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홍예루(紅霓樓)(2)
미홍이 장가철장에서 보낸 상자를 열어 보지 않은 이유는 상자 안의 물건이 평범한 도이기 때문이다.
상자는 명분이었을 뿐. 장주인 장윤호는 아무 도나 담아 이윤후 일행에게 주었고, 이를 빌미로 홍예루주를 겸하고 있는 미홍에게 보낸 것이다.
장윤호는 미홍이 속해 있는 단체의 사람으로, 미홍보다도 높은 위치에 있었다. 미홍에게 부탁하여 이들에게 무림맹주의 실체를 모두 알려 주라고 말해 둔 상황이었다.
‘장(張) 장주님도 정이 너무 많으시군…….’
미홍은 제 할아버지를 닮은 유인경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예전에 장윤호가 흑월도존 유상휘에게 구명지은(求命之恩)을 입은 일이 있었기에 유인경을 위해 자신들의 기밀까지 사용해 가며 도와주려 하는 것이었다.
물론 미홍 역시 유상휘의 손녀가 우금에게 이용당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았기에 장윤호의 생각대로 그녀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잠깐의 침묵 사이에 음식이 줄줄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각지의 산해진미가 큰 접시에 담겨 탁자 위에 내려놓아졌다.
처음 보는 음식들도 있어 이윤후는 관심 있게 보았고, 유인경도 배가 고파 음식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루주님, 아이가 준비되었는데 어떻게 할까요? 직접 데려가실 겁니까?”
중년의 후덕한 인상의 여인이 들어와 미홍에게 다가와 말했다.
“우 총관을 통해 보내도록 해요. 제가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이니까. 절대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말고, 말대답도 하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중년 여인이 나가자 미홍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두 사람의 시선을 느꼈다.
“아, 죄송합니다. 드세요.”
미홍의 말과 함께 이윤후와 유인경은 눈길이 가던 음식을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때늦은 식사였기에 둘 다 말도 없이 많은 음식을 하나씩 돌아가며 맛보기 시작했다.
미홍은 두 사람 다 조용히 식사에 집중하자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초면인 자신의 호의를 믿고 음식을 먹다니, 너무 경계심이 없었다.
장윤호의 소개라는 접점이 있기는 했지만, 두 사람이 자신을 믿을 근거로는 빈약했다. 자신이 혹시나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면 저 두 사람은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의 신분을 생각한다면 모든 일에 경계를 함이 마땅했다.
미숙함. 잠재력은 누구보다 깊으나, 아직 경험이 없는 두 사람의 행동이 나름 미홍에게는 귀엽게 보였다.
미홍은 귀여운 것에 약했다. 평소 냉정한 성정인 그녀였으나, 자신에겐 없는 순수함을 가진 아이들을 볼 때면 가슴 어디선가 호의가 차오르곤 했다.
그렇게, 마음을 놓은 미홍은 이윤후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 냉기가 일부 섞여 있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음식은 드실 만한가요?”
“네. 정말 맛이 있네요. 많은 음식을 먹어 본 것은 아니지만 제가 먹어 본 음식 중에 가장 맛있는 거 같습니다.”
자신의 물음에 극찬을 하는 이윤후를 보고는 미홍을 미소를 지었다.
“많이 드세요. 술은 드실 줄 아십니까?”
미홍은 자신의 앞에 놓인 홍예루의 자랑이라고 할 수 있는 취접주에 손을 가져가며 물었다.
“아니요. 전 아직 한 번도 술은 마셔 본 적이 없습니다.”
“그래요? 인경 소저는요?”
“저는 마셔 본 적이 있지만 입에 맞지는 않더라고요.”
사실상 두 사람 다 거부를 한 셈이라 가져간 손이 부끄러워진 미홍은 자신이 직접 술을 따라서 한 잔을 들이켰다.
“아쉽네요. 홍예루의 취접주는 방문자들도 잘 못 먹는 술인데, 두 분은 기회가 있는데도 드시질 않겠다고 하니…….”
미홍의 말처럼 홍예루에 사람들이 북적거려 대는 이유는 아름다운 기녀들과 맛있는 음식 등 이유가 있었지만, 취접주를 맛보려고 오는 미주가들의 방문도 적지 않았다. 워낙 적게 확보되는 물량 탓에 홍예루에 오더라도 귀빈들이 아니면 맛보지 못했다.
“향이 좋군요.”
미홍이 취접주를 한 잔 마시고는 다시 잔에 따르자 향기가 방 안에 가득 찼다. 이윤후도 처음에는 신경 쓰지 않았지만 향기만으로 술에 취할 것만 같았다.
“취접주라고 부르는 이유가 이 향기 때문이죠. 백매화(白梅花)로 술은 빚는데 나비가 이 향기에 날아와 향기에 취한다 하여 취접주라고 합니다.”
“그렇군요. 마시지 않아도 좋은 술이라는 것을 알겠네요.”
“두 분 다 식사를 못 하셨나 보네요.”
미홍은 두 사람이 식사에 전념하는 모습을 보고는 물었다.
“숙소로 잡은 객잔에 자리가 없었습니다.”
“객잔을 잡으셨나요? 어디에?”
“백주객잔이라는 곳에 묵기로 했습니다.”
“아, 거긴 음식 맛이 유명하여 식사 때마다 자리가 없는 곳이죠. 저도 가끔 갑니다.”
미홍은 자신과 이윤후의 대화를 힐끔거리며 눈치만 보고 있는 유인경의 모습을 지켜봤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오절 간의 복잡한 사랑 이야기가 생각이 났다. 도후와 약선의 애정을 받아 주지 않았던 검성과 같이, 이윤후는 유인경에게 감정이 있어 보이지 않았다.
‘힘든 사랑을 하려는구나. 아무리 원해도 가지지 못할 사람일 텐데…….’
미홍은 한편으로 유인경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안쓰러워했다. 사파 지존의 손녀와 정파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인 검성의 제자가 이루어지기엔 너무 험난했다.
“그런데 묻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물어보시지요.”
이윤후는 어느 정도 배를 채운 후 미홍을 바라보며 물었다.
“장가철장의 장주님과는 어떠한 관계이십니까?”
미홍은 이윤후의 질문에 조금 놀란 듯하다가 이내 흥미롭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제가 그에게 물건을 주문했고, 그는 저것을 만들어 주었죠.”
미홍의 말에 이윤후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내려져 있는 나무 상자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이윤후의 행동에 미홍이 당황했다.
“무슨 물건인지는 몰라도, 주문한 물건을 이렇게 바닥에 두는 것으로 보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물건이지요?”
“어, 어차피 상자에 들어 있으니 바닥에 두었다고 해도 별 상관이 없지 않나요?”
“아니지요. 그것보다는 상자의 물건이 루주께 그다지 관심이 없는 물건이니까 이렇게 열어 보지도 않고 중요치 않게 대하시는 것이겠지요.”
이윤후는 상자에 손을 가져갔고 상자를 열어 보았다. 상자가 열리자 그 안에는 한 자루의 묵색(墨色) 도(刀)가 들어 있었다.
“루주께서 장가철장에 시킨 것이 이 묵색의 도입니까?”
이윤후가 미홍을 바라보며 물었고 그녀는 이윤후의 행동이 흥미로운 듯 그를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왜 내가 그 물건에 관심이 없다 판단한 거죠?”
미홍은 어차피 이윤후가 모든 것을 눈치채고 묻는 것을 알았기에 더는 잡아떼 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장가철장에서 장주님이 이 심부름을 시킬 때부터 다른 의도를 가지고 시킨 것을 알았으니까요.”
“호오.”
미홍은 자신도 모르게 이윤후의 말에 놀라 소리를 질렀고 이윤후는 말을 이어 나갔다.
“장가철장의 장주님은 유 소저…… 아니 인경을 특별하게 여기는 듯하더군요. 장주님은 저희가 무림맹에 갈 거라는 말을 들으시고는 갑자기 이 물건을 홍예루로 전해 달라고 하셨지요.”
“그게 왜 이상하다고 하는 거죠? 애초에 저희에게 전해 줄 물건이 있어 서안으로 가는 당신들에게 물건을 맡긴 게 아닐까요?”
미홍은 모른 척하며 그의 반응을 살폈다. 이윤후도 이미 루주가 자신을 떠보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장주님은 우리가 무림맹으로 가지 않기를 바라는 듯했습니다. 그러면서 이 물건을 홍예루로 가져가 달라고 하셨죠. 근데 루주님은 이 상자 안의 물건을 궁금해하지도 열어 보지도 않았죠.”
“…….”
“장주님께선 루주님을 만나게 하려 한 것 같습니다. 물론 장주님의 의도에 저희를 나쁘게 할 의도는 없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기에 제 짐작을 말씀드리는 겁니다.”
이윤후는 애초에 장가철장의 장윤호가 유인경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음을 대화로 통해 알고 있었고, 홍예루로 보낸 일도 그 일의 연장선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미홍이 상자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에게 대접한다면서 좋은 음식과 술을 가져온 것을 보고 더욱 확신했다.
보통은 철장에서 물건을 주문했다면 어떤 물건이 만들어졌는지 궁금해하는 것이 정상인데, 미홍은 전혀 그런 것이 없었기에 이윤후는 확신할 수가 있었다.
“이 소협께서는 사람을 살피는 데에 재주가 있군요. 짐작대로 사실 소협이 가져온 저 물건은 의미가 있지 않아요. 그저 장 장주님이 그대들을 이곳으로 보내기 위한 구실이었으니까요.”
“왜 장 장주님은 우릴 이곳으로 보내신 것이죠?”
듣고만 있던 유인경이 묻자 미홍은 그녀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그 부분도 짐작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요?”
미홍은 유인경과 이윤후를 차례로 보며 반응을 살폈다.
“무림맹주가 사람들에게 알려진 것과 다른 인물이라서 인가요?”
“그것뿐만이라면 장 장주님이 흑월도존 손녀의 발걸음을 막지 않았겠죠.”
“당신, 알고 있었군요?”
미홍이 자신의 정체를 말하자 유인경은 놀라 물었다.
“그대들의 짐작대로 장 장주님이 그대들을 일부러 이곳에 보낸 것이라면, 제가 두 분의 정체도 알고 있는 것이 당연한 일 아닌가요? 검성의 제자인 이윤후 소협.”
미홍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이며 자신을 바라보자 이윤후는 살짝 긴장한 표정이 되었다.
장윤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미홍 역시 자신들에게 해가 될 행동은 안 할 터였으나, 루주가 보통 여인이 아니란 것을 점차 느끼고 있었다.
“이미 맹주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을 보니 빙궁에서 들었나 보군요?”
미홍의 말에 두 사람을 다시 한번 놀라 그녀를 보았다.
“저는 친구가 많답니다.”
“그렇군요. 장 장주님은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유 소저가 무림맹에 가지 않기를 바랐었군요.”
“아마도 예전 흑월도존께 구명지은 받은 일을 잊지 않으셨던 탓이겠지요. 그래서 유 소저가 위험해지지 않도록, 제게 보내셨을 겁니다.”
이윤후는 미홍의 말에서 장윤호가 왜 유인경을 그리 챙겼는지 알 수가 있었다. 자신이 만든 적풍도까지 내주고 무림맹에 가지 않도록 안배를 한 것만 봐도 사연이 있을 거라 판단했건만, 그런 비사가 있었던 것이다.
“뭐, 저로서는 어떻게 두 사람을 무림맹으로 가지 못하게 막을까 했는데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하니 편하군요.”
미홍도 장윤호의 부탁을 받고 조금은 난감했으나 이렇게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 이제 말하기도 편했다.
‘뭐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이것으로 장윤호의 부탁도 들어준 셈이 되었으니 그에게 좋은 물건을 얻어 낼 수도 있겠군. 이제 대모님의 명대로 검성의 제자만…….’
미홍은 어찌 되었든 간에 기분이 좋았다. 이것으로 장윤호에게 빚을 만들어 두었으니 차후에 얻을 게 많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