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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 돌아오다-36화 (36/251)

36화― 후회의 기억

화산(華山) 조양봉(朝陽峰).

이른 시간, 사람이 잘 찾지 않는 조양봉 깊은 산속에 위치한 약선(藥仙) 서문애령의 거처로 한 노인이 찾아왔다.

“정말입니까?”

백발의 건장한 노인이 앞에 앉은 약선을 향해 물었다. 노인은 다름 아닌 검성(劍聖) 나진하였다. 그는 믿기 힘들다는 표정으로 서문애령을 바라보았다.

“사실이에요. 당신의 현재 상태는 심각해요. 제가 손쓰기 어려울 정도로 몸이 망가져 있어 치료에 힘써야 해요.”

“당신이라도 고치기 힘든 겁니까?”

“네. 제가 손쓰려 해도 너무 망가져 버렸어요. 그러기에 제가 자주 찾아오라고 말했었잖아요.”

서문애령은 조금은 토라진 듯 나진하를 탓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이제 어디 갈 생각은 하지 말고 이곳에 머무르면서 몸을 추스르도록 해요.”

“당신도 고칠 수 없다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나진하의 말에 서문애령은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 모습에 나진하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이렇게 죽는다고 해도 후회하지 않으니 신경 써 주지 않아도 괜찮소. 이전에 죽었어야 할 목숨이었소…….”

나진하는 창밖으로 먼 곳을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서문애령은 그의 그런 모습에 눈살을 찌푸렸다.

‘또 소려(小麗)를 생각하는구나…….’

젊었을 적 약혼자였던 임소려가 사고로 죽은 후, 나진하는 계속 그녀만 생각하며 많은 여인의 구애를 거절해 왔었다.

가끔 나진하가 멍하니 생각에 빠질 때가 있었는데 그게 소려를 떠올리기 때문임을 서문애령은 알고 있었다.

이미 죽어 버린 연적(戀敵)을 이겨 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던 서문애령이었지만, 일편단심이었던 나진하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자신보다 나진하에게 더 적극적으로 구애했던 도후(刀后) 유가영(劉佳瑛)에게도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렇게 옆에 붙어 다녔지만, 결국 그녀도 나진하 곁을 떠났다.

자신을 어린 동생으로만 바라보는 나진하가 한편으로 원망스러우면서도, 이렇게라도 얼굴을 보고 가끔 만나는 걸로 만족하며 지냈던 서문애령이었지만 갑자기 욕심이 났다.

‘병을 핑계로 이 사람을 여기에 잡아 둔다면 나를 바라봐 주지 않을까?’

서문애령은 이 생각으로 큰 후회를 하게 되지만 그렇게라도 그를 붙잡아 옆에 두고 싶었다.

“약초를 조금 캐 올 테니 여기서 조금만 기다려 줘요.”

서문애령은 먼 곳을 응시하던 나진하를 눌러 앉히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그녀는 이미 나진하를 이곳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은 들떠 있었다. 비록 거짓이었지만 이렇게라도 그를 잡고 싶었다.

도후처럼 적극적이지도 못했고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보기만 했던 정인(情人)이었는데, 이번이 기회라 여겼다.

“금방 다녀올게요.”

서문애령은 입을 열려는 나진하의 말을 듣지 않고 약초를 캐러 나섰고, 그 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던 나진하는 그녀가 사라지자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애령…… 미안하오. 그대의 마음을 받아 주지도 않으면서 내가 죽는 모습까지 그대가 지키게 할 순 없소.”

나진하는 서문애령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는 낮게 읊조렸다. 그는 자신이 죽는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 약선의 말이라고 의심조차 하지 않았던 것이 그의 실수였다.

“소려…… 이제 당신을 만나러 갈 수가 있겠군요.”

그렇게 나진하는 그곳을 떠났다. 이후 돌아온 서문애령은 사라져 버린 나진하를 찾기 위해 그의 발자취를 좇았지만, 평생을 그리하게 되리라고는 그녀도 생각하지 못했다.

* * *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집 안에 검성을 눕히고 온 이윤후는 집 밖에서 생각에 빠져 있던 약선을 향해 물었다.

“그냥 이 집도 오랜만에 찾아왔더니 옛 생각이 나는구나. 그래도 하필이면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 났어…….”

약선은 이윤후를 향해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이윤후도 왠지 더 물으면 안 될 거 같다는 느낌에 더 묻지는 않았다.

“난 네 사부인 저 사람을 오래도록 사랑했었다.”

“…….”

“미리 이야기했다시피, 난 저 사람을 욕심내어서 잘못된 선택을 했었다. 내 그릇된 욕심에 하늘이 노했는지 허락지 않았지.”

“너무 자책하지 마십시오. 사부님이 깨어나시면 모든 것을 말씀하시고 용서를 구하시고요.”

이윤후의 말에 약선의 표정이 한결 풀렸다.

“나는 빙궁으로 다시 못 돌아갈 거 같구나. 돌아가면 지경이…… 아니, 단 궁주에게 이야기 좀 해다오.”

“네. 전 그럼 돌아가 보겠습니다. 일이 마치면 이곳으로 돌아오겠습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으마.”

빼액―

이윤후와 약선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산을 울리는 백아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 보겠습니다. 사부님을 잘 부탁드립니다.”

이윤후는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고 백아 등에 올라타 빙궁으로 향했고, 약선은 이윤후와 백아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는 집으로 향했다.

* * *

무림은 몇 가지 소식들로 떠들썩해졌다.

―오절(五絶)의 제자들이 나타났다.

―신장(神匠)의 무기들이 무림에 출현하였다.

이 두 가지 소식은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락내리락했고, 많은 이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한꺼번에 사라졌던 오절들의 제자들이 갑자기 동시에 나타나자 그 이유를 궁금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또한 그에 못지않게 많은 이의 관심이 집중된 소식은 신장의 무기가 나타났다는 사실이었다.

무기를 지니는 것만으로도 고수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는 신장의 무기 소식에 다들 탐을 내기 시작했고, 그중 하나를 금화상단(金華商團)에서 확보했다는 소식에 많은 무인이 상단 앞으로 모여들어 북새통을 이룰 지경이었다.

금화상단은 자신들이 큰 값을 치르고 구한 신장의 무기를 무림맹(武林盟) 비무 대회의 상품으로 써 달라고 기증을 했다.

그 소식이 전해지자 비무 대회의 관심이 날로 높아져 갔다.

* * *

무림맹 맹주의 집무실.

맹주인 우금은 집무실 의자에 앉아 자신의 앞에 놓인 길고 큰 상자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게 금화상단에서 넘긴 천무신창(天武神槍)인가 보군요?”

우금은 자신의 앞에 나타난 중년 여인을 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향했다. 주작단주 미홍이었다.

사람들이 많은 낮이라 그런지 그녀의 복장은 단정했지만, 타고난 몸매로 인해 풍만한 가슴과 엉덩이는 도드라져 보였다.

“한동안 왜 뜸했느냐?”

“아잉~”

우금은 그녀의 허리를 한 손으로 휘감으며 안아 올렸고, 미홍도 그의 손에 몸을 맡기며 안겨 갔다.

“저야 본회(本會)에서 시킨 일을 하느라 조금 바빴어요. 그래도 맹주가 시킨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답니다.”

“내가 시킨 일?”

우금이 궁금한 듯 묻자 미홍은 그의 팔을 뿌리치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이거 봐요. 일 시켜 놓고 자신이 기억 못 하는 거…….”

“무슨 일을 말하는 거야?”

우금이 정말 기억이 나지 않아 묻자, 그녀는 살짝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흑월도존의 손녀 행방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었잖아요.”

“아, 그 이야기였군. 그 아이가 누구와 동행 중이라고 말해 줬었지 않나?”

“네. 안 그래도 그의 정체를 입수해서 전달드리려고 온 거예요.”

“그래? 동행 중인 사내의 정체가 보통 인물은 아닌가 보군.”

그녀가 자신이 직접 부르지도 않았는데 굳이 찾아온 것으로 보아 보통 사람은 아니리라고, 우금은 짐작했다.

“역시, 눈치는 빠르시군요.”

“그래서 누구인가? 내가 놀랄 만한 사람인가 보지?”

“맹주님만 놀랄 게 아니라 누가 들어도 놀랄 사람이랍니다.”

우금이 감질난다는 듯 표정 짓자, 그녀는 더 끌지 않고 입을 열었다.

“검성의 제자랍니다.”

“응? 뭐라고?”

우금은 자신이 미홍의 말을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하며 되물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거짓이 아니랍니다. 개방에서 확인해 준 정보라 확실할 거예요.”

“그래? 믿을 수가 없군. 오절의 제자가 하나둘 나타나는 것도 재미있지만…… 정파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검성의 제자가 사파의 흑월도존의 손녀와 왜 동행하고 있는 거지?”

“안 그래도 저도 그게 궁금해서 추가로 사람을 풀어 두었어요. 개방에서도 거기까지는 모르고 있더라고요. 그리고 개방에서 추가적인 정보를 하나 더 주었는데 말이죠.”

미홍은 이어 말하지 않고 또다시 우금의 눈치를 보며 뜸을 들였다.

“그들의 행적이 장가철장에서 서안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서안?”

“네. 아마도 유 소저는 맹주를 찾아오려고 한 거 같아요. 사마련에서 죽다 살아서 도망 나왔고 자신이 의지할 사람이 없으니 맹주를 떠올린 게 아닐까 싶은데 말이죠.”

“그래. 그럴 수도 있겠군. 난 유상휘에게는 좋은 친우였고, 옆에서 보기에도 그랬으니까.”

미홍의 말에 우금은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유상휘는 주위에서 보기에 좋은 친우 사이였고, 그의 손녀인 유인경 또한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하하, 이거 찾아다닐 필요가 없었군. 알아서 오고 있다니 말이야.”

우금은 기분 좋은 듯 파안대소(破顔大笑)했다. 최근 들어서 가장 기분 좋은 상황이었다. 그런 우금을 바라보던 미홍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으나 우금은 눈치채지 못했다.

“검성의 제자와의 동행한다니 조금 신경 쓰이지만, 알아서 나에게 오고 있다면 별 신경 쓸 문제는 아니겠군.”

“그런데 현재 그들이 서안으로 오지 않고 다른 곳으로 간 거 같아요.”

“그게 무슨 말이지? 다른 곳이라니.”

기분 좋게 미소 짓던 우금은 표정이 굳어지며 미홍을 바라보았다.

“개방에서 말하기를 빙궁의 사람들이 검성의 제자를 찾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그들이 개방의 난주 분타에 찾아와 설응에 관한 정보를 물어 왔는데, 개방에서 그 정보를 주었다 해요. 빙궁 사람들은 난주에서 무한까지 설응으로 이동해 검성의 제자를 만나곤 같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뭐야? 검성의 제자가 설응도 가지고 있어? 거기에다 빙궁은 또 뭐야?”

유인경으로 인해 기분 좋던 우금의 표정이 조금은 차가워져 있었다.

“빙궁에서 검성의 제자를 왜 찾는 거지? 궁주가 바뀌고 우리 쪽에 협력도 안 해 주던 녀석들이 왜 무림에 나타난 거야?”

“아직 거기에 대한 정보는 없지만, 정황상 아마 설응에 관련된 일로 검성의 제자를 찾은 거 같습니다. 그래서 데리고 빙궁으로 데려간 거 같고요.”

“설응을 왜 검성의 제자가 가지고 있는 거지?”

우금은 미홍에게 물었다.

“정보를 찾아보니, 예전에 빙궁에서 약선에게 도움을 청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약선이 설응 한 쌍을 받았고, 그녀와 동행했던 검성이 그중 한 마리를 나눠 가진 듯하네요.”

“허허, 무슨 일을 도와주었기에 빙궁이 설응을 내준 거야?

북해설응은 전투에서나 이동에서 빙궁의 핵심이나 다름없는 중요한 패였다. 그런 영물을 내줬다는 사실이 우금으로서는 의아했다.

빙궁에서 설응에 대해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알았기에 우금의 의문은 더해졌다.

“기록에도 약선이 빙궁을 도와주었다는 것 외엔 자세히 적혀 있지 않았습니다. 이미 오래전 일이고 빙궁에서 벌어진 일이다 보니 당사자들 외엔 아는 사람이 없습니다.”

미홍도 거기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 찾아보았었지만, 정확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검성의 제자라…… 유인경과 동행 중이라면 서안으로 같이 오겠군. 그들의 동선을 제대로 파악해서 보고하도록 해.”

“네. 맹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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