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서안(西安)으로(1)
스스스―
방의 중앙. 이윤후가 가부좌를 튼 채 운공 중이었고 그의 주위에 뿌연 연무(煙霧)가 가득 차 있었다. 방에 가득 찬 연무는 이윤후의 몸에서 나온 것이 아닌, 탁자 위에 놓인 상월(霜月)에서 나온 것이었기에 차가운 기운이 방에 가득 차 있었다.
이윤후는 만상오행심법(萬象五行心法)을 운공 중이었다. 다른 무문의 심법들과 달리, 자연지기(自然之氣 )그 자체를 갈무리하는 심법이라 그런지 정순한 내공만이 쌓였다.
수기(水氣)를 온몸에 돌리자 상월이 반응하여 한기를 뿜어냈다. 목기(木氣)를 운행하자 더욱 기운이 강해졌고, 화기(火氣)로 넘어가면서 그 기운에 대응하여 방이 다 얼 정도의 한기를 뿜어내었다.
하지만 그의 몸에서 발현된 화기로 인해 한기와 부딪치며 방에 연무가 가득 차게 된 것이었다. 토기(土氣)로 넘어가면서 상월도 잠잠해졌고, 금기(金氣)로 오행의 기운을 모두 몸에 돌린 후 이윤후가 눈을 떴다.
“이런, 이게 대체.”
이윤후는 방에 가득 찬 차가운 기운에 상월에 눈이 바로 갔다.
방이 전부 얼어붙어 있어 난감해졌기에 일단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오행공의 탓인가?”
확신은 못 해도 이윤후는 짚이는 부분이 있었다. 오행공의 영향으로 상월이 반응했을 가능성이 크다 생각했다.
“너를 사용해 봐야 할 텐데, 마땅한 자리가 날지 모르겠구나.”
스릉―!
이윤후는 검을 살짝 뽑으니 투명한 검신이 살짝 드러났다. 장윤호의 말을 듣고 신장의 무기에 대한 궁금증이 있어 상월을 빨리 사용해 보고 싶었으나, 아직 이윤후에게 상월은 한기를 뿜어내는 검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척―
그는 검을 다시 검집에 넣고 탁자에 내려놓은 뒤 열린 창가로 걸어갔다. 만월(滿月)이 뜬 밤이라 밖은 달빛이 밝았고 먼 곳까지 보였다.
“사부님은…… 어떻게 되셨을까?”
이윤후는 문득 검성이 궁금해졌다. 수련 기간 동안 검성의 힘이 약해져 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기에 소멸 직전이란 생각이 들었다. 검성도 자신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 이윤후가 동굴에 머문 기간 동안 필사적으로 가르쳤었다.
“서안에 유 소저를 데려다주고 동굴에 가 봐야겠다. 어머니도 보고 싶고…….”
그는 유인경을 무림맹에 데려다주고 동굴로 돌아가 검성의 시신을 묻어야겠다고 다시 생각했다. 동굴을 떠나고 계속 마음에 걸렸던 부분이었다.
차마 검성의 사념이 살아 있는데 묻을 수 없어 그냥 떠나왔지만, 그대로 동굴에 두고 온 게 마음에 남았다.
“모두 잘 계시겠지.”
차오른 달을 보고 있으니 그는 어머니 생각이 많이 났다. 늘 아버지의 기대에 충족하지 못하던 자신의 형 이강후는 밤마다 달을 보며 한숨을 지었다.
그의 형은 착했지만 대학자인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었고, 늘 아버지는 형을 보고 한숨만 쉬었다. 하지만 형인 이강후는 그런 아버지를 실망하게 하지 않으려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런 형이 이윤후는 한심하기도 했지만, 지금 와서 보면 참 대단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아버지의 기대를 받으며 일부러 그 기대를 저버린 것이었지만, 형은 아무런 기대가 없는 속에서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 말단의 관직이라도 따낸 것이었다.
사람들은 형의 성취마저 대학자인 아버지가 손을 썼을 거라 깎아내렸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은 가족 모두가 알았다. 그렇기에 표현에 인색한 아버지인 이화운도 형이 떠나는 길에 손수 준비한 붓과 벼루를 선물하기도 했다.
“형도 보고 싶군.”
이윤후는 달을 한참 바라보다 탁자에 놓인 상월을 한차례 쓰다듬고는 침상으로 가 누웠다. 내일부터 다시 서안까지 먼 길을 가려면 푹 자두어야 했다.
유인경의 현재 상황상 그녀를 해치려는 인물들이 나타날지도 몰랐기에 침상에 누운 그는 금세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 * *
퍼드득―
어둠을 뚫고 날아온 하얀 새가 힘찬 날갯짓을 하고는 하강하더니 여인의 손끝에 앉았다.
숲에서 흔히 보이는 일반적인 새들과 달리 훈련을 받은 새라는 뜻.
“먼 길을 오느라 수고 많았구나.”
여인은 연통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며 먹을 것을 새에게 물려 주었다. 그러자 새는 그것을 물고 날아갔다. 그 모습에 여인은 미소 지었다.
“오호라, 남궁세가에서 안명을 이곳에 보냈다고?”
작은 종이에는 남궁나연과 안명 일행에 대한 보고가 적혀 있었다.
“남궁인…… 그자가 맹주에 대한 불만이 상당한가 보군.”
여인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미홍(美紅)이었다. 무림맹의 사대무단(四大武團) 중 주작단(朱雀團)의 단주이자 천변미호(千變美狐)라 불리는 여인이었다.
무림맹의 사대무단 중 정보를 주로 다루는 주작단이었던 데다, 현 맹주인 우금이 맹주가 된 후 더욱 비밀스런 조직이 되었다.
우금이 어느 날 갑자기 천변미호 미홍을 주작단의 단주로 임명했고, 그 후 그녀는 주작단을 대대적으로 개편하여 이전과 전혀 다른 조직으로 만들었다.
“확실히 오대세가는 현 맹주에 대한 경계심이 높군.”
미홍은 또 다른 서신을 들곤 낮게 읊조렸다. 이번엔 다른 오대세가인 모용세가의 일행을 감시하는 수하들의 서신이었다.
“모용세가는 모용우(暮容宇)까지…… 오대세가 놈들이 작정하고 사람들을 보내오는군.”
약간은 곤란한 듯,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했다. 안명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미홍은 그에 대한 정보를 정확하게 가지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무림맹으로 오는 것에 경계하고 있었다.
“뭐, 어차피 우금과 오대세가가 대립하는 건 ‘우리’에게 나쁠 것이 없으니…… 상관없겠지.”
미홍은 서신을 구겼다.
화륵―
구겨진 서신은 그녀의 손에서 재가 되어 바람에 흩날렸다.
“이 일을 대모(大母)님에게 보고해야겠네.”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미홍은 어디로인가 몸을 날렸다.
* * *
자기 전에 열어 둔 창문으로 햇살이 쏟아졌고, 이윤후는 햇살에 억지로 눈을 떠야 했다.
“이 소협, 일어나셨나요?”
문밖에서 들리는 음성은 유인경이었다.
“네. 들어오셔도 됩니다.”
그는 침상에서 몸을 일으켜 옷을 챙겨 입고는 말했다.
“너무 일찍 찾아온 게 아닌가 했는데 일어나셨네요.”
유인경은 며칠 만에 편안하게 잠을 자다 보니 눈이 일찍 떠졌다. 식사를 하기 위해 이윤후가 일어나길 기다렸지만 아무 기척이 없어 찾아온 것이었다.
“지금 시각이 꽤 지났나요?”
이윤후는 자신이 일찍 일어났다고 생각했지만 창밖으로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에 생각보다 시간이 꽤 흘렀다고 짐작했다.
“네. 곧 사시(巳時)예요. 계속 주무시기에 안 깨우려했는데 옷도 찾으러 가야 하고 해서…….”
“아, 제가 너무 푹 자 버렸네요.”
자신이 늦었음을 안 이윤후는 조금 민망한 웃음을 보였다.
“먼저 내려가 계시면 금방 내려갈게요.”
“그럼, 제가 주문을 해 놓을게요. 드시고 싶은 음식 있으신가요?”
“아무거나 유 소저와 같은 거로 해 주세요. 가리는 것은 없으니…….”
“네. 준비하고 내려오세요.”
유인경은 미소를 보이고는 방을 나섰고 이윤후는 머리를 긁적였다. 사실 수련을 하고 지금까지 이렇게 늦잠을 자 보긴 처음 이었다.
수련 때는 늘 해 뜨기 전 묘시(卯時)에 일어나 운공을 시작했었고 동굴을 나와서도 늘 묘시에 일어나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탁자에 놓인 상월과 장윤호가 맡긴 상자를 챙겼다.
이윤후가 방을 나서 일 층으로 내려가자 유인경이 그를 보고 손을 흔들고 있었고 바로 그쪽으로 향했다.
“아침이라 가볍게 먹을 수 있는 거로 시켰어요.”
“네. 잘했어요. 옷 찾으러 식사하고 가면 되겠네요.”
“아니요. 점소이에게 좀 찾아 달라고 부탁했어요. 어제 수고비를 줬더니 자기가 그러겠다고 하더라고요. 고맙게.”
자리에 앉은 이윤후를 향해 유인경은 말하며 미소를 보였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은 아직 안 만나 보셨죠?”
“남궁세가의 사람들이요? 저 이제 일어나서 내려오는 거라…….”
“저도 일어나서 남궁세가의 분을 보았는데, 이 소협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더라고요. 아직 자는 거 같다고 말했는데, 왠지 귀찮은 일을 이야기할 거 같아요.”
이윤후는 유인경의 말을 대수롭지 않게 듣고 있었으나 그녀는 말하면서도 찝찝함을 감추지 못했다. 남궁세가의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이미 자신도 이윤후에게 동행 요청을 해 봤던지라 그런 낌새를 더욱 빨리 알아차렸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고 얼마 있지 않아 안명이 계단을 내려오다 그들을 발견하고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 소협, 일어나셨군요.”
안명은 넉살 좋게 이윤후의 옆자리에 앉았다.
“칫.”
그 모습에 유인경이 못마땅하다는 듯 혀를 찼다.
‘크흠, 환영받지 못하는구나. 그래도 남궁세가의 사람인데 이렇게 박대를 하다니…….’
안명은 이렇게 환영받지 못하기는 처음이라 난감했다. 안 그래도 부탁을 해야 하는 처지인데, 유인경이 처음부터 지금까지 계속 경계했기에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저는 일찍 세가 사람들과 먹었습니다. 식사가 늦으시군요.”
“아, 제가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요.”
“오랜만에 숙소에서 자는 건데 늦을 수도 있지요. 괜찮아요.”
유인경이 이윤후의 말을 이었다. 그녀로서는 이윤후가 수련하고 막 출두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터라 잠을 이렇게 편하게 자는 것은 처음일 거라 생각했다.
“두 분 사이가 정말 좋으시군요. 연인이신 건가요?”
안명은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아니리라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서로 배려하고 있음을 보고는 질문했다. 그의 물음에 이윤후와 유인경은 서로를 보았고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두 사람의 반응에 안명은 조금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연인이냐고 물었더니 둘이 마주 보고 웃어? 정말 연인 사이인가…….’
안명은 둘을 더욱 의심스러운 눈길로 살폈다.
“그 정도로 가까워 보이나요?”
유인경이 웃음을 멈추고 물었다.
“서로 허물없이 말하고 배려하는 것을 보니 보통 사이로는 안 보이네요.”
그녀는 안명의 말에 기분 나쁘지 않은 듯 다시 미소를 보였다. 그 웃음이 아름다워 바라보는 안명도 혹할 정도였다.
‘나이는 어린 듯한데 웃음에 색기(色氣)가…… 음, 몸매도…….’
안명은 유인경의 웃음에 흘렸다가 정신 차렸고 옷이 작아 도드라져 있는 가슴에 눈길이 갔다가 놀라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고 왜 절 찾으셨죠?”
“아, 제가 가장 중요한 것을 깜박할 뻔했군요.
이윤후의 물음에 제정신을 차린 안명은 그를 보았다. 고강한 무공을 지닌 무인 청년. 그와 함께라면 가는 길이 든든해질 터였다.
“이 소협과 유 소저께서 서안으로 가신다고 들었는데…….”
안명은 말을 꺼내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며 살폈고, 그의 눈짓에 유인경은 이미 그가 무엇을 말할지 눈치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