었을 뿐이오…….”
이미 백아가 땅에 내팽개치면서 큰 내상을 입은 사내는 입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갑자기 저 큰 괴조가…… 나를 낚아채어…… 이곳에 끌려왔을 뿐입니다.”
사내는 억울한 듯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말하고 있었지만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이미 그의 정체를 짐작하고 있는 천통자와 약선은 물론 검성과 이윤후도 그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의 말보다는 백아의 말을 믿었기에 사내의 말이 거짓임을 예상하였다.
“말하기 싫다면 그냥 죽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다.”
차가운 검성의 말에 사내의 표정이 사색이 되었다. 자신보다 젊은 모습이었으나, 느껴지는 위압감이 보통 고수가 아닌 데다가 그의 말에서 진심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백아야, 이자를 데려다가 마음대로 가지고 놀도록 해라. 절벽에 떨어뜨려도 좋고 근처 곰이나 호랑이가 있다면 던져 주어도 좋다.”
검성의 말에 사내는 물론 약선도 조금은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검성은 늘 차분하고 예의 바른 언행으로 누군가의 원한을 사거나 남을 겁주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약선은 지금 보이는 검성의 모습이 이전 모습과 달라 이질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