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성, 돌아오다-18화 (18/251)

18화― 호색응(好色鷹) 백아(2)

지욱은 이윤후의 검을 쳐다보았다.

백검으로만 보였던 검은 가까이서 보니 반대편이 비칠 정도로 투명했다. 그렇다는 것은 강철로 제련된 검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게다가 저 검과 부딪쳤던 수하가 손이 얼어붙은 것도 보았다. 가히, 명병(名兵) 수준을 넘어선 신병이기(神兵利器)!

필시 이름 높은 명장이 만들었거나 신묘한 재료로 제련했을 터. 그중에서도 빙공(氷功)과 관련된 광석이라면…….

‘이건 마치 빙정(氷晶) 같지 않은가.’

빙공에 대해 조예까진 없는 지욱이었으나, 무림 경험이 많았던 그는 문득 예전에 견식했던 북해빙궁의 무공을 떠올렸다.

휘날리는 바람마저 얼려 버렸던 북해빙궁 출신 낭인의 신묘한 무공에 지욱이 비결을 물어본 적이 있었는데, 그때 그 낭인은 북해에서 우연히 빙정을 발견해 그대로 삼켰다고 했었다. 그러곤 자신이 처먹은 빙정이 얼마나 대단한 건지 일장연설을 늘어놓았었다.

‘그러고 보니, 북해빙궁의 초대 궁주가 빙정으로 무기를 만든 경우도 있…….’

그 순간, 강호 경험 많은 지욱의 머릿속이 번뜩였다.

지욱은 눈앞의 청년이 자신의 생각보다도 더 대단한 인물임을 깨달았다.

북해설응(北海雪鷹), 빙공(氷功), 빙정검(氷晶劍)이라니!

약관도 되지 않은 나이에 자신을 상대할 수 있는 건 명문 대파 출신이 아니고서야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한데 명문 대파 출신이 새외 사패인 북해빙궁의 기물을 들고 있을 리 없으니, 그 출신이 어딘지는 뻔할 뻔 자 아닌가!

“……그 검, 빙정으로 만들었군. 자네는 북해빙궁의 사람인가?”

지욱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자신의 짐작대로 이윤후가 북해빙궁의 사람이라면 자신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인물이었기에 음성이 떨리고 있었다.

‘자칫하다간 남궁가의 버릇을 고쳐 놓으려다, 새외 세력과 척을 지게 될 수도 있는 일 아닌가.’

지욱의 물음에 남궁세가의 인물들도 이윤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현재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궁금증은 이윤후의 정체였다.

하나 이윤후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북해빙궁은 가 본 적이 없는 곳이오. 전혀 관련도 없소.”

이윤후의 대답에 지욱은 속으로 의심했으나, 아니더라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빙정으로 만든 검을 지니고 북해설응을 가진 이윤후가 보통 인물일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아니라 하더라도 저자는 필시 전대 은거기인의 후인일 터. 건드릴 수 없는 자다.’

북해빙궁이 아니라도, 자칫 노회한 전대 고수가 쌍사련을 찾아올지 모른다. 그렇기에, 지욱은 결단을 내렸다.

“모두 물러나라!”

지욱의 외침에 남은 쌍사련의 무인들이 재빠르게 몸을 추스르며 그의 뒤로 모였다. 그 모습에 남궁세가의 사람들도 다시 경계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만 떠나려 하는데…… 어떻소이까, 소협.”

지욱의 말투가 존대로 바뀌어 있었다. 전의가 없어 보이는 모습에 이윤후도 투기를 갈무리했다.

“남궁은 괜찮습니까?”

지욱이 오해하고 있음을 눈치챈 이윤후는 대답을 남궁나연에게 돌렸다. 이미 남궁가의 호의를 얻기 충분했으니 그가 순순히 물러난다면 싸울 이유는 없었다.

“남궁 소저. 오늘 그대들의 실수는 묻어 두겠으니, 그만하는 게 어떻소.”

지욱이 물러나 있는 남궁나연에게 말하자, 그녀는 살짝 눈초리를 올리며 인상을 썼으나 바로 답하지는 않았다.

여기서 자신들을 습격한 쌍사련을 씹어 먹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모양새가 남궁세가에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는 망설이고 있었다.

촤자장―

금속성이 울렸다. 그 소리가 들린 곳을 보자 그녀는 고민을 그만두어야 했다. 지욱의 등 뒤로 서 있던 쌍사련의 무사들이 지욱의 손짓에 모두 무기를 뽑는 소리였다.

어차피 지욱이 미리 나섰다면 벌써 자신들은 그들에게 잡혀갔을 몸들이었다.

그런 지욱이 먼저 물러나 준다니 여기서 자존심을 차리는 것은 사치라고, 남궁나연은 생각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이만하도록 하죠. 저희 마차와 손해입은 모든 것을 넘어가도록 하겠어요.”

남궁나연이 꼭 선심을 쓰는 듯 말하자 지욱은 속이 쓰렸지만 여기서 괜히 그런 것에 트집 잡아 봐야 좋을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조용히 물러나야 할 때였다.

“다음부턴 남의 영역에서 소란을 삼가시오, 소저. 그때는 반드시 소저의 피를 볼 것이니.”

지욱의 말에 남궁나연의 표정이 굳어졌지만 애초에 자신들의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싸움이었고, 시비들과 남궁찬이 그녀를 애처롭게 쳐다보고 있었기에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조용해진 그녀의 모습에 이윤후가 입을 열었다.

“마무리된 거 같군요.”

“소협, 다음에 보는 자리는 적이 아니었으면 좋겠소이다.”

지욱은 이윤후를 향해 예를 갖추어 작별 인사를 했고 이윤후도 예를 취했다.

“이렇게 물러서는 게 쉽지 않은 선택이실 텐데,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어떻게 보면 소협을 만난 것이 큰 행운일지도 모르겠소.”

지욱이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는 이윤후가 대단한 인물이라 예상하고 있었기에 이번에 양보한 것이 나중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기에 피해를 입고도 물러서는 것이다.

“이만 가 보도록 하겠소.”

지욱이 돌아서 수신호를 하자, 쌍사련의 무사들이 일제히 뽑아 든 검과 도를 회수했고, 대열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지욱은 이윤후를 다시 한번 돌아보고는 자신도 그 뒤를 따라나섰다.

꾸륵―

쌍사련의 무사들이 모두 사라지자, 백아가 어느새 이윤후에게 다가와 자신의 얼굴을 이윤후에게 들이밀었고, 이윤후도 웃으며 그런 백아를 안아 쓰다듬어 주었다.

“이 녀석, 마음대로 싸움에 끼어들고 다니고.”

꾸르륵―

백아는 이윤후가 자신을 혼내려 하자, 주눅이 든 척 고개를 숙이며 울었고, 그 모습에 이내 이윤후는 화를 풀었다.

그저 괜한 싸움에 휘말려 화를 당할까 하였으나, 백아가 도망가고자 마음먹으면 그 누구도 못 따라갔을 터였으니 걱정을 접었다.

“큰 싸움으로 번지지 않아 다행이네요.”

꾸륵―

유인경이 그의 곁으로 오자 백아가 뒤뚱뒤뚱 걸으며 그녀의 품에 안기었다.

“이런…… 정말 너 호색응(好色鷹)이로구나. 저기 저 여인 좋다고 그렇게 날아가더니, 또 나한테 안기는 거야?”

꾸륵―

안기는 백아를 보며 쓰다듬어 주면서 이윤후가 말했던 백아가 미인을 좋아한다는 말이 생각나 놀리듯 말했고 그 말에 백아의 눈이 똥그래지며 아니라는 듯 울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이윤후와 유인경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북해설응이라는 영물이 저렇게 대단한가요? 마치 말을 알아듣는 거 같잖아요?”

이윤후 일행을 지켜보고 있던 남궁나연은 안명을 바라보며 물었다.

“북해설응은 북해빙궁의 궁주 일족만이 길들이는 영물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자신이 인정한 주인만을 따르고, 원래는 흉포하고 성격이 까다로워 사람들이 주위에 가지도 못한다고 들었는데, 특이하네요…… 말도 분명 알아듣는 거 같고요.”

안명도 자신의 눈을 의심하며 보고 있었다. 그는 남궁세가의 직계는 아니었지만, 어릴 적부터 남궁나연의 호위무사이자 그녀의 글 선생으로 따라다녔다. 나름 무림의 모든 지식에 통달했다고 자부했지만 눈앞의 사실은 조금 생소했다.

서책 속의 북해설응과 자신의 눈앞에 서 있는 북해설응은 전혀 달라 보였다. 거기에 그 주인이라는 이윤후의 존재도 자신이 아는 지식에 반하는 인물이었다.

“설응의 주인이라는 저자…… 아니, 저분도 어떤 인물일지 가늠이 안 되는군요. 저분이 든 검이 정말 지욱 말대로 빙정으로 만들어졌다면 그 가치가 어마어마합니다.”

“빙정이라는 게 그렇게 귀해요?”

안명의 설명에 남궁나연은 궁금한 듯 반문했다.

“귀하다는 말로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까 보셨으면 알겠지만, 빙정은 그 투명도에 따라 엄청난 가치를 가지는데 저자…… 아니, 저분이 든 검은 그중에서도 최상급의 빙정으로 만들어진 듯합니다. 보통 빙정은 제련이 거의 불가능하여 원석 그대로 보관하고 사용하는 편인데, 검을 만들다니요……. 저 검의 가치는 상상하기도 힘듭니다.”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하는 안명의 모습에 그녀는 이윤후에게 이목을 집중했으나, 외관상 별다른 특이점이 보이지 않았기에 실망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너무 평범하잖아. 생김새가…….”

“생김새가 평범하다니요…… 지금 그런 거로 가치를 따지는 게 아니잖습니까. 아가씨, 제발 사람을 아름다움으로만 판단하지 마시라니까요.”

남궁나연의 철없는 소리에 안명은 답답한 듯 이야기했다.

“지욱의 말대로 저분은 사패(四覇) 중 북해빙궁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저 검으로 미루어 보아 궁주 직계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지욱이 마을에서 사고 친 우리를 가만히 두고 떠난 것입니다. 저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이 자리에서 죽거나 끌려가 고문당했겠지요.”

안명은 울분을 토하듯 이야기했다. 남궁나연이 마을에서 사고를 친 탓에 일이 이 지경까지 왔음을 드러내며 철없는 아가씨 탓에 모두가 고생했다는 하소연까지 섞었다.

그의 설명에 남궁나연은 물론 남궁가 인원들이 다시금 상황을 깨달았다. 남궁가는 정체 모를 이 대단한 청년에게 빚을 진 것이다.

“흐음, 정말 북해빙궁의 사람일까요? 무공 실력 또한 보통은 아닌 듯했습니다.”

남궁찬과 안명은 쌍사련의 합공에 피하는 것이 고작이었는데, 이윤후는 단숨에 셋을 제압하고 지욱과 맞서기까지 했었다.

지욱과는 이 합을 겨룬 것뿐이었지만, 절대 그의 하수로 보이지 않았었다.

“저도 그게 궁금하군요. 지욱과의 싸움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지 알았는데…….”

안명도 지욱이 그냥 물러난 게 다행이라 생각이 들면서도 아쉬웠던 이유가 이윤후의 실력을 끝까지 보지 못했다는 점이었다.

* * *

“저희가 정신이 없어 도와주신 은인에게 소홀히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안명의 말을 남궁나연이 이어받았다.

“남궁세가의 남궁나연이라 합니다. 은인의 도움에 감사드립니다.”

남궁나연은 다가와 이윤후를 향해 예를 표했다.

“아닙니다. 제가 구했다기보단, 저 녀석이 여기로 데려온 것이니까요.”

이윤후는 하늘을 가리켰고 모두 하늘을 보자 뱅뱅 돌고 있는 백아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빼액―

하늘에서도 마치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걸 아는 듯, 백아의 울음소리가 산을 울렸다.

그 모습에 남궁나연이 웃음 지었다.

“저 백아라는 매가 정말 여인을 좋아하는가요?”

남궁나연은 배시시 웃으며 이윤후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날개가 커서 그런지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길 잃은 여인들을 구해 주고 다니더군요. 하하, 정말 귀여운 녀석이지요.”

이윤후는 백아의 이야기가 나오자 크게 웃으며 이야기하자 남궁나연의 얼굴에 당황이 스쳤다.

‘아니. 내가 웃어 주면서 이야기를 했는데, 내 얼굴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새 자랑을 해…….’

남궁나연은 자신에게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백아의 이야기를 하는 이윤후의 모습에 마음이 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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