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검성, 돌아오다-15화 (15/251)

15화― 장윤호의 의뢰(依賴)

“혹시나 순진하게 독고진을 만나 보겠다고 생각하고 계신다면 그만두라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그녀는 장윤호의 말에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마치 그녀의 심사를 꿰뚫어 본 듯한 장주의 언행.

독고진과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 왔기에, 그를 의심하는 말에 반감이 일면서도, 너무도 칼같이 단언하는 장주의 모습에 의문이 일었다.

“뭔가 알고 계시군요?”

“알고 있다고 말하기보다는, 저라면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씀드리고 싶군요.”

의미심장한 장윤호의 말에 유인경의 표정이 굳어졌다. 무언가 알고 있음인가. 생각해 보면 장주는 아까부터 굳이 정보를 던져 주며 자신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어 했다.

“……말씀해 주세요.”

유인경이 간절한 표정으로 말하자 장윤호도 잠깐 생각에 빠지더니 입을 열었다.

“독고진이 소저를 죽이려 한 무리들과 같은 패가 아닐 수도 있다 생각할까 하여 말씀드리는 겁니다.”

“유 소저의 처지를 아셨습니까?”

장윤호의 말에 유인경도 놀랐지만 듣고 있던 이윤후도 의아했다. 같이 다닌 자신도 유인경에게 직접 듣고서야 그녀에게 벌어진 일을 알 수가 있었는데 장윤호는 모든 것을 알고 말하고 있었다.

“이런 철장을 하다 보면 무림의 소식에 민감할 수밖에 없지요. 정보를 소중하게 여기다 보니 이곳저곳에서 들어오는 소식이 많습니다.”

더 자세히 듣고 싶었으나, 이미 장윤호가 여기까지만 말하겠다고 선을 그은 것과 다름이 없었기에 유인경도 더는 묻지 않았다.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니, 하나만 더 묻겠습니다.”

“무엇을 말입니까?”

“할아버지를 지지하던 자들은 어떻게 되었나요?”

유인경의 물음에 장윤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부분은 대세를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들이…….”

유인경의 표정이 침울해졌다. 할아버지의 수족과도 같았던 경혼이 배신한 이상 다른 이들도 다르지 않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막상 현실을 마주하니 더욱 절망적이었다.

“그나마 적하문(赤霞門)과 구룡도문(九龍刀門)이 명확한 태도를 보이지 않고는 있지만…… 그들도 결국 현재의 사마련을 거스를 명분이 없습니다.”

“그 두 문파라면 할아버지가 처음 사마련을 세우실 때부터 친분이 두터운 곳이에요. 사정을 안다면 분명히…….”

유인경은 가만히 눈을 감은 채 고개를 가로젓는 장윤호를 보고는 말을 멈추었다.

“어째서……?”

“조금 전에 이미 말씀드렸잖습니까. 대세를 거스르지 않을 거라고요.”

“그게 무슨 의미죠?”

“적하문과 구룡도문이 유 소저의 할아버님이신 흑월도존과 친분이 두터운 건 맞으나, 소저의 힘이 되어 주긴 힘들 겁니다. 두 문파가 사파 중 유력 문파이긴 하나, 사마련에 비하면 작은 곳이니까요. 그들도 입장을 밝히지 않고 오래 버티진 못할 겁니다.”

“…….”

“사마련으로써도 현재 새롭게 련주에 오른 독고진을 주축으로 최대한 빠르게 현 상황을 정리하려고 할 터. 적하문과 구룡도문처럼 사마련의 아래로 들어오지 않는 문파를 계속 두고 보진 않을 겁니다. 그래야 반발하는 다른 세력에게 본보기를 보일 수 있고요.”

“그럴 수가…….”

작은 희망을 품고 있던 유인경으로서는 장윤호의 말이 너무나 잔인하게 들렸다. 그의 말을 모두 맞는 이야기였기에 더더욱.

“사파는 정파의 오절(五絶) 때문에 오랜 기간을 정파에 굴복당하며 지내 왔습니다. 오절이 모두 알 수 없는 이유로 모두 사라진 후, 흑월도존의 등장으로 사파는 그의 깃발 아래 사파의 부흥을 꿈꾸었죠. 하지만 흑월도존은 결국 사파일통을 하고는 무림일통의 깃발을 스스로 부러뜨렸습니다.”

“그건…….”

“네. 저도 알고 있습니다. 흑월도존께서 마교와의 싸움 도중 많은 수하와 가족을 잃으셨기에 생각을 바꾸신 것을요. 하지만 모든 사파가 흑월도존의 그런 마음을 알아주지는 않지요. 특히…… 정파에 원한이 많은 이들은요.”

장윤호의 말에 유인경은 부정하지 못했다. 이미 사마련 내부적으로도 계속 문제가 되어 왔던 일이었다.

“최대한 사마련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곳으로 도망치십시오. 흑월도존의 핏줄을 그들이 그냥 둘 리가 없으니까요.”

“……저희는 지금 서안으로 가려 합니다.”

장윤호의 말에 듣고 있던 이윤후가 말했다.

“서안이라, 서안이라면…… 무림맹으로 가려는 것입니까?”

“네. 장가철장에는 제 용무로 같이 왔고, 유 소저를 서안까지 데려다주기로 했습니다.”

“흐음…….”

장윤호가 갑자기 생각에 빠진 듯 말이 없자 두 사람은 의아해했다.

“제가 사파의 사람이라 무림맹이 있는 서안으로 가는 게 문제 되리라 생각하시는 건가요?”

유인경의 말대로 서안은 무림맹이 있는 곳으로 정파의 성역과도 같은 곳이었다. 사파 지존의 손녀가 서안에 도착해 정체가 밝혀진다면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이거, 두 분에게 제가 부탁드릴 것이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갑자기 뜬금없는 장윤호의 말에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유 소저에게 드린 도의 값이라 생각하시고 들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건…….”

갑자기 자신에게 준 도 이야기까지 꺼내며 부탁을 이야기하자, 유인경으로서는 난감하여 이윤후를 쳐다보았다.

“저도 이곳에서 상월을 받았으니, 부탁을 들어 보죠.”

이윤후의 말에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유인경은 장윤호를 보며 입을 열었다.

“어떤 부탁인가요?”

유인경은 장윤호가 뜬금없이 이렇게 나오는 데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 여겼다.

“물건 하나를 홍예루(紅蘂樓)에 전해 주십시오.”

“전하기만 하면 되는 건가요?”

“네. 이미 값을 지불받은 물건이니 전해 주시기만 하면 됩니다.”

장윤호는 그녀가 군소리 없이 허락하자 조금은 안도했다. 다행히 자신의 의도를 잘 받아들여 준 것 같았다.

* * *

“잘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윤호가 건넨 나무 상자를 이윤후가 받아 들어 이리저리 살피더니 등에 메었다. 한눈에 봐도 무기가 든 상자로 보였다.

“무례한 부탁일 수도 있었는데, 이렇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이렇게 좋은 도를 주셨는데 당연한 일이죠.”

유인경은 자신의 손에 들린 붉은 도를 가리키며 말했다. 붉은 도신에 어울리는 도집도 장윤호가 내주었고, 손에 잡으면 잡을수록 마음에 드는 도였다.

“장주님이 도신에 새겨 두신 적풍이라는 이름을 따서 적풍도라 부르겠습니다.”

“나중에 유 소저께서 도를 휘두르는 모습이 보고 싶군요.”

장윤호의 말에 유인경은 미소를 보였다. 두 사람은 장윤호에게 예를 표하고는 길을 떠났고, 두 사람의 뒷모습을 장윤호는 한참을 쳐다보고 있었다.

“마치 자식들을 멀리 떠나보내는 아버지의 모습 같군요.”

장윤호의 등 뒤에서 누군가 서 있었다. 그녀는 장윤호의 부인인 화정 부인이었다.

“지켜보고 있었습니까?”

장윤호는 그녀를 보며 미소를 보였고 이내 다시 사라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응시했다.

“왠지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예전 생각이 나서 지켜보고 싶더군요.”

“그래서 아끼던 적풍까지 내주셨군요.”

화정 부인은 자신의 시비를 통해 장윤호가 적풍을 유인경에게 내주었단 소식을 듣고 조금은 놀랐었다. 자신의 남편이 오랜 기간 신장을 연구하며 만든 수작(秀作)이었고, 누구에게도 보여 주지 않고 숨겨 두었던 병기였다.

장주가 되어 천무고를 인수한 이후, 장윤호는 신장에게 도전하겠다며 수많은 세월 동안 무기를 만들고 부수고를 거듭했다. 실패의 과정에서 좌절하며 결국 그나마 만족할 만한 무기를 만든 게 바로 적풍이었다.

그런 물건을 처음 만난 유인경에게 내주다니.

“그렇게 마음에 드셨나요?”

“질투하는 것이요?”

자신의 옷을 잡아끄는 화정 부인의 모습에 장윤호는 그녀를 바라보며 미소 지었다.

“당신이 유 소저에게 도를 내준 것은…… 아마도 그의 할아버지에게 신세를 지셨던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였겠지요.”

“하하, 당신은 내 마음을 꿰뚫고 있군요.”

화정 부인의 말에 장윤호는 기분이 좋은 듯 호탕하게 웃었다.

“은혜를 갚기 위함도 있지만, 내가 끼고 있어 봐야 적풍에게도 좋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 주인을 찾아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은 차에 유 소저가 눈에 띄었던 겁니다.”

“저야 나쁠 것이 없지요.”

“무엇이 말입니까?”

되묻는 장윤호를 한번 흘겨보고는 화정 부인이 입을 열었다.

“무슨 여인을 보듯이 맨날 적풍을 쓰다듬던 당신이 이제는 그 시간에 절 봐주지 않을까 기대가 있네요.”

“그랬구려. 지금 당장 적풍을 쓰다듬듯이 그대를 쓰다듬어 드리지요.”

화정 부인의 말에 장윤호는 그녀의 허리춤을 안아 자신의 품으로 안았다. 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래도, 저들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 준 거 아닌가요?”

화정 부인의 말에 장윤호는 다시 그녀의 허리를 잡고 있던 손을 놔주었다.

“두 사람 다 무림 경험이 없으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나중에 우리에게도 쓰임새가 있을 겁니다. 두 사람 다…….”

장윤호는 두 사람이 사라진 방향을 하염없이 쳐다보았고 그 모습이 안쓰러운지 화정 부인은 그의 등 뒤에서 안아 주었다.

“당신이 그렇다면 그렇겠죠. 두 사람 다 무사할 거예요.”

* * *

“보통 사람은 아닌 거 같았죠?”

유인경은 뒤돌아보더니 장가철장이 보이지 않자 앞서가던 이윤후를 쫓아가 말했다.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본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속에 숨긴 게 많은 사람 같은 느낌이더군요.”

“그래도 나쁜 사람 같지는 않았어요.”

유인경은 이윤후의 말에 동의는 하면서도 장윤호가 악의가 있는 것 같진 않았다고 느꼈다.

“유 소저는 장가철장의 장주님을 따로 만난 적이 없었나요?”

“왜요?”

“대화를 들어 봐도 그렇고 그 칼을 내준 것도 그렇고, 유 소저를 신경을 많이 쓰시는 거 같더라고요.”

“음…….”

유인경 역시 장윤호가 자신을 많이 신경 써 준다는 것을 느꼈지만 딱히 접점이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두 번 정도 장가철장에 들렀었으나 그 당시에도 장주를 만나지 못했었다.

“그나저나 홍예루는 어딘가요?”

“어라? 위치를 알아서 앞서가는 거 아니었어요?”

유인경은 이윤후가 장가철장을 나서고 계속 앞장서 가기에 당연히 길을 알겠거니 생각하고 뒤따르고 있었는데, 그의 물음에 발걸음을 멈추었다.

“일단 마을로 내려가려 했습니다. 그런데, 홍예루가 어딘지 모르고 덥석 수락하셨던 건지요?”

“저도 딱히 사마련 밖으로 많이 나가 본 게 아니라…….”

사실 유인경은 적풍을 받아 기쁜 마음에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사마련에서 지내 왔던지라 외부 출입이 많지 않았기에 그 주변 일대에 관한 것 외엔 아무것도 몰랐다.

유인경은 머쓱한 듯 이윤후를 마주하며 어색하게 웃은 뒤 말없이 산에서 내려가는 걸음을 재촉했다. 사파 지존의 손녀답지 않은 허술함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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