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비사(秘事)(2)
“뇌정궁의 이야기가 궁주께서 도와 달라고 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이윤후의 물음에 단지경은 살짝 미소를 보였다. 역시, 이 청년은 이해가 빨랐다.
“네. 그렇습니다.”
“무엇을 도와 드리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또 다른 거래였다. 설응 문제를 봐주고 영약까지 챙겨 주며 자신에게 빚을 지워 둔 궁주의 진의. 그렇기에 이윤후는 궁주에 대한 신의를 최대한 지키기로 마음먹었다.
“이 소협께서도 이미 짐작하시겠지만 제 이복동생인 단경호라는 녀석이 있습니다. 녀석은 미숙한 척하지만 뒤에서는 사람들을 섭외하며 제자리를 노리고 있지요.”
단지경의 말에 이윤후는 조금 전 연무장 기둥에서 자신을 바라보던 사내를 기억해 내었다. 조준혁이 그리 경계하던 이유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검성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으면 합니다.”
“검성의 이름이라니요? 어떻게 말입니까?”
단지경의 너무 뜬구름 잡는 소리에 이윤후는 어리둥절하며 물었다.
“힘으로 반대 세력을 제거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만…… 뇌정궁 이야기처럼, 형제간의 불화로 인해 문제가 생기게 둘 순 없습니다.”
단지경의 눈빛이 조금 달라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제가 원하는 것은 억제력입니다. 저들을 설득하며 행동을 하지 못하게 억제하려면 힘이 필요하죠.”
“사부님의 이름이 필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네. 그렇죠.”
이윤후는 이제야 단지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거 같았다. 무력이 아닌 명성으로써 우위를 점하려는 것이었다.
“검성과 그 제자인 이 소협이 저와 친분이 있고 저를 도와주고 있다고 정도만 모두 앞에서 공표한다면 저들은 섣부르게 행동하지 못할 겁니다.”
단지경의 말에 이윤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지경이 말하는 억제력이 무엇을 말하는지 알았고, 그가 얼마나 빙궁을 걱정하는지도 알 거 같았다. 힘으로 반대 세력을 제압하기보다는 설득하며 포용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약선께서도 이 일에 협력해 주고 계시지요. 처음엔 아버지의 부탁이었지만…….”
단지경의 아버지인 전 궁주는 단지경이 후에 궁주로서 위엄을 보이기 힘들까 봐 약선에게 부탁해 단지경을 도와주길 부탁했었고, 약선은 친우였던 그의 부탁을 거절하지 않았다.
자주 빙궁에 들르며 단지경과 친분을 과시했고 그것은 빙궁 내에서 단지경을 반대하던 인물들에겐 위협적으로 보였다.
단지경에게는 시간이 필요했다. 궁주가 되면서 빙궁의 핵심인 대주들은 모두 포섭할 수 있었지만 장로들이 자신을 믿지 않고 있었다. 거기에 설응의 통제권마저 잃어버린 탓에 더욱 그를 압박하려 들고 있었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을 억제하기 위해 검성과 이윤후의 이름을 이용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저는 상관이 없습니다. 사부님도 빙궁에게 도움이 되는 일에 마다하시지 않을 것이고요.”
이윤후는 단지경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기에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어차피 백아가 설응의 우두머리가 된 일로 어느 정도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름을 빌려주는 것만으로 도움이 된다니 다행이라 여겼다.
“이름을 빌려드리는 것만으로 되겠습니까?”
“더 좋은 방법이 있는데 그걸로 도와주시겠습니까?”
단지경은 이윤후의 말에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저희 딸을 데려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데려가라고 하심은……?”
이윤후는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오자 살짝 당황하며 물었다.
“혼인을 약속해 준다면 아예 우리 사람이 되는 것이니 확실한 사이가 되어 더욱 좋지요.”
“그건…… 저보다 단 소저도 싫어할 텐데요.”
“아직 어려 남자 볼 줄을 몰라서 그렇지요. 이 소협 정도면 신랑감으로 괜찮은데 말이죠.”
단지경의 말에 이윤후는 멋쩍은 웃음을 보였다. 단지경으로서도 반은 농담으로 하는 이야기였지만 반은 진심이었다.
이윤후를 사위로 삼을 수만 있다면 자신을 따르지 않는 빙궁 내부의 인원도 반발 없이 설득할 수도 있었다.
검성의 제자에다 현재 설응의 우두머리인 백아의 주인이니, 현재 빙궁에서 이윤후의 입지는 생각보다 영향력이 있었다.
“그렇게 여겨 주시니 영광이지만, 전 아직 혼인의 뜻이 없습니다.”
“그 이야기는 천천히 하도록 하죠. 이 소협이 혹시 떠나기 전에 누군가 접근해 온다면 그 만남을 거절해 주십시오.”
단지경의 눈빛이 바뀌며 말했고 이윤후는 단지경이 말하는 누군가라는 것이 그의 이복동생인 단경호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궁주님이라면 위협이 되는 사람을 데리고 있지 않을 거 같습니다.”
이윤후가 의문을 표하자, 드물게도 궁주의 입에서 미소가 가셨다.
“이 소협처럼 말하는 자들이 제 주위에도 많이 있습니다만, 그 녀석을 쳐 낸다고 빙궁에서 저에 대한 불만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확실하게 그들을 모두 안고 가려면 그 녀석을 내쫓을 수가 없습니다.”
단지경의 말에 이윤후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어떻게 보면 논란이 될 불씨를 제거하고 가는 편이 좋다고 모두가 생각하겠지만 단지경은 자신의 적들마저 안고 가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힘든 길이었다. 이미 강경파 장로들은 설득할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은 듯하군요.”
“괜찮습니다. 단 궁주님에게 여러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시간 가는 줄 몰랐습니다.”
이윤후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단지경도 배웅하기 위해 일어섰다.
“소협이 떠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하겠군요.”
“괜찮습니다. 서안에서 볼일을 마치고 다시 유 소저를 여기로 데리고 올 텐데요.”
그동안 사왕련의 추격자들과 사람들의 시선이 과도히 쏠릴까 저어하여 백아를 타고 이동하지 않아 왔으나, 홍예루에 물건만 주고 바로 이동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여겼다.
게다가 백아는 자신의 생각보다도 훨씬 더 강한 존재였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설응의 왕인 백아가 나서 줄 터이고, 바로 하늘로 피할 수도 있었다.
이윤후는 사부인 검성이 걱정되어 최대한 빨리 모든 일을 빨리 마치고 싶었다.
“단 궁주님을 알게 된 것은 저에게 큰 행운인 듯합니다. 궁주님의 생각에 큰 깨달음을 얻고 갑니다.”
이윤후는 검성이 정사를 막론하고 많은 사람과 만나 보라는 말의 뜻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무림은 사패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만약 이윤후도 그저 명문세가의 정파로 자랐다면 단지경과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을 게 분명했다.
“과찬이시군요. 저야말로 검성의 제자와 친분을 쌓은 것에 큰 영광입니다.”
단지경의 겸손한 말에 이윤후는 미소를 지었다.
“정말 이제는 가 봐야겠습니다.”
“네. 얼른 가시죠. 저는 마무리할 일이 있어서 밖으로 나가지는 못하겠습니다.”
이윤후는 단지경을 향해 예를 취하고는 방을 나섰고 단지경은 이윤후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가 사라지자 조금은 아쉬운 듯 표정을 보였다.
* * *
이윤후가 방을 나서자,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조준혁이 다가왔다.
“유 소저는 연무장 쪽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하셨습니다. 채영 아가씨와 같이 연무장에 있으니 안내해 드리죠.”
“저를 기다려 주신 겁니까? 이렇게까지 않으셔도 되는데요.”
“이 소협이 빙궁을 떠날 때까지 제가 살펴 드려야죠. 무엇보다 신경 쓰이는 부분도 있고요.”
조준혁은 말을 하며 뒤를 살짝 보았고, 이윤후도 조준혁이 보는 방향에 누군가 숨어 있음을 기감으로 알았다.
“제가 빙궁의 다른 이와 접촉하는 것을 염려하시는 거였군요.”
불화의 씨앗. 단경호가 검성의 제자와 친해진다면 확실히 북해빙궁 장로회에서 궁주에 대한 불만이 터져 나올 터였다.
“기분 나빠 하지는 마십시오.”
“괜찮습니다. 단 궁주님에게 방금 이야기를 들은 터라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가 걱정하는 바를 알았기에 이윤후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도 조준혁은 행동이 조심스러웠다.
이윤후는 말없이 조준혁의 뒤를 따랐다. 이윤후와 조준혁을 살피던 인물도 그 뒤를 따라오고 있었지만, 두 사람 다 모른 척하고 있었다.
외부 연무장이 보이자 이윤후는 빨리 걷기 시작했다.
빼액―
연무장에 나서자 반가운 소리가 들리며 이윤후를 반겼다. 백아가 어느새 와서는 두 여인과 이윤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꾸륵―
백아는 이윤후를 발견하고는 뒤뚱거리며 다가왔고, 그런 백아를 이윤후는 대견하다는 듯 쓰다듬어 주었다.
“이 녀석, 어떻게 알고 이렇게 먼저 와 있는 거야?”
이윤후는 백아가 자신이 부르지도 않았는데 미리 와 있는 모습에 놀라 물었다.
꾸륵―
“저희가 연무장에 나왔을 때 이미 와 있더라고요.”
유인경이 이윤후의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 그녀들 역시 궁 안에 있기보다 바깥 공기를 마시러 외부 연무장으로 나온 것이었는데, 하늘을 날고 있던 백아가 그녀들을 발견하고 내려온 것이다.
“저희가 떠날 것을 알고 계속 기다리고 있었나 봐요.”
“그런가 보네요.”
이윤후는 백아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바로 서안으로 갈 건데 괜찮죠?”
“네. 그리고 이거 제가 챙겨 왔어요.”
유인경은 장가철장에서 부탁받았던 무기가 든 상자를 챙겨 왔다.
“조 대주님, 그간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단 소저도요.”
“다시 오시게 되면 조금 더 길게 있다 가십시오.”
이윤후를 떠나보내는 조준혁은 과연 이 소년이 얼마나 강해져서 돌아올지 기대가 되었다.
첫 만남에 검을 섞었을 때, 이윤후는 분명 자신과 싸우는 와중에 강해져 갔다. 내공과 힘으로 찍어 눌러 승세를 점하긴 했으나, 처음 보았을 자신의 검을 빠르게 습득해 나가며 검로(劍路)를 선점하는 모습을 보였다.
과연, 검으로 정점을 이룬 검성(劍聖)의 후인.
이제 소년에게 내공까지 주어졌으니, 앞으로 얼마나 성장해 줄지. 다시 만날 그날이 기대되었다.
“저분은 제가 신경 쓰지 않아도 되겠죠?”
이윤후가 여기까지 쫓아와 숨어서 지켜보고 있는 자를 가리키자, 그자가 놀라 금세 사라졌다.
“궁주께서 암암리에 손을 쓰고 계시니 저들의 문제도 곧 해결될 겁니다. 그래도 혹시나 저들이 이 소협에게 접근할지 모르니 앞으로도 단호하게 대해 주십시오.”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백아를 타고 가니 저들이 자신을 쫓아올 순 없으리라고, 이윤후는 생각했다.
“단 소저도 다음에 뵙겠습니다.”
“몸조심하세요. 이 소협도 그리고 언니도요.”
단채영이 유인경에게 안기자, 그녀도 다정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돼. 일 마치면 다시 이곳으로 돌아올 거니까.”
“네, 언니…….”
외동딸인 데다가 자기 또래가 없는 빙궁이었기에, 짧은 시간이었지만 단채영은 유인경에게 정이 깊게 들어 잠시 헤어지는 것인데도 아쉬워하고 있었다.
빼액―
곧 백아의 울음소리와 함께 이윤후와 유인경이 빙궁을 떠났고, 단채영은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아쉬워하며 사라질 때까지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