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빙정(氷晶)의 비밀
“백아가 정말 저 많은 설응의 대장이었군요.”
사라지는 설응들의 모습을 보며 유인경이 말했고, 이윤후도 그녀와 마찬가지로 놀라며 백아의 힘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었다.
사패(四覇) 중 한 곳인 북해빙궁이 경계할 만큼 북해설응의 힘은 강력했다. 저런 힘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큰 힘이었다.
검성이 자신에게 남겨 준 것들은 하나같이 대단한 것뿐이었다.
“빙궁도 사정이 생각보다 복잡한 모양이군요.”
이윤후의 말에 유인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빙궁에 막 도착한 그들이었지만 이미 눈앞에서 펼쳐진 궁주인 단지경과 장로인 검윤상의 갈등을 본 데다 다른 이들도 그리 곱지 않은 눈빛으로 자신들을 살피고 있었다.
“우선 안으로 드시지요. 손님을 너무 세워 놓고 있었네요. 준혁, 데려온 손님들을 내 방으로 안내해 주게. 난 이곳을 정리하고 들어갈 테니.”
“네. 궁주님.”
조준혁은 앞서 나오며 예를 취하며 명을 받았고 이윤후와 유인경 곁으로 다가왔다.
“저를 따라오시죠. 안으로 안내하겠습니다.”
“네. 백아, 너도 쉬고 있어.”
꾸륵―
이윤후의 말에 백아는 큰 날개를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 모습에 지켜보던 이들은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백아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이윤후도 조준혁을 따라나섰다.
* * *
“궁주님께선 검소하신 분이군요.”
단지경의 방으로 온 이윤후는 방을 보고는 말했고 그의 말에 조준혁과 단채영은 살짝 미소를 보였다.
“아버지께서는 책을 좋아하셔서요. 방이 꼭 문인들의 방 같죠?”
이윤후도 단지경의 방에서 익숙한 책 냄새와 꾸며 놓은 모습이 마치 자신의 아버지 방과 같아 향수를 느꼈다. 거기에 북해빙궁이라는 큰 세력의 궁주의 방치고는 너무 작기도 했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이거, 내가 늦었군요.”
뒤이어 궁주 단지경이 웃으며 방으로 들어오자 이윤후와 유인경이 일어나 예를 표하려 했으나, 그는 편히 앉으라는 듯 손짓을 보냈다.
“채영아, 나가서 시비들에게 차를 준비해 달라고 말해 주렴.”
“네.”
단채영은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나 방을 나섰고, 단지경은 자리에 앉은 채 이윤후를 빤히 쳐다보았다.
“검성의 제자분이 오셨는데 대접이 너무 안 좋았군요.”
“아닙니다. 저희로 인해 빙궁에 폐를 끼치게 되었는데 죄송합니다. 사부님께서도 원치 않았던 일일 겁니다.”
이윤후는 백아의 일이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사과를 했고 그 모습에 단지경은 살짝 미소를 보였다.
“어찌 그게 그쪽의 잘못이겠습니까? 그저 제가 상황을 너무 방관한 탓이지요.”
단지경의 말에 이윤후는 조금은 안도했다. 단지경이 설응의 통제권을 잃고 곤란한 지경에 이른 것을 직접 보았기에 조금은 미안한 감정도 있었다.
설응을 검성에게 내주었던 것으로 보아 빙궁은 자신의 사부와 돈독했을 터. 이 일로 궁주에게 피해가 되고 있었기에 조심스러웠던 이윤후였다.
“어떻게 보면 이렇게 한 번 일이 있고 나면 사이가 좋아지는 법이니. 나중을 위해서는 좋은 일이지요.”
단지경은 웃으며 말했고 보기에도 낙천적인 그의 모습에 이윤후와 유인경 모두 같이 미소를 보일 수밖에 없었다.
“궁주님, 여기 이 소협께서 설응의 통제권에는 관심이 없으시다고, 다시 빙궁에 그 힘을 넘기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래?”
조준혁이 말을 하자 단지경은 그의 말을 듣고는 이윤후를 다시 보고는 입을 열었다.
“설응의 힘을 직접 눈으로 보았을 텐데 욕심이 나지 않습니까?”
단지경의 솔직한 물음에 조준혁은 그를 말리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설응의 힘은 북해빙궁의 상징이자 빠른 이동과 전투를 가능케 해 주는 핵심이었다. 이윤후가 욕심을 가진다면 그 힘으로 무엇이든 할 수가 있었다.
“본래 제 것이 아니니 가져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부님도 원치 않으실 터이고요.”
단지경은 이윤후의 대답이 흥미로운 듯 표정을 보이며 그를 보았다.
“그런데, 설응의 통제권을 넘기겠다는 의미를 아십니까?”
“네?”
단지경은 계속 그에게 존댓말을 하고 있었기에 이윤후로서는 조금 불편했으나, 조준혁이 딱히 뭐라고 하지 않았기에 가만히 듣고 있었다.
“설응의 우두머리가 된 설응은 다른 설응에게 우두머리 싸움에 지기 전까지는 우두머리가 됩니다. 통제권을 넘긴다는 건 져 주겠다는 말인데, 이 소협의 설응은 그렇게 하겠다고 합니까?”
“상황은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할 겁니다.”
단지경은 이윤후의 대답에 재미있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설응과 대화도 가능합니까?”
“네. 대화라기는 뭣하지만 서로 교감을 한다고 해야 할 거 같네요.”
이윤후도 설명하려고 하니 조금은 난감했다.
“궁주께서도 보시면 놀랄 겁니다. 저도 이 소협과 설응이 서로 지내는 모습에 놀랐습니다.”
“그래?”
조준혁이 대화에 끼어들어 이야기하자 단지경은 다시 한번 놀랍다는 듯 표정을 보였다.
“이 소협과 겨룰 때, 제가 조금은 지나치게 압박했었는데 설응이 덤벼 오더군요.”
“설응이 개인 의사로 덤볐다고?”
“네. 저도 놀라 검을 휘둘렸는데 제 검을 튕겨 내기까지 했습니다. 이 소협이 설응을 말리지 않았다면 참담한 꼴이 될 뻔했죠.”
조준혁이 조금은 멋쩍게 이야기를 꺼내었다.
“놀랍군. 설응이 그 정도로 주인을 위하다니…….”
단지경은 조준혁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설응을 오래 다루어 온 단씨 일족도 설응과 그 정도로 교감을 나눈 기록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저 설응을 도구로써 써 왔고 설응은 주인으로서 따를 뿐, 명령 이외의 행동을 하지 않는 영물이었다.
“그건 그렇고, 네가 왜 이 소협과 겨룬 것이냐?”
“아, 그게 검성의 제자라기에…….”
단지경의 꾸지람에 조준혁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하지만 단지경도 그의 심정을 알았기에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검을 배운 자라면 검성의 제자라는 사실에 겨루고 싶어 할 게 당연했다.
“이거, 채영이와 이 녀석이 이 소협에게 큰 실수를 한 게 아닌가 싶네요.”
단지경의 말에 조준혁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무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빙궁의 사람들 앞에서는 빙궁의 최고수로 근엄한 모습을 보이는 그였지만, 단지경 앞에서는 철없는 아우의 모습이었다.
단지경도 남들 앞에서는 그를 대주로서 대하지만 둘만 있을 때는 아우로서 대하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저도 조 대협과 겨루어 많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고수와의 싸움에서 제가 많이 부족하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이윤후의 말에 단지경은 살짝 미소를 보였다.
“이 녀석과 대결이 힘들었습니까?”
“네, 검을 받아 내는 것조차 버겁더군요. 그전에도 사람들과 겨룬 적이 있었지만 조 대협의 검은 정말 상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이윤후가 진심으로 이야기하자 단지경은 조준혁을 보았다.
“전혀 아닙니다. 제가 싸움의 우위에 서긴 했으나, 소협이 가진 검에 대한 재능만큼은 제가 본 누구보다 뛰어났습니다. 단지 소협은 경험이 부족했을 뿐이지요. 만약…….”
말을 줄이는 조준혁의 모습에 단지경을 상황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분명 이윤후를 상대로 공세의 우위를 취했을 것이나 확실한 승패는 짓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설응의 공격을 받고 물러섰을 터.
“크게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소협. 이 녀석은 빙궁에서도 세 손가락 안에 드는 강자니까요.”
“그렇군요.”
“이 소협은 검성의 상승 무공을 쓰지 않는 듯하던데, 이유가 있습니까?”
조준혁은 그제야 궁금했던 점을 이윤후에게 물었다. 사실 몰아붙였던 내내 조준혁이 긴장을 풀지 못했던 이유가 이윤후가 단순한 검초를 써 왔을 뿐 검성의 검법을 쓰지 않았기에 그랬었다.
“그건 제가 아직 부족하여. 배우긴 다 했으나 내공이 부족하여 사용을 못 하고 있습니다.”
말인즉 빙궁을 도울 테니, 마땅히 내공 문제를 도와 달라는 뜻. 이윤후는 솔직히 밝힘으로써 거래를 제시한 셈이다.
검성의 비뢰검결은 내공의 뒷받침이 많이 필요한 무공이었는데, 이윤후는 늦게 무공을 배우다 보니 내공이 부족했다. 검성도 그에 대한 안배를 준비하지 못한 점을 안타까워했었다.
검성은 동굴을 발견할 당시 기인이 남겨 준 영약을 통해 혜택을 보았으나, 그 자신의 후인을 위한 영약은 준비하지 못했다. 시간이 없던 탓이었다.
“내공의 문제라…… 그럼,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겠군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니요?”
단지경이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하자 이윤후는 궁금해하며 물었다. 단지경은 그의 질문에 한 곳을 가리켰는데, 다름 아닌 상월검이었다.
“상월을 가리키는 것입니까?”
이윤후는 상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고 단지경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이 상월이군요. 검성께서 가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이렇게 실물로 볼 수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단지경은 올려놓은 상월을 유심히 보았다.
“궁주께서는 저 검을 아십니까?”
“모를 리가 있나? 원래 빙궁의 검이었는데.”
조준혁은 자신이 보고하지 않았는데 단지경이 검에 대해 알고 있자 놀라 물었으나 그의 대답에 더욱 놀랐다.
“빙궁의 검이요? 하긴 이렇게 빙정으로 검을 만들 수 있는 곳이 빙궁뿐이긴 하지만…….”
조준혁은 혼란스러워했다. 그의 말처럼 빙정은 워낙 귀해 하급품 일부만이 외부로 유출되어 나갈 뿐, 저 정도의 빙정을 구할 수 있는 곳은 빙궁밖에 없긴 했다.
“나도 아버지에게 이야기만 들었던 물건이었는데, 이 소협이 들고 있는 검이 상월이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겠더군.”
단지경은 아버지인 전 북해빙궁의 궁주로부터 상월의 존재를 알았고, 검성이 소유하고 있음을 들었다. 검성은 친밀하게 지냈던 빙궁의 궁주를 죽기 전에 만나러 왔었고 그와의 대면에서 장가철장에서 상월을 얻었던 일을 이야기했었다.
그는 친우가 상월을 얻었음을 기뻐했었고, 나중에 한 번 들고 오라는 말을 건네기도 했다. 하지만 검성은 이미 죽음을 앞두고 있었기에 다시 찾아오지 못했었다.
“그런데 왜 상월을 가리키신 거죠? 이것이 제 내공과 무슨 관련이 있나요?”
“아!”
이윤후가 궁금하여 묻자 조준혁이 무언가 깨달은 듯 크게 소리쳤다. 그 모습에 단지경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잔잔한 웃음을 짓고 있었고 이윤후와 유인경 모두 궁금해 그들을 바라보았다.
“빙정에는 남들이 모르는 한 가지 효능이 있습니다.”
“내공 증진에 도움이 되는 겁니까?”
“눈치를 챘군요.”
단지경이 말을 꺼내자 이윤후는 금세 그 말의 의도를 알아채었다. 말의 흐름상 유추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그도 어느 정도 상월을 얻고 나서 느끼고 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질이 좋은 빙정은 내공을 증진하는 속도에 도움을 줍니다. 영약을 먹더라도 빙정을 지니고 있으면 그 효과는 배가되지요. 빙궁에서 빙정의 채취를 하게 되면 질이 좋은 것을 밖으로 절대 유출하지 않는 이유기도 하고요.”
“상월을 지니고 있으면 내공에 큰 도움이 된다는 말씀이시지요?”
“물론입니다. 보통 사람의 몇 배는 빠르게 내공을 쌓을 수 있을 겁니다. 북해빙궁의 친우였던 검성의 후인이 오셨으니, 돌아가실 때 보약 한 첩이라도 선물로 드리지요.”
단지경의 설명을 듣고 나서야, 검성이 하산하면 왜 먼저 장가철장으로 가서 상월을 찾으라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검성은 누구보다 이윤후의 몸 상태를 잘 알고 있었고, 무공을 물려주는 처지에서 내공이 짧은 이윤후를 걱정했던 것이다.
그래서 빙정이 내공을 증진하는 데 효능이 있음을 알고 있던 검성은 이윤후에게 가장 먼저 장가철장으로 보내 상월을 찾게 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