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비사(秘事)(1)
“모든 것을 자세히 말씀드리기는 어려우나 유 소저가 의지할 만한 자는 아닙니다. 서안으로 가 무림맹주에게 몸을 의탁하려는 생각은 거두시는 게 좋을 겁니다.”
단지경의 말에 유인경은 바로 답하지 못한 채 생각에 빠졌다. 워낙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은지라 머리가 복잡했다. 안 그래도 모든 것을 잃은 그녀는 이제 정말 갈 곳이 없어진 셈이었다.
“아까 드렸던 제안을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여기 머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겁니다.”
유인경은 이제 정말 그의 말을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
단지경과 유인경 사이의 상황을 몰랐던 이윤후는 궁금한 듯 귀를 기울였고, 그 모습을 본 단지경을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 소협이 오기 전에 유 소저와 이야기를 좀 나누면서 빙궁에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었습니다. 채영이와도 같이 지내면 서로 좋을 것도 같았고, 무엇보다 유 소저를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요.”
“아, 그러셨군요.”
이윤후는 사정 이야기를 듣고는 나쁘지 않은 제안이라고 생각을 했다. 빙궁이라면 유인경을 노리던 살수들의 움직임을 막아 줄 수 있을 테니 빙궁을 적으로 돌릴 생각이 아니라면 그녀를 건드리지 않을 게 분명했다.
“언니, 빙궁에 머무르도록 해요.”
단채영은 생각에 빠진 유인경의 곁으로 가 그녀의 팔을 잡고는 사정했다. 단채영 역시 유인경이 마음에 들었기에 그녀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짧은 인연이었지만 또래의 여인이 많이 없는 빙궁에서 정을 줄 곳이 없었던 그녀였기에 쉽게 유인경에 빠져 있었다.
유인경도 결심한 듯 고개를 들었고 모두를 한 번 바라보고는 단지경을 향해 입을 열었다.
“궁주님의 제안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 말에 모두 그녀가 어떤 선택을 했을지 궁금해하며 시선을 집중했다.
“제가 갈 곳을 정할 때까지 빙궁에 신세를 좀 지겠습니다.”
“네. 얼마든지 있으셔도 됩니다. 유 소저가 여기 머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흑월도존을 따르던 인물들이 아마 찾아올 겁니다.”
“잘 생각했어요. 언니!”
단채영은 정말 기쁜지 유인경에게 안겨 왔고, 몸집이 작은 그녀는 유인경에게 폭 감싸졌다. 유인경은 이내 단채영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그녀를 떼어 내고는 이윤후를 보았다가 단지경을 다시 보고 이야기했다.
“궁주님, 제가 이 소협과 함께 서안으로 부탁받은 물건이 있는데 그것만 가져다주고 다시 빙궁으로 돌아오겠습니다.”
“흠, 알겠습니다. 서안이 넓긴 하나 그자에게 걸리지 않도록 조심히 다녀오십시요.”
유인경은 너무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걱정했지만 단지경은 쉽게 승낙해 주었다.
“이 소협.”
“네. 궁주님.”
유인경과 이야기를 나누던 단지경이 갑자기 이윤후를 부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책들이 놓은 책상에서 무언가 꺼내어 그에게 내밀었다.
“이것은…….”
단지경이 내민 것은 다름 아닌 약선이 그에게 건네었던 목함이었다. 약선과 급하게 떠나느라 챙기지 못한 채 다녀왔는데, 단지경이 보관하고 있었다.
“약선께서 주신 귀한 물건인 듯한데 너무 보관을 소홀히 하신 거 아닙니까? 이 소협에게 가장 중요한 것일 듯한데요.”
목함은 단지경이 약선에게 소식을 전하며 특별히 부탁했던 영약으로, 이윤후의 내공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한 물건이었다.
“아, 제가 정신이 없어서 깜박하고 갔네요. 감사합니다.”
이윤후는 목함을 받아 만지작거렸고, 유인경과 단채영은 무엇인지 궁금하여 쳐다보고 있었다.
“약선께서 제 몸 상태를 아시고 건네주신 환(丸)입니다. 먹으면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될 거라고 하셨고요.”
유인경과 단채영이 말은 하지 않았지만 알려 달라는 듯이 너무 애처롭게 쳐다봤기에 설명해 주었다. 그들은 이윤후의 이야기를 듣고는 더욱 관심을 가졌다.
“한번 보고 싶어요!”
눈을 반짝이며 물어 오는 단채영을 단지경이 말리려 했으나, 이윤후는 상관치 않았기에 바로 목함을 열어 보였다.
딸깍―
목함이 열리자 약향이 방 안에 가득 퍼졌다.
“아버지, 이건 내가 복용했던 환과 비슷한 거 아닌가요?”
단채영은 목함 안의 환을 보고는 단지경을 향해 물었다.
“네가 먹던 것과는 조금 다르단다. 향도 조금은 틀리고 말이야.”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색깔도 조금은 틀린 거 같아요.”
단채영은 단지경의 말에 다시 목함 안의 환을 보고는 말했다. 그녀는 어렸을 적 병치레가 많아 약선이 빙궁에 올 때마다 그녀를 위해 몸에 좋은 것들을 챙겨 주었다.
그 덕에 나이에 비해 엄청난 내공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그것을 녹여 내기에는 단채영의 무공의 깊이가 깊지 않아 활용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약선께서 이번에 새로 만드신 환인 거 같군요. 역시 약선에게 이 소협의 상황을 말하길 잘했습니다.”
“안 그래도 약선께서도 단 궁주님께서 제 사정을 이야기하셨다고 하면서 목함을 주시더군요. 저를 이렇게 생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윤후는 진심으로 단지경에게 감사를 표했다. 아직 설응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했음에도 단지경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받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단지경은 전대 궁주인 아버지를 통해 검성과 빙궁의 인연이 특별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윤후가 이렇게 자신들에게 온 것도 인연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의도도 조금은 있었다.
‘여차하면 저 천방지축을 이 소협에게…….’
단지경은 이윤후와 단채영을 번갈아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아비가 갑자기 자신을 보자 단채영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무슨 이상한 생각을 하신 거죠?”
“내가 뭘?”
“아버지가 가끔 혼자 음흉한 생각하실 때 눈이 게슴츠레 떠지면서 입꼬리에 미소가 걸리시는데, 방금 그랬단 말이에요.”
“허허, 내가 언제 그렇게 했다고 그러느냐?”
괜히 찔린 단지경은 말을 더듬었고 그의 태도에 단채영은 더욱 수상한 눈으로 그를 보았다.
“그건 그렇고 오늘 떠나시려고 합니까?”
단지경은 금세 말을 돌리며 이윤후와 유인경에게 물었다.
“네. 그러려고 합니다. 유 소저와 의견을 나눈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해요. 어차피 오늘 떠나려고 했잖아요.”
이윤후는 유인경과 단채영이 매우 친해진 듯하여 혹시 바로 떠나는 것을 아쉬워할까 봐 그녀를 보았는데 유인경은 그의 뜻에 찬동해 주었다.
“홍예루에 물건 전하는 일은 마쳐야지요.”
단지경의 배려로 자신의 안위에 대한 걱정이 사라졌기에 마음이 한결 편한 상황이었고, 장윤호가 자신을 배려해 적풍도를 내주었기에 홍예루에 물건을 전하는 일은 마치고 싶었다.
“하루 정도 더 지내다 가시면 좋을 텐데 아쉽군요.”
말하는 단지경은 물론 단채영도 아쉬운 표정을 보였지만, 돌아온다는 약속을 받았기에 단채영도 더는 조르지 않았다.
“준혁.”
“네. 궁주님.”
조준혁은 옆에서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단지경이 자신을 부르자 답했다.
“난 이 소협과 나눌 이야기가 좀 있으니 채경이와 유 소저를 다른 곳으로 좀 안내해 주게.”
“네. 아가씨와 유 소저는 별궁으로 이동해 계시죠.”
그 말에 단채경이 조금은 투정 어린 표정으로 보았으나, 그녀도 자신의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 생각하여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조준혁의 뒤를 따라 방을 나섰다.
* * *
조준혁과 두 여인이 방에서 나가자 단지경과 이윤후만이 남게 되었다.
이윤후는 조금은 어색함에 단지경을 바라보았다.
“하실 말씀이 있습니까?”
“네. 괜찮다면 이 소협에게 조금은 협조를 구할까 싶어서요.”
“협조요? 제가 무엇을?”
단지경이 미소를 보이며 이야기를 꺼내자 이윤후는 의아한 듯 물었다.
“이 소협은 무림인들이 사패(四覇)라 부르는 곳에 대해 잘 아십니까?”
“사패라면 북해빙궁을 포함한 새외 네 곳의 세력을 말하는 것 아닙니까?”
무림에 대해 지식이 없었던 이윤후였지만 유인경을 통해 사패에 관해 들은 적이 있었다.
사패는 무림 이외에 강력한 새외 세력들을 말하는 것으로 북해빙궁(北海氷宮), 만독곡(萬毒谷), 불마사(佛魔寺), 뇌정궁(雷霆宮) 이 네 곳을 묶어서 사패라고 불렀다.
사패의 각 세력은 역사 중에 무림과 큰 싸움을 일으킨 적이 몇 번 있었기에, 무림은 그들을 두려워하여 사패라 부르며 경계하고 있었다. 사패의 세력들 역시 무림일통의 야욕을 드러내 왔으나 무림이 뭉쳐 반발하여 그 뜻을 이루지 못했었다.
하지만 늘 그들은 무림을 향해 칼끝을 겨누고 있었고 무림에서도 사패의 동태를 가장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사패가 어떤 곳인지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단지경은 이윤후의 말에 살짝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무림은 정파와 사파로 나누어져 있지만, 더 크게 보면 무림과 새외 세력 그리고 마교까지 여러 세력이 얽혀 있는 모양새입니다. 사마련이 존재할 때는 무림이 겉으로라도 평화로운 상태였지만, 사마련이 해체되고 사왕련이 생기면서 정파와 사파는 이제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상황에 놓였죠.”
단지경의 이야기가 무겁고 심각한 주제로 이어져 나가자 이윤후도 진지하게 듣기 시작했다. 이미 장윤호에게도 들었던 이야기였고 유인경과도 관련이 있는 이야기라 흥미가 있었다.
“사패와 무림의 관계는 조금 특이한 편입니다. 만독곡과 불마사는 무림과 아예 철천지원수처럼 지내고, 저희 빙궁과 뇌정궁은 무림과는 어느 정도 교류는 하나 그렇다고 협력하지는 않죠.”
“차이가 있습니까?”
“만독곡과 불마사는 무림에 혈사(血事)를 일으킨 적이 많습니다. 무림 입장에서 마교가 가장 큰 적일 수도 있겠지만 만독곡과 불마사도 마교만큼이나 위협적인 적이지요. 만독곡은 자신들의 독공을 시험하려고 한 마을을 몰살시킨 적도 있으니까요.”
“무림의 관계는 들을수록 신기하군요.”
이윤후는 무림에 대해 전혀 문외한이었기에 단지경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흥미로웠다.
“빙궁과 뇌정궁은 무림과의 관계보다는 서로 사이가 안 좋은 편입니다.”
“사패끼리도 다툼이 있습니까?
“뇌정궁이 생길 당시부터 빙궁과 양립(兩立)할 수 없는 존재였다고 할까요…… 그런 관계입니다.”
단지경이 뇌정궁의 이야기를 하며 얼굴빛이 조금은 안 좋아 보이자 이윤후는 사연이 있는 거 같아 더욱 궁금해했다.
“뇌정궁은 빙궁에서 파생된 문파입니다. 그 당시 빙궁에선 후계 싸움으로 시끄러웠는데 당대 궁주가 첩의 자식을 후계자로 삼았고, 원래 본처의 아들을 내쫓아 버렸습니다. 쫓아낸 것에서 그쳤다면 좋았겠지만 후계로 삼은 첩의 자식에게 위협이 될 거라 여겨 살수를 보냈지요.”
“잔인한 선택이군요. 자신의 자식을 죽이려 하다니요.”
이윤후는 들으면서도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사실 단지경의 이야기는 빙궁에서도 기밀에 가까운 이야기였다. 빙궁과 뇌정궁의 관계도 무림인들은 알지 못하는 비사였다.
“첩을 너무 사랑하여 벌인 잘못된 선택이었지요. 가까스로 살아남은 본처의 아들은 아버지에게 복수를 꿈꾸었고 외가 쪽의 도움을 받아 자신의 세력을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뇌정궁의 시초입니다.”
“만들어질 때 그랬다면 이제는 원한이 사그라질 때도 되지 않았나요?”
“빙궁에서야 뇌정궁에 딱히 원한을 가질 이유가 없지만 뇌정궁은 다르죠. 애초에 뇌정궁은 빙궁을 없애는 것이 가장 큰 사명이라 여기기에 뇌정궁에서 빙궁에 시비를 걸어올 때가 많습니다.”
단지경이 궁주가 된 이후에도 뇌정궁이 시비를 걸어온 적이 많았기에 껄끄러운 관계는 여전했다. 단지경은 모든 비사를 아는지라 최대한 뇌정궁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으나, 현 뇌정궁주는 강경한 자로 시도 때도 없이 시비를 걸어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