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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성, 돌아오다-23화 (23/251)

23화― 십인회(十人會)

어둠이 짙게 깔린 밤.

산중 폐가(廢家)에 사람들이 하나둘 모이고 있었다. 하나같이 행색이 범상치 않았고 폐가의 주위를 경계를 서는 무사들도 있었다. 무사들은 귀면(鬼面)을 쓰고 있었다.

붉은 홍의를 입은 여인이 폐가로 다가갔다. 앞을 지키던 무사들은 다가오는 여인을 발견하고는 길을 터 주며 깍듯이 예를 취했다.

여인은 별다른 제재 없이 폐가 안으로 들어갔다. 바로 무림맹의 주작단주(朱雀團主) 미홍이었다.

미홍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듯한 집 안으로 들어가자 넓은 공간이 나왔다. 그 허름해 보이던 폐가 안은 제법 꾸며져 있었고, 폐가에 어울리지 않는 크고 둥근 긴 단상에 먼저 온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미홍이 방 안으로 들자 모두 미홍을 쳐다보았다. 그녀에게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다. 워낙 그녀가 몸매가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었기에 여인들은 멸시의 시선으로, 남성들은 음흉한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특이한 것은 미홍 외엔 전부 동물 가면을 쓰고 있어 정체를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늦었으면 얼른 자리에 앉아라. 너 때문에 모두 기다리는 게 보이지 않느냐?”

누군가 미홍에게 핀잔을 주었으나 그녀는 대꾸하지 않은 채 비어 있는 자리로 가 앉았다.

그녀를 포함해 열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상석(上席)에 앉은 여인은 귀면이 아닌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는데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다.

“대모(大母)님, 모두 모였습니다.”

미홍까지 착석하자 상석의 여인 옆에 앉아 있던 귀면 사내가 고했다. 젊어 보이는 여인에게 안 어울리는 호칭이었지만 대모라 불린 여인은 모두를 찬찬히 살피며 천천히 입을 떼었다.

“이렇게 갑자기 소집했는데 모두 참석해 주셔서 감사해요.”

여인은 청아하고 맑은 음성으로 이야기했다. 그녀가 말을 시작하자 약간 소란스럽던 폐가 안이 조용해졌고, 다들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이렇게 갑자기 모이게 된 이유는 모두가 알 것이라 생각합니다. 무림의 균형이 깨어지려 하고 있어요.”

그녀의 말에 아홉의 인물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일(一), 당신이 이야기해 주세요.”

여인은 자신의 오른쪽에 앉은 호면(虎面)의 사내에게 말했고, 사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모두를 보며 입을 열었다.

“이미 아는 자들도 있겠지만 사마련의 주인이 유상휘에서 그의 대제자 독고진으로 넘어갔습니다. 독고진은 사마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사왕련(邪王聯)이라는 새로운 단체를 만들었습니다.”

“유상휘는 어떻게 되었지?”

일이라 불린 사내의 말에 누군가 물었다.

“유상휘는 병중으로, 독고진의 손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습니다.”

“계속 궁금했던 부분인데 유상휘가 왜 병이 든 것이오?”

“나도 그게 이상했는데 유상휘 같은 고수가 무슨 병치레를 하는 것인지 이해가 안 되는군.”

다들 한마디씩 거들기 시작하자 호면인은 난감한 듯 대모라는 여인을 보았다.

탁―

여인이 탁자를 치자 수군거리던 인물들이 일제히 입을 닫았다. 그녀는 호면인에게 이야기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흠, 우선 이야기를 마무리 짓도록 하겠습니다. 독고진이 사왕련을 새로 만들면서 기존 사마련에 협력하던 사파들과 크고 작은 분쟁이 생기고 있는데, 이것은 어차피 금세 잦아들 것이고 결국 유상휘가 해냈던 것처럼 독고진도 하나 된 사파의 우두머리가 될 것입니다.”

“제가 말할 것이 있습니다.”

일귀의 말이 끝나자 미홍이 나섰고 대모라는 여인은 허락의 손짓을 했고, 호면인은 자리에 앉았다.

“천변미호(千變美狐) 미홍입니다.”

미홍은 가볍게 자신의 소개를 하고 나섰다. 모두 귀면을 써 자신들의 신분을 감추고 있었지만, 미홍은 그들과 달랐다. 비밀스러운 조직원들과 달리 자신은 얼굴을 드러내며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전 대모의 명에 따라서 오랜 기간 현 무림맹주 우금의 곁에서 그를 도와 왔습니다. 무림의 평화를 위해 필요악(必要惡)인 인물이고, 정파의 수장이지만 가장 더러운 인간이죠.”

미홍의 말이 시작되자 다들 그녀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아까 전 유상휘가 병상에 든 이유를 궁금해하셨는데…….”

미홍은 질문했던 인물들을 쳐다보고는 말을 이어 나갔다.

“유상휘를 병들게 한 것은 무림맹주 우금입니다.”

“정말인가?”

미홍의 말에 모두가 놀라 그녀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대모라는 여인은 예외였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인 듯 동요하지 않고 미홍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실입니다.”

“설마 대모의 의지이셨습니까?”

미홍의 말에 우면(牛面)의 사내가 대모를 향해 물었다.

“아니요. 처음엔 저도 몰랐던 일입니다. 저도 미홍이 차후에 알려 주어 알았습니다. 미홍, 이야기를 이어 가도록 하세요.”

대모는 우면의 물음에 답하고는 미홍을 보았다.

“이 일은 대모의 명도 아니었고, 저와도 관련이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금 그자가 유상휘에게 질투하여 그와 만날 때마다 술에 무색무취의 독을 조금씩 타 넣었고, 그것에 점차 중독된 유상휘가 결국 쓰러져 눕게 된 것입니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독이었지만 유상휘의 무공이 워낙 고강하여 죽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아무것도 못 하는 상태로 병상에 눕게 된 것이지요.”

미홍의 말에 다들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도 무림맹주가 정의로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친우라고 알려진 유상휘를 그런 식으로 제거하려 들었다는 사실에 놀란 것이었다.

“거기에…… 독고진이 권력을 잡은 것도 우금의 안배였습니다.”

“아니, 우금이 거기까지 손을 썼단 말인가?”

미홍의 말에 다들 다시 한번 더 놀라고 있었고, 그중에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놀라지 않는 이도 있었다.

“유상휘를 중독시키는 데 성공한 우금은 은밀하게 독고진과 접촉하여 그를 선동했고, 안 그래도 사부에 대한 불만이 있었던 독고진은 때를 잡은 것입니다.”

미홍의 말이 끝나자 다들 서로의 의견을 나누느라 분주했고 대모라는 여인도 눈을 감은 채 아무 말이 없었기에 모두의 수군거림은 끝이 나지 않았다.

“미홍, 더 말할 것은 없는지요?”

“한 가지만 더…….”

“이야기하세요.”

다들 시끄러워지자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고 있었는데, 대모의 발언에 다들 다시 조용해졌기에 그녀는 다시 말할 수가 있었다.

“현재 오대세가의 각 대표단이 모여 서안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오대세가만이 모이는 다른 성격의 모임이었는데, 사파의 일이 터지다 보니 아무래도…… 무림맹 기치 아래 합류하게 될 것 같습니다.”

“본래 다른 성격이라면 무엇이죠?”

미홍의 말에 의문을 느낀 양면(羊面) 여인이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미홍은 잠깐 뜸을 들이고는 입을 열었다.

“원래는 오대세가 쪽에서 현 맹주에 대한 불만을 이야기하려 모이던 것이었으나…… 사마련을 독고진이 장악하고, 현 무림이 비상사태가 되면서 오대세가가 무림맹에 반하는 일은 어려워질 듯합니다.”

“오대세가에서 왜 맹주에 대한 불만을 느끼고 있는 거죠?”

“워낙 구린 소문이 많은 맹주다 보니 정보를 듣고 있는 자들이라면 당연히 불만을 가질 만하겠죠.”

미홍의 말에 양면 여자의 입이 닫혔다. 비천신검(飛天神劍) 우금. 현 무림맹주로 오랜 기간 맹주 자리에 있으며 많은 소문을 몰고 다녔다. 처음에야 정사 연합을 만들어 사파를 막아 낸 정파의 영웅으로 맹주직에 올랐으나 그 자리에서 우금이 저지른 일들이 워낙 많았다.

색을 밝혀 맹주실에 여인들이 끊이질 않았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같은 명문 대파를 늘 무시해 왔기에 그들의 불만이 높았다. 자신이 볼품없는 출신이라 그런지 명문가에 대한 혐오가 있었고, 맹주직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은근히 표출하여 불만들이 생겨났다.

우금이 맹주가 되자 무림맹의 요직에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소수만이 남고 거의 쫓겨나다시피 했고, 그 일로 인해 반발이 꽤 심했다. 현 무림맹의 사대무단 단주 중엔 명문가 출신이 없었다.

특히 오대세가 쪽은 특히 무림맹에서 힘이 없었다. 그 일로 오대세가에서 비밀리에 의견을 조율하고 무림맹을 방문하려 했는데 사파의 일이 터진 것이다.

“대모님의 의견은 어떠십니까? 우금을 저대로 두어도 될까요?”

대모의 왼쪽 옆자리에서 말없이 모두의 말을 듣고만 있던 봉황 가면 여인이 대모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대모라 불린 여인도 잠깐 생각에 빠졌고, 모두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우금은 이미 저희의 통제를 벗어난 인물입니다. 전대의 대모님이 그에게 어쩔 수 없이 힘을 실어 주었지만 더 이상은 그를 봐줄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미 무림맹의 전권을 손에 틀어쥐고 무림에 영향력이 있는 그를 축출해 낼 방법이 없군요.”

“제거함이 어떨까요?”

대모의 말에 호면 사내가 말했다.

“그가 누군지 잊은 겁니까? 환우십강(寰宇十强)의 일인인 데다 정파의 무림맹의 맹주입니다. 그를 제거할 수 있다 쳐도 그 향후 파장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그런 경솔한 말을 합니까?”

“난…… 그저…….”

그의 말에 봉황면 여인은 핀잔을 주었고, 그런 상황이 익숙한지 다들 가면 속으로 조소를 짓고 있었다.

“봉황의 말이 맞아요. 그를 제거하기엔 너무 커 버렸어요. 그도 문제지만 더 큰 문제는 통제를 벗어나 버린 사파 쪽입니다.”

다들 대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조직은 음지에서 무림의 전반적인 모든 것에 관여하며 영향력을 끼쳐 왔는데, 갑자기 모든 게 틀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검성의 제자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대모의 한마디에 나머지 인원들은 하나같이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검성의 제자까지 무림에 나왔다고 하면 오절의 모든 후인이 나온 것 아닙니까? 대모께서는 어디서 그런 소식을……?”

늑대 가면 사내는 조직에서 정보를 담당하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는 정보를 대모가 이야기하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장가철장에 나타났다 하더군요. 상월(霜月)을 찾아갔다 합니다. 이것으로 장가철장 천무고에 있던 모든 신장의 무기도 무림에 풀린 셈입니다.”

“흐음, 장가철장의 정보였군요. 신장의 무기까지 다 풀렸다니…… 무림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예상하기 힘들군요. 오절의 후인들에…… 신장의 무기까지.”

늑대 가면의 말에 다들 가면 속 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긴장감이 폐가에 감돌았다.

“이렇게 갑자기 오절의 후인들이 모두 나타난 것이 우연일까요? 대모님.”

호면의 물음에 여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검성의 제자는 우연일지 모르나 다른 제자들이 비슷한 시기에 무림에 나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겁니다. 모두 그곳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겠지요.”

대모의 입에서 ‘그곳’이라는 말이 나오자 긴장감이 한층 더 짙어졌고, 폐가 안이 조용해졌다.

“그들이 움직일 때가 오긴 왔나 보군요. 오절이 움직인 것을 보니…….”

“오절 제자들의 만남이 기대되는군요. 기록을 보니 오절들의 만남도 꽤 요란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장내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자 호면은 그 분위기를 참지 못하고 화제를 바꾸려 했다.

“저도 기대되는군요. 오절끼리의 치정 싸움이 꽤 요란했다고 들었는데 말이죠.”

호면의 말에 개의 가면을 쓴 자가 호응하며 말을 꺼냈다. 사실 무림인 사이에선 오절의 무공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오절 서로의 관계에 대한 소문도 많았다.

오절은 삼남(三男) 이녀(二女)였는데, 여자들은 한 남자를, 남자들은 한 여자를 좋아했다. 그 관계로 인해 서로 간에 친하기도 했지만 말 못 할 일화들이 많았었다.

“미홍.”

“네. 대모님.”

다들 오절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대모는 미홍을 불러 가까이 오도록 손짓했다. 미홍이 자리에서 일어나 대모의 곁으로 가자, 대모는 그녀에게 서찰 하나를 내주었다.

“돌아갈 때 읽어 보도록 해요.”

“네. 대모님.”

서찰을 품에 갈무리한 그녀는 다시 자리에 가서 앉았고 중요한 이야기를 마친 모임은 어느새 파하는 분위기가 되었고 다들 소리 없이 흩어졌다.

미홍은 돌아가는 길에 대모가 건네준 서찰을 꺼내 보았다. 거기에는 검성의 제자가 홍예루로 갈 것이니 그와 관계를 맺어 두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검성의 제자라…… 변수가 될 자를 미리 대모께서 선점하려는 모양이시군.”

미홍이 서찰을 구기자 그와 동시에 발화하며 서찰은 그녀의 손에서 재가 되어 바람에 흩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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