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단경호
“내공 문제가 해결된다 해도, 경험을 쌓지 않으면 검성의 무공을 가지고 있다 한들 색이 바랄 것입니다.”
“네. 알고 있습니다. 저 역시 조 대협과 싸우면서 그것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단지경의 충고에 이윤후가 답했다. 이전까지의 싸움에서는 별다른 검초 없이 상월의 힘으로 상대를 제압할 수가 있었으나, 조준혁과의 대결은 단순 초식만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조준혁 같은 강자와 싸울 일이 많지는 않겠지만, 이윤후도 안정적으로 비뢰검결을 사용할 수 있어야 했다.
그들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사이 문이 열리고 단채영이 들어왔고, 그녀와 같이 방으로 들어온 시비는 모두에게 찻잔을 놓아 둔 후 차를 따라 주고는 다시 방을 나섰다.
“이야기는 많이 나누셨어요?”
단채영은 단지경의 옆에 붙어서 물었고 그녀의 그런 모습이 귀여운지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이 소협.”
“네. 말씀하십시오.”
“설응의 통제권을 넘겨주려면 아까도 이야기했지만 소협의 설응이 져 주어야 합니다. 설응에게 우두머리 싸움에 패함은 곧 죽음을 의미합니다. 그래도 괜찮습니까?”
“네? 그게 사실입니까?”
이윤후는 단지경의 말에 놀라 되물었다.
“설응의 싸움은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입니다. 우두머리를 정하는 싸움에서 패한 쪽은 보통 크게 상처 입고 구경을 하던 설응들에 의해 찢겨져 죽는 것이 보통입니다. 하지만 소협의 설응이 우두머리가 된 후 설왕이 죽지 않고 돌아온 것으로 보아 패한 설왕의 죽음을 막아 준 것은 소협의 설응일 겁니다. 하지만 설왕이 우두머리 싸움에서 이기면 소협의 설응처럼 상대를 살려 줄지…… 확답드릴 순 없습니다.”
단지경의 말에 이윤후는 물론 단채영까지 놀라고 있었다. 그녀 역시 설응의 우두머리 싸움에 그런 일이 일어나는지 몰랐었다.
“그래도 설응의 통제권을 넘겨주기 위해 소협의 설응에게 져 달라고 이야기하실 겁니까?”
단지경의 물음에 이윤후는 답하지 못했다. 빙궁에게 설응의 통제권을 당연히 넘겨야 한다 여겼기에 그것을 해 주려 했지만, 백아의 죽음이 걸린 문제라면 그럴 수가 없었다.
“백아의 목숨이 걸린 문제라면 불가능합니다.”
“그렇겠지요.”
“하지만 형님…… 아니, 궁주님.”
조준혁은 이야기를 듣다가 급했는지 말실수를 하며 끼어들었다.
“설응의 통제권을 다시 가져오지 못한다면 궁주님의 반대파들이 정말로 행동에 나설지도 모릅니다. 안 그래도 형님에 대한 불신으로 가득한 자들인데 이런 빌미를 제공한다면…….”
말을 하던 조준혁은 단지경이 손을 들어 말을 막자 더는 말하지 못했다.
“반대파의 일은 내가 처리할 것이다. 걱정하지 말도록 해라.”
단지경도 조준혁이 걱정하는 바를 알았기에 그와 단채영을 안심시켰다. 빙궁은 현재 두 개의 세력으로 갈라져 있는 상태였다.
궁주인 단지경과 그를 따르는 인물들과 단지경의 이복동생인 단경호를 지지하는 인물들로 나누어진 상황이었다.
단지경이 궁주에 오른 뒤 이전 강경했던 북해빙궁의 기조가 바뀌었고, 그것에 대한 불만을 가진 인물들이 북해빙궁의 권력에서 밀려난 단경호의 주위로 몰려 있었다.
반대파의 인물들은 단지경이 설응의 통제권을 잃은 것을 알고 그것을 빌미로 계속 궁주 흔들기를 하고 있었고, 빙궁의 많은 인물에게 단지경의 무능을 보여 주는 사건이라고 소문을 퍼뜨리고 있었다.
“제가 도울 일이 없겠습니까?”
이윤후로서도 단지경이 백아가 설응의 우두머리에서 물러나는 일을 대수롭지 않게 포기하자 더욱 그를 돕고 싶어졌다.
“음,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단지경은 이윤후의 말에 잠시 생각에 빠지더니 입을 열었고 이윤후와 단채영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제 여식과 혼인을 하는 것은 어떻습니까?”
“네?”
“아버지!”
단지경의 말에 놀란 이윤후와 단채영은 동시에 놀랐고 단채영은 소리를 빽 질렀다.
“이 소협이 우리의 식구가 된다면 설응의 통제권도 우리의 손에 있는 셈이니, 반대파의 인물들도 크게 소리를 내지 못할 거 같은데. 아닌가?”
단지경은 말을 하다가 조준혁을 보며 물었다.
“그렇죠. 둘을 혼인시키면 해결되는군요.”
조준혁은 단지경의 말이 맞는다고 여겨 그의 뜻에 찬성했지만 단채영이 째려보는 눈빛을 그대로 감당해야 했다.
“이 소협의 뜻은 어떻습니까? 제 여식이 마음에 안 들면 이 아이 말고 다른 빙궁의 여아들로 보여 드리지요.”
“아버지!”
단채영은 단지경의 말에 얼굴이 붉어진 채 소리를 질렀다. 혼인이라는 사실도 놀라웠지만 자신 말고 다른 아이 중에 골라도 된다는 그의 말에 더욱 화가 났다.
“제 딸이긴 하지만 성격이 너무 포악해 데리고 살기는 힘들 듯하니, 다른 여아들도 한번 만나 보실까요?”
단지경은 자신 딸의 반응이 재미있는지 그녀를 놀리려 한다는 것을 이윤후도 눈치챘다. 단채영은 단지경에게 골을 내고 있었고 그 모습에 그는 자신의 딸을 보듬은 채 달래 주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유인경은 예전 생각이 났는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소협은 설응의 문제로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어차피 소협이라면 설응으로 무리한 일은 하지 않을 듯하니, 어떻게 보면 더 안심할 수가 있네요.”
단지경의 말에 조준혁과 단채영은 조금은 아쉬운 듯했지만 더는 그를 말리지는 않았다. 이미 단지경의 생각이 확고했기에 설득하기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 검성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이윤후가 단지경의 물음에 선뜻 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매번 받는 질문이지만 대답하기가 참 힘든 질문이었다.
“제가 어리석은 질문을 했군요. 약선께서도 검성이 살아 있다고 확신하고 찾고 계셨는데, 이렇게 어린 제자분이 나타났으니 당연히 살아 계시겠죠.”
단지경은 웃으며 말했고 그의 말에 이윤후는 살짝 의문이 생겼다.
“약선께서 사부님이 살아 계실 거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아, 네. 빙궁에 오실 때마다 검성에 관한 소식을 들은 게 있느냐 물으셨지요. 죽었을지도 모를 검성을 왜 그리 찾느냐 물은 적이 있는데, 반드시 살아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이야기하시더군요. 꼭 찾아야 한다며…….”
단지경도 어릴 적부터 약선이 빙궁을 찾는 것을 보았고 그녀가 찾아올 때마다 묻는 것이 같았기에 궁금하여 물은 적이 있었다.
모두가 검성이 죽었을 거로 생각했지만 약선의 생각은 달랐고 반드시 소식이 들어오면 자신에게 알려 달라는 당부까지 했었다.
‘약선은 사부의 병을 진단한 사람이라고 들었는데…… 어째서 그분이 사부가 살아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있는 거지?’
이야기를 듣던 이윤후는 의문이 들었다. 사부가 동굴에서 죽음을 맞이한 이유가 약선이 고칠 수 없는 병이라고 해서였다. 그녀가 고칠 수 없는 병이라면 누구도 고칠 수가 없다고 생각해 검성은 그 길로 죽음을 준비했고, 바로 몸을 숨겨 동굴에서 영면을 맞이한 것이었다.
이윤후가 생각에 빠진 채 말이 없자 다들 이상하다 여겼지만, 생각에 빠진 그를 깨우지는 않았다.
단지경은 유인경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고, 그들의 대화는 꽤 오랜 시간 이어졌다.
* * *
빙궁의 외곽.
작은 방에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들고 있었다. 모인 이들은 설응 때문에 빙궁의 연무장에 모였던 몇 명의 인물들이었고 그중에는 장로인 검윤상도 있었다.
그들의 상석에는 삼십 대로 보이는 인물이 앉아 있었는데, 짙은 눈썹에 호방한 인상의 사내였다. 그는 빙궁의 궁주의 이복동생인 단경호(段敬浩)였다.
“형님이 힘을 보여 주셨다고요?”
단경호는 흥미롭다는 듯 앉은 모두를 보며 물었다.
“네. 소문과 다르게 고강한 무공을 지닌 듯했습니다.”
“아버지께서 괜히 적통자라고 형님을 후계자로 선정하신 게 아니겠지요. 형님이 소문대로 책만 읽는 샌님이었다면 아버지도 굳이 모두의 의견을 물리치고 궁주의 자리를 형님에게 물려주지 않았을 겁니다.”
단경호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이야기하자 다들 표정이 시시각각 바뀌었다. 사실 빙궁의 궁주가 단지경으로 결정 나면서 빙궁은 참으로 시끄러웠다.
원체 책만 읽기를 좋아하고 무공의 수련을 꺼렸던 단지경이 장자이고 적통자라는 이유만으로 후계자가 되자 반발이 극심했다.
그 당시 단경호를 궁주로 삼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으나 전대 궁주는 무시한 채 단지경에게 궁주의 자리를 물려주었다.
“형님께서 보통은 아니시군요. 힘을 숨긴 채 지금까지 있었다니…… 허수아비일 뿐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죠.”
단경호는 낮게 읊조렸고 그의 말에 다들 귀를 기울였다.
“궁주를 치려면 지금이 기회입니다. 설응의 통제권이 없는 지금 궁주에게 책임을 물을 기회이고 여차하면 힘으로라도…….”
“반란이라도 일으키자는 말입니까?”
검윤상의 말에 단경호가 물었다.
“결국 모든 방법이 안 되면…… 그렇게라도…….”
검윤상은 단경호의 눈빛에 압도되어 말을 더듬었다.
“허술한 행동은 궁주에게 빌미를 줄 뿐입니다. 아무리 모두를 아우르지 못하는 궁주라 해도, 빙궁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대주들은 모두 그의 사람이니 힘으로 형님을 끌어내리는 것이 가능할 리가 없습니다.”
단경호의 말에 다들 수긍을 했다. 빙궁의 핵심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대주(隊主)들이 모두 단지경의 사람들이었다.
“일단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을 끌수록 저희에게 유리할 것이 없습니다.”
“정 안 되면 암살(暗殺)이라도 해야겠지요. 방법이야 많지 않겠습니까?”
단경호의 말에 검윤상은 눈을 마주치고는 등골이 오싹함을 느껴야 했다. 조금은 허술한 듯하며 궁주의 자리에 욕심마저 없어 보이기도 했던 단경호의 진심을 봐서 다행이긴 했지만, 그는 자신의 선택에 큰 후회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우선은 대주들을 회유하도록 시도해 보는 게 어떨까요?”
“가능하겠습니까?”
“조준혁은 불가능할지라도 다른 대주들이라면 시도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흐음…… 시도해 보세요. 대주 중 한 명이라도 우리 쪽으로 돌아서 준다면 우리가 일을 시작하기 편해지니까요.”
또 다른 장로인 위지훈(魏智勳)의 제안이 마음에 드는지 단경호는 미소를 보였다.
“그건 그렇고 검성의 제자를 구슬릴 방법이 없겠습니까?”
“검성의 제자는 왜 그러십니까?”
단경호의 말에 모두 궁금하여 물었다.
“답답한 양반들…… 형님이 왜 검성의 제자를 만나고 있다 생각하는 겁니까? 검성 제자의 설응이 우두머리이니, 그것을 회유하려 드는 것이 아닙니까.”
“아, 그런데 궁주가 설응의 통제권을 찾으려 그를 데려온 것이라 하면 이미 늦은 게 아닐까요?”
검윤상의 말에 단경호는 한심하단 듯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설응의 우두머리 싸움에서 계속 패한 설왕이 인제 와서 이길 리는 만무하고, 설응의 통제권을 받으려면 검성 제자의 설응을 죽여야 하는데 그것 또한 불가능합니다. 그 설응을 죽이려 한다면 전체 설응이 움직일 테니까요. 그리고 형님의 성격상 그렇게 할 위인이 되지 않지요.”
“그럼?”
“형님은 검성의 제자를 그냥 보내 줄 가능성이 크죠.”
“제가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단경호의 말에 검윤상이 나섰다.
“검 장로님이 그럼 한번 이야기해 보세요. 위 장로님은 대주들의 설득에 힘써 주시고요.”
단경호는 검윤상과 위지훈을 한 번씩 바라보고는 말을 마쳤고, 그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이거 쉽게 형님을 끌어내릴 수 있을 줄 알았더니…… 그 음흉한 양반이 결국 무공을 숨기고 있었구먼…… 크, 뭐 쉽게 되는 일은 재미가 없지.’
단경호가 생각에 빠진 채 살짝 웃음을 보이자 모인 자들이 의아하게 여겼다.
‘이제는 이 사람들을 믿고 가만히만 있어서는 안 되겠군.’
북해빙궁의 중진들은 대부분 자신을 지지하고 있었기에, 스스로 나서지 않아도 단지경을 몰아낼 수 있다고 여겼었다. 괜히 자신이 모든 일을 주도할 경우 자신에게 화가 돌아올 수가 있었기에 한 발 빠져 있었으나 단지경이 숨겨 두었던 무위를 드러냈으니, 이제는 스스로 움직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