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숨겨진 의도(1)
“괜찮다면 소협의 사문과 존함을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남궁세가에서 이 은혜는 꼭 갚도록 하겠습니다.”
두 여인의 눈치가 이상해지자 안명이 그 적막을 깨며 끼어들었다.
“사문은 따로 없고, 이름은 이윤후라고 합니다.”
“사문이 없으시면 사부님이 누구신지……?”
어차피 이름을 알고 있었던 안명이 궁금했던 것은 이윤후의 출신이었다.
“무엇이 알고 싶은지 알겠지만, 사부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길 바라셔서 알려 드리기 어렵군요.”
하지만 이윤후가 딱 잘라 말하자 안명은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대화 속에 은근히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대화를 듣고 있는 이가 있었는데 바로 유인경이었다.
모두가 궁금해하는 이윤후의 정체를 알고 있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그 기분이 표정으로 드러나 있었다.
“이 소협과……?”
남궁찬이 이윤후를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가 유인경을 보았고 눈치 빠른 유인경은 자신이 소개 안 했음을 알았다.
“전 유인경이라고 해요.”
“소저께서는 사문이 어디신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제가 그걸 대답해야 하나요?”
유인경은 남궁찬의 물음에 조금은 기분 나쁜지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녀로서는 남궁세가의 인물들이 자신과 이윤후에게 이렇게 질문해 오는 상황들이 불편했다.
“이 소협…….”
유인경은 이윤후의 소매를 잡아끌며 자리를 떠나자는 눈빛을 보내었다.
“저희는 갈 길이 멀어 이만 먼저 가 보겠습니다.”
이윤후가 작별의 말을 전하자 안명은 아쉬웠으나, 그들을 잡을 명분이 없었기에 보내 줄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구명지은을 입었습니다. 부디 나중에라도 남궁세가에 한번 들러 주시길 바랍니다. 이 소협.”
“꼭 그리하도록 하지요.”
이윤후는 다시 한번 모두에게 인사를 하고는 돌아섰고, 유인경도 그의 뒤를 따랐다.
“흥, 저 계집은 뭐죠? 이 소협에게 달라붙어서…… 대화를 방해나 하고…….”
그들이 떠나자 남궁나연은 한껏 토라진 채 투덜거렸다. 이윤후가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는 점도 짜증이 났지만, 마치 자신만이 이윤후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듯 자랑하는 듯한 태도에 짜증이 났다.
“유인경이라는 저 여인도 보통 인물은 아닌 거 같았습니다.”
“뭐라고요?”
남궁나연은 한껏 화난 음색으로 반문했으나, 안명은 그녀를 다그치며 말을 이었다.
“아가씨. 우리 앞에서는 그렇게 해도 되지만, 남들 앞에선 짜증도 참고 성질도 죽이세요. 주인어른 얼굴에 먹칠하지 마시고요.”
“됐고. 하던 얘기나 해 봐요.”
안명이 자신에게 또 훈계하자 더욱 짜증이 난 남궁나연은 안명의 말을 재촉했다.
“그녀가 들고 있던 도를 보셨습니까?”
안명의 말에 남궁나연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그녀에 대해 거의 신경 쓰지 않았기에 도를 들고 있었는지도 생각나지 않았다.
“붉은 도를 들고 있었어요.”
남궁나연이 말이 없자 옆의 시비가 답했다.
“그녀가 든 도 역시 보통의 물건이 아니었어요. 언뜻 보기에도 이름 있는 장인의 명도로 보였습니다. 그런 도를 가진 여인이라면 분명 이름 있는 집안의 여인일 겁니다.”
“그런데 유씨에 도를 쓰는 무가의 여인이 있는 문파를 아십니까?”
안명의 말에 듣고 있던 남궁찬이 물었다. 안 그래도 남궁찬도 유인경의 도를 보았고, 한 번 보면 잊지 않을 만한 미인이었기에 관심이 있었다.
“음, 딱 떠오르는 곳은 산서의 유가장(劉家莊) 정도인데…… 거긴 장주 아래 아들만 셋으로 알고 있으니 제외해야 하고…… 마땅히 없군.”
안명도 유인경과 접점이 있을 만한 문파가 생각나지 않았다. 사실 저 정도의 미모라면 무림에 알려졌을 텐데 전혀 생각나는 인물이 없었다.
“사파의 여인이 아닐까요?”
“가능성이 없진 않겠군.”
남궁찬의 말에 안명도 부정하지는 못했다. 유인경이 정파의 여인이었다면 자신이 모를 만한 미모나 실력이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그녀의 기도는 상승 무공을 익힌 무인의 그것이었다.
정파의 인물임에도 자신이 모를 가능성보다는, 남궁찬의 말대로 사파의 여인일 가능성이 더 크다 여겼다.
“저희…… 이동은 어떻게 하죠? 마차도 부서졌고 말들도 도망가거나 죽어 버렸는데요.”
시비의 말에 남궁찬과 안명은 현실에 직시하게 되었다. 두 사람 모두 남궁나연을 보았고 남궁나연은 이미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자신들을 마주 보았다.
“난 걷지 않을 거야.”
남궁나연의 말에 두 사람 다 한숨을 쉬었고, 안명은 남궁찬의 어깨를 치며 입을 열었다.
“일단 아가씨와 조금만 여기서 기다리고 있게. 말들이 멀리 도망가지 못했을 것이니 내가 주위를 좀 둘러보고 오겠네.”
“안명 어르신, 그런 거라면 제가…….”
남궁찬은 자신이 나서려 했으나 안명이 고개를 젓고 있었다.
“자네가 아가씨와 있게.”
안명은 그 말과 함께 도망가듯 사라졌고, 남궁찬은 등 뒤에서 느껴지는 남궁나연의 시선을 느껴야 했다.
안명이 왜 자신이 부득부득 가겠다고 한지 알 것도 같았다. 안 그래도 떼쟁이에 엄살이 심한 남궁나연과 지금 상황에 같이 있어 봐야 투정만 듣게 될 것이 뻔하니 스스로 나선 것이었다.
안명이 사라지고, 남궁찬과 시녀들은 남궁나연을 달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했고 그녀의 투정에 질려 갈 때 즈음 안명이 도망간 말 두 마리를 가지고 돌아오고 있었다.
* * *
“마을에 가면 옷부터 바꾸죠.”
말없이 걷던 이윤후가 정적을 깨며 입을 열었다.
“아…… 그래요. 깜박하고 있었네요.”
유인경은 이윤후의 말뜻을 이해하고는 웃음 지었다. 안 그래도 옷이 작아 가슴이 지나치게 도드라져 있었는데, 이번 전투로 옷 일부가 찢어진 듯 보였다.
이윤후 자신은 상관이 없었으나, 그녀가 괜한 시비에 걸릴 수도 있었다.
“옷을 맞추려면 그래도 시간이 좀 걸릴 텐데 산을 빨리 내려가죠.”
유인경도 옷이 조금은 불편했기에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윤후는 자신들의 머리 위로 날고 있는 백아를 한 번 쳐다보고는 하늘을 향해 무언가 손짓을 했다.
빼액―
백아는 이윤후의 손짓을 알아들은 듯, 한 차례 선회하고는 사라졌다.
“백아와 무슨 대화를 나눈 건가요?”
앞서가던 유인경은 이윤후의 손짓과 함께 백아가 사라지는 모습에 궁금증을 느꼈다.
“대화라기보단 수신호(手信號)입니다. 자연스럽게 알아듣더군요, 백아도.”
이윤후는 유인경의 질문에 살짝 민망했다. 사실 별다른 의미 없는 손짓을 해도 백아는 철석같이 알아듣고 움직였다. 이 모든 게 백아와 자신이 나눈 기운 때문임을 알았지만 설명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흐음…… 이 소협은 서안에 갔다가 어떻게 할지 생각해 보았어요?”
“소저를 안전한 곳에 데려다주고, 혼자서 강호를 조금 더 유람하려 합니다.”
“그래요? 이 소협이라면 분명 많은 이들이 주위에 몰려들 거예요.”
유인경은 말을 하고는 먼 하늘을 보았다. 사실 이윤후가 정파의 오절의 제자인 만큼 자신과는 극과 극에 놓인 관계나 다름없었다. 그 사실을 스스로 인지하고 나니 조금은 슬퍼졌다.
“많은 이가 몰린다니, 검성의 제자라서 말입니까?”
“그렇죠. 오절은 한 시대를 풍미했었어요. 그들이 사라지고 정파 사람들이 얼마나 오절을 생각했는지 이 소협이 상상도 못 할걸요.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같이 사라졌지만, 지금 다시 검성의 제자가 나타난다면 말 그대로 폭발적인 관심을 끌겠지요. 정파든 사파든요.”
“주목받는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데, 그렇다면 더욱 신분을 숨겨야겠네요.”
이윤후는 슬며시 미소를 보였다. 주목받는 삶이 어떤지 이미 겪어 본 그였기에 할 수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의 어릴 적을 모르는 유인경으로서는 이윤후의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는 표정을 보였다.
“무림인이라면 이름을 알리고 싶어 하는데, 이 소협은 그런 욕심이 없나요?”
“없습니다.”
“그럼, 왜 무공을 배운 거죠?”
유인경의 물음에 이윤후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가 입을 열었다.
“제 뜻대로 살고 싶었으니까요.”
이윤후의 알쏭달쏭한 말에 유인경은 그의 과거가 더욱 궁금해져 오고 있었다.
“마을이 보입니다.”
이윤후는 마을이 보이자 발걸음을 재촉했고. 유인경은 더 묻고 싶은 마음이 있었으나 일단은 묻어 두어야 했다.
* * *
마을에 들어온 그들은 가장 큰 객잔을 찾아 방을 잡았고 옷을 새로 맞춘 후 추가 비용을 부담하여 최대한 빨리 수선할 수 있도록 부탁했다.
도망 나오면서 챙겨 나온 것이 없었던 유인경은 지니고 있던 패물을 처리하여 돈을 마련했다. 이윤후가 자신의 돈을 써도 된다고 했지만, 안 그래도 신세를 지고 있는 처지였던 그녀는 돈 부담마저 지고 싶지 않아 했다.
“이제 돌아가 식사부터 하지요.”
옷을 맞추고 나온 유인경은 기분 좋은지 생글생글 웃으며 이윤후에게 말했다.
“네. 벌써 어두워졌네요. 숙소로 돌아가지요.”
마을에 도착하자 바쁘게 움직였던 그들은 식사도 하지도 않은 채 움직인 데다, 점심을 거른 상태였기에 더욱 배고픈 상태였다.
“유 소저의 도가 너무 눈에 띄는데, 조금은 감추는 게 어떤지요.”
거리를 걷던 이윤후는 워낙 많은 사람이 유인경을 힐끔거리며 쳐다보고 있었기에 신경이 쓰여 말했다. 그들의 시선 대부분이 아름다운 유인경에 대한 미모를 보는 것이기도 했지만, 그녀의 들고 있는 적풍도에 시선을 주는 이들도 많았다.
이름과 같이 워낙 붉은색을 자랑하고 있어 눈에 확 띄었고, 미인이 그런 도를 들고 다니니 더욱 눈길을 받고 있었다.
“아, 그런가요?”
유인경도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아직 사마련에서 자신을 쫓고 있음을 알았기에 이윤후의 말을 따라야겠다고 생각했다.
“숙소로 돌아가면 두꺼운 천에 싸서 다녀야겠네요.”
“그런데 저들은…….”
숙소로 잡은 객잔에 도착해 갈 때쯤 멀리서 보이는 인영들이 있었는데, 어디서 봤었던 자들이었다.
가까워지자 그들도 이윤후와 유인경을 발견했고, 그중 한 명이 빠르게 달려왔다.
“이 소협, 이렇게 다시 보는군요.”
달려온 이는 다름 아닌 남궁세가의 안명이었다. 남궁 일행도 산에서 내려와 이곳에 숙소를 잡은 것이었다.
“산에서 내려오다 고생하셨나 보군요.”
남궁세가 인물들의 행색이 전보다 더욱 초췌해 보였다. 그중 남궁나연은 멀쩡해 보였으나 남궁찬과 두 시비의 표정이 마치 지옥에서 돌아온 것과 같았다.
“……이 소협, 눈썰미가 좋으시군요. 우리 아가씨가 워낙 성격이 더러워서, 우리 모두 그 비위 맞추다 보니 다들 거기에 고생을 한 거죠.”
“안명, 뭐라고요?”
안명의 말에 남궁찬과 두 시비는 웃음을 터뜨렸으나 남궁나연이 버럭 소리를 질렀고, 이윤후와 유인경도 대충 상황을 짐작하고 살짝 미소를 보였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숙소도 같은 거 같은데 일단 들어가죠.”
유인경은 힐끗 남궁나연을 보고는, 이윤후의 손을 잡아끌어 객잔 안으로 향했다.
남궁나연은 그녀의 모습에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들이 객잔 안으로 들어간 후, 안명은 한참을 남궁나연에게 시달려야 했고, 그것을 재미있게 구경하던 남궁찬과 시비들도 결국 같이 잔소리를 들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